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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가톨릭교회사

교리 논쟁(Ⅱ)

by 파스칼바이런 2012. 7. 27.

 

교리 논쟁(Ⅱ)

 

 

그리스도론

 

그리스도론은 그리스도의 위격(位格)에 있어서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의 정확한 관계를 설명하려는 것이었다. 성서는 이에 대해 명백하게 정의를 내리지 않았다. 따라서 그리스도에 관계되는 성서 구절의 해석에 있어서 두 신학파인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티오키아 학파는 서로 견해를 달리하였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면서, 그리스도 안의  신성과 인성의 일치는 오직 신성에서만 이루어지며, 두 본성은 모두  그 자체로 존재하며 서로 구분되지만 분리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반면에 안티오키아 학파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역설하면서 인성을 신성과 독립하여놓고 두 본성의 일치는 외면적인 것으로 보았다.

 

치릴루스와 네스토리우스 :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인 치릴루슨느 그리스도 안의 신성과 인성은 아주 밀접하며 실제적인 것으로 보고, 이 일치 후에는 하나의 본성을 이루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때에 안티오키아의 총대주교인 네스토리우스는, 마리아는 ‘하느님의 모친’ (Theotovkos)이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의 인성인 예수만을 낳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모친’(Christovkos)이라고 주장하였다. 여기서 그는 마리아가 하느님의 모친임을 반대하였지만, 아리우스와 같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리스도의 인간성의 완전함을 살리기 위해서 신성에서 인성을 분리하여 두 본성이 모두  완전하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완전한 분리는 그리스도의 한 위격 안에 불가분의 합일을 인정치 않는 이원론(二元論)에 이르게 되었다. 이 두 신학파의 대립은 상반되는  신학적 견해 외에 두 총대교구인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키아 사이에 있었던 라이벌 의식이 직접 개입되어 있었다.

 

치릴루스는 429년에 에집트의 성직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교황 첼레스티누스 1세(422-432)의 지지를 보장받아 네스토리우스를 강경하게 반박하고, 12항의 파문조문(破門條文)을 작성하여 교황의 이름으로 네스토리우스에게 보내 그의 주장을 취소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네스토리우스는 반박하는 12항의 파문조문을 발표하였고, 동 로마 제국의 황제인 테오도시우스 2세(408-450)를 자기 편으로 하여 서 로마 제국의 황제인 발렌티니아누스  1세(425-455)와 함께 공의회를 개최하도록 권하였다.

 

에페소 공의회 :   에페소에서 431년 6월 22일에 공의회가 열리었다. 개회식에 네스토리우스 파의 지지자인 주교들이 도착하지 않자 치릴루스는 그가 그리스도 안의 신성과  인성의 실제적 일치를 언급한 교리선언문을 낭독하였다. 이 선언문은 198명의 참석주교들에 의해 인준되었고, 이들은 네스토리우스와 그의 주장에 대한 단죄에 서명하였다. 따라서 이 공의회에서 마리아가 하느님의 모친이라는 교리가 정식으로 공표되어 밖에서 기다리던 군중은 환호로 받아들였다. 며칠 후에 안티오키아로부터 44명의 주교가 도착하여 즉시 네스토리우스 편을 들어 에페소 공의회에 반대하는 공의회를 구성하였다.

 

여기서 이제 상호간에 악의에 찬 공격과 비난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여기서 황제는 이 소동에 개입하여 두  지도자인 치릴루스와 네스토리우스를 연금하였다. 나중에 치릴루스는 그의 지방인 알렉산드리아로  되돌아가도록 허락되었지만, 네스토리우스는 에집트의 북부지방으로 쫓겨나 그곳에서 451년경에 사망하였다. 네소토리우스 사건에 있어 오늘날까지 밝혀지지 않은 것은 그의 가르침이 어느 정도까지 이단이며, 그는 오해의 희생물이 아니었는가 하는 문제이다.

 

단성론(단성론 : Monophysitism) :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에 대한 지나친 반박에서 새로운 이단이 발생하였다. 수도원 원장인 에우티케스는 네스토리우스의 강경한 반대자이며 동시에 치릴루스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그는 그리스도 안의 신성과  인성의 일치를 강조하면서 인성은 신성에 의해서 완전히 소멸된다고 주장하였다. 그가 그리스도의 인성의 존재를 부인함으로 해서 성서에서 말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강생(降生)의 신비와 그의 구원자로서의 전제조건이 없어져 그리스도의 구원의 교리가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인 플라비아누스가, 에우티케스를 한  종교회의에 소환하여 그의 주장을 취소할 것을 명하였으나 그는 이에 불응함으로써 이단자로 단죄되었다. 그러나 치릴루스의 후계자이며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인 디오스크루스는 에우티케스의 주장을 지지하였다. 이 총대주교의 요구에 의하여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는 449년에 에페소에 다시 한번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이 회의에서 에우티케스는 명예 회복되었고, 따라서 교황  레오 1세(440-461)는 이 회의를 강도 행위의 모임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는 플라비아누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리스도의 한 위격 안에서의 신성과 인성의 일치에 대한 교리를 천명하였다. 이는 최초의 ‘교황의 무류권(無謬權)’ 행사였다. 교황이 황제에게 새로운 공의회의 소집을 요구하여, 테오도시우스 2세의 계승자인 마르치아누스(450-457)가 칼케돈에서 공의회를 개최하게 되었다.

 

칼케돈 공의회(451년) :   이 공의회에는 약 350명의 주교들이 참석하였고 교황의 특사가 사회를 맡았다.

이 회의에서 디오스크루스는 이단자로 단죄되었고, 그리스도 안의 한 본성의 단성론적 교리가 거부되었다.

그리고 공의회는 신조로서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그리스도 안에서 두 개의 본성은 혼합되거나 구분되지 않으면서 한 위격 안에서 일치된다.’

 

이에 레오 1세는 그리스도 문제에 있어서 테르툴리아누스 이후의 서방교회의 신학적 설명을 토대로 하여 위격적 일치(Hypotastic Union)의 교리를 선언하였다. 즉 치릴루스와 에우티케스에  반대하여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은 어떠한 혼동이나 구분이  없이 그 주체성을 지니고 있으며, 네스토리우스 주장에 반대하여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은 서로 분리될 수 없으며 천주 성자의 위격 안에서 일치되어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일치를 바탕으로 그리스도의 구원의 교리를 살릴 수 있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한 이러한 결정은  구원론의 기초가 되고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본적이고도 중요한 교리가 되었다.

 

이러한 개념적이고 언어학적인 해명은 서방 신학 발전에 있어 견고한 바탕을 마련하였지만, 동방 교회에 있어서는 그렇지 못하였다. 이미 공의회  회기 중에 서방과 동방 교회의 신학자들간에 긴장 상태가 일어났고 이로써 심각한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태는 교황과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라이벌 의식에 의해 가중되었다.

 

그러므로 동방 교회에 있어서는 칼케돈 공의회 이후에도 계속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일치는 단성론적이었다. 이러한 단일성의 개념은 신학면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면까지 연장되어 종교와 정치, 교회와 국가를 흡수, 융합시키는 동방 교회의 제국 신학을 발달케 하였다. 이 단성론에 대한 교리는 정치적 개입으로 몇 차례의 종교 회의를 거치면서 교회의 혼란을 초래했으나, 콘스탄티노플 공의회(680년)에서 다시 한 번 칼케돈 공의회의 결정이  재확인되면서 이 문제는 교회 안에서 마무리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