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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가톨릭교회사

고대에서 중세로의 과도기 그리스도교(Ⅰ)

by 파스칼바이런 2012. 7. 27.

 

고대에서 중세로의 과도기 그리스도교(Ⅰ)

 

 

야만족의 침입

 

고대에 있어서 야만인이란  말마디는 미개국(未開國)이나 적대국(敵對國)의 국민들을  가리키는 데에 사용되었다. 로마 제국의 저술가들은 이 단어를  국경을 둘러싸고 있던 게르만 민족을 지칭하는 데에 사용하였다. 이 민족은 두 그룹, 즉 동 게르만 인(서 고트 족, 반달 족, 부르군디 족, 동 고트 족, 롬바드르 족)과 서 게르만 인(프랑크 족, 알레만니 족, 앵글 족, 색슨 족, 프리시아 족)으로 구별되었다. 이들은 개별적으로 농경민, 노예, 용병(傭兵)으로 로마 제국내에 이주하기 시작하여,  4세기 후반에 들어서서 훈 족의 서진(西進)으로 밀려 집단적으로 제국령을 침입하여 마침내 476년에 서 로마 제국(로마 제국은 395년에 동서로 양분되었음)이 멸망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들은 제국내에 여러 왕국을 건설하였다. 이 게르만 족의 침입(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이라고도 함)은 당시의 그리스도교에 막대한 피해를 주었다. 이는 교회조직이나 교회생활에 혼란을  초래하였고, 더 나아가서 일부 지역에서는 교회가 철수하거나 전멸되었다.

 

아울러 동 게르만 인들은 침입 이전에 로마 제국의 선교사들에 의해서 그리스도교로 개종되었다. 이때에 유명한 선교사로서 울필라스(311/2-382/3)가 있었다. 그는 고트 족과 혈연관계가 있는 사람으로서 이단인 아리우스 파의 그리스도교를 알게 되어 이를 서 고트 족에게 전하였다. 따라서 이 고트 족으로부터 시작하여 동 게르만 인들은 아리우스 사상의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였다. 이러한 아리우스의 신앙은 게르만 통치자들과 이들의 지배를 받게 된 로마 제국의 가톨릭 주민들 사이에 많은 어려움을 일으켰다. 특히 아프리카 지역에서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였다.

 

게르만 민족의 개종

 

일부 아리우스 파의 게르만 민족은 침입 이후에 정통신앙인 가톨릭교회로 개종하였다. 서 고트 족은 세빌라의 주교인 레안델에 의해서, 부르군디 족은 비엔나의 대주교인 아비투스에 의해서, 롬바르드 족은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에 의해서 가톨리시즘으로 전환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게르만 민족 중에서 서 게르만인 프랑크 족의 개종은 서구에 있어서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중대한 역사적 역할을 하였다. 아리우스 사상은 게르만 민족이 점령한 지역의 가톨릭 주민들과 유대를 이루는 데에 장애가 되었으나, 프랑크 족은 이 아리우스 사상과 접촉이 없었다. 따라서 어느 게르만 족보다도 쉽게 그들의 우상숭배의 외교사상에서 가톨릭 교회로 개종하였다. 이러한 개종은그들이 점령한 로마 국민들과 유대를 굳힐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였고, 마침내 프랑크 족과 가톨릭과의 일치는 프랑크 왕국(메로빙가 조 왕국)의 확장에 도움을 주었다. 반면에 다른 게르만 족들은 이러한 유대를 이루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왕국은 일찍 멸망하였다.

 

프랑크 족과 그 왕(王)인 클로비스(481-511)의 개종은 문화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세계사에  나타난 중요한 사건들 중의 하나였다. 그것은 그리스도교화한 고대 문화권과  게르만 족과의 융합을 가능케 하였다. 따라서 가톨릭교회는 게르만 민족에게 고대의 문화적 전통을 전해주는 공헌을 하였다. 그리고 이는 가톨릭 교회 발전에 중대한 역할을 하였다. 다른 게르만 족이 가톨릭 신앙으로 전환하는 데에 중요한 구실을 하였으며, 아리우스 이단의 확산에  결정적인 저지(沮止)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클로비스의 개종의 동기와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견해가 있다. 종래의 견해는 뚜르스의 주교인 그레고리우스의 저서인 「프랑크 족의 역사」에 근거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콜로비스의 개종은 신의 섭리의 결과로 설명된다. 가톨릭 신자인 왕비 클로틸다는 결혼(493) 후 그의 남편이 가톨릭교회로 입교하도록 노력하였다. 그러나 클로비스는 아내의 권유를 오랫동안 거부하여 왔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개종으로 프랑크 족의  신들의 노여움을 사지 않을까 걱정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첫아들의 세례에는 동의하였다. 불행하게도 이 아기는 영세 후, 즉시 사망하여 왕은 이 죽음을 아내의 신(神)의 탓으로 돌렸다. 다음 아들이 탄생하였을 때에 그의 세례를 주저하다가 허락하였다.

 

그러나 이 아들 역시 병에 걸리자 다시 가톨릭 교 때문이라고 비난하였다. 다행히 이 아이는 클로틸다의 기도로 완쾌되었다. 그리고 클로비스는 알레만니 족과의 전쟁중에 그의 군대가 라인 강의 한 골짜기에서 패망의 위기에 처하였을 때에 그이 아내 클로틸다의 신(그리스도)을 부르면서, 전쟁에서 그가 승리하면 그리스도교 신도가 되겠다고 약속하였다. 승리한 후에  왕은 그의 군대와 함께 496년 성탄축일에 랭스의 주교인 레미지우스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클로비스의 개종을 신의 섭리의 신비적 결과로 보는 견해는 당시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정치적인 요소를 참고하지 않고 있다. 클로비스는 정치적 측면에서 점령지 주민의 가톨리시즘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이 국가 통치를 쉽게 할 수 있으며, 프랑크 족의 전통 신앙을 희생하는 것이 왕과 프랑크 족의 새로운 구조를 견고케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종래의 견해는 또하나의 역사적 문헌을 참조하지 않고 있다. 트리엘의 주교인 니체투스의 증언에 의하면, 클로비스는 세례받기 이전에 뚜르의 마르티누스 성인의 묘를 순례하였을 때에 감명을 받고 그곳에서 영세하기로 서원하였다.

 

따라서 세례 시기도 498년 또는 499년으로 간주되고 있다. 최근 연구의 결과는 클로비스의 개종에 정치적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클로비스는 왕이 된(482년) 후에 교회와 성직자들에게 호의를 베풀었고, 레미지우스 주교와 아내인 클로틸다의 영향으로 점차 가톨릭 교회의 문턱에 다가갔다. 그러나  입교(入敎)는 주저하였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는 경우에 아직 프랑크 족의 신들을 굳게 믿고 있던 군대 지도자들이나 국민들에게 신임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후에 서 고트 족과  전쟁을 할 때 그 지역의 가톨릭 주민들과 동맹(同盟)을 맺기 위해서 506년에 영세하기로 결정하였다.

 

프랑크 교회

 

프랑크 교회는 일종의 폐쇄된 국가교회였다. 국경이 바로 종교적 경계선이 되었고, 프랑크 왕국의 어느 지역도 외부교구에 속하지 않고, 이 교회는 왕에게 예속되었다. 국가 차원의 종교회의도 왕에 의해서 소집되었고, 회의의 결정 역시 왕이 선포하는 것과 같았다. 주교들은 왕의 뜻과 귀족들의 영향에 의해서 선출, 임명되었다. 이러한 예속화로 교회는 국가로부터 보호와 이익을 얻었지만 보다 많은 위험을 내포하였다.

 

프랑크 교회는 중요한 성직자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그들은 6세기의 교회에서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한 주교들로서 비엔나의 아비투스, 랭스의  레미지우스, 트리엘의 니체투스, 빠리의 제르마누스, 뚜르스의 그레고리우스 등이다.

 

그리고 프랑크의 그리스도교는 복음성서에 나타난 원칙에 따른 그리스도교적 생활을 통해서 서서히 성장되었다. 수많은 신심조직이 창설되었고,  성인과 성해(聖骸) 공경이 성행하였다. 그러나 윤리 면에 있어서는 아직 야만성과 이교적 관습이 남아있었다. 그러나 이 교회는 국가와 밀착되어 있었기 때문에, 프랑크의 메로빙가 왕조의 멸망은 교회의 쇠퇴를 동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