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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에서 중세로의 과도기 그리스도교(Ⅱ)

by 파스칼바이런 2012. 7. 28.

 

고대에서 중세로의 과도기 그리스도교(Ⅱ)

 ―영국 제도의 교회와 유럽 대륙 선교―

 

 

고대 영국(브리튼) 교회

 

로마 인들은 43년부터 85년에 영국 제도(諸島) 중 대(大)브리튼 섬(영국 본토)을 점령한  후에, 브리타니아 주(州)라는 명칭으로 로마 제국에 편입시켰다(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는 정복되지 않아 브리타니아 주에 속하지 않았음). 영국 고대 교회가 역사적으로 존재하였다는 사실은 고고학에 의해서뿐 아니라 테르툴리아누스, 오리게네스, 에우세비우스 등 교회 저술가들의 증언으로 입증되었다. 또한 최근 연구에서도 이 고대 교회의 설립 과정에 대해서 몇 가지 견해를 내놓고 있다. 예컨대 그리스도교가 소(小)아시아로부터 해로(海路)를 통해서 이 섬에 도입되었다든가, 또는 리옹(프랑스의 도시)의 신도들이 177년의 박해 이후에 이곳에 들어왔다든가, 혹은 이 교회는 로마나  골(프랑스)지방에서 파견된 선교사들에 의해 2-3세기에 설립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고대 교회는 선교활동도 나섰다. 전승되어오는 바에 의하면, 브리튼 사람(이는 기원전 2세기에 이 섬에 정주한 켈트 민족계임)인 니니아누스(360년경-432년경)는 로마에서 신앙교육을 받고 교황 시리치우스(384-399)에 의해 주교로 임명되어, 4세기 말경에 스코틀랜드에  복음을 전파하러 파견되었다. 그러나 5세기 후반에 게르만 민족(앵글 족, 색슨 족)이 이 섬에 들어옴으로써 대부분 지역에서 고대 영국교회는 사라졌다. 그러나 서부지역(웨일즈)에서는 이 교회가 존속하였을 뿐 아니라 확산되었다.

 

로마 군대가 철수하고 게르만 민족이 침입한 후에 영국 고대 교회의 모습은 변화하였다. 이 교회는 켈트 민족의 특성을 갖춘 수도원 체제의 교회였다. 이 켈트 교회의 특성은 고대 로마 식의 부활절, 특수한 형태의 성직자 삭발(削髮) 등으로, 많은 학자들은 앵글 족과 색슨 족 침입 이후의 영국 고대 교회와 유럽 대륙 교회가 분리되었다는 것을 이러한 특수성들을 가지고 설명한다. 그런데 어떤 학자들은 이 영국 교회가 로마 교황권에서 독립하였고, 주교 체계를 갖추지 않은 교회였다고 주장한다. 물론 게르만 민족의 침입 이후에 고대 영국 교회의 역사에서 교황 관할권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5세기에 사제(Sacerdos)들과 장로(Presbyter)들이 교회를 통치하였다는 비문이 발견되었는데, 여기서 사제란 5-6세기에는 주교를 의미하였다. 따라서 이 영국 고대 교회는 주교 체제의 교회였다.

 

아일랜드 교회

 

아일랜드는 로마 제국이나 게르만 민족의 침입을 받지 않았다. 이 섬지방은 당시에 유목민의 땅으로 미개한 지역이었다. 사회조직은 가정에 기초를 두고, 각 가정은 씨족에 속하였고, 씨족은 부족을 이루어 그들의 왕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부족국가에 그리스도교 복음전파에 공헌한 두  선교사가 있다. 첫 선교사는 팔라디우스였다. 그는 로마 교회의 부제(副祭)로서, 431년에 첼레스티누스 1세(422-432)에 의해 아일랜드의 주교로 임명되어 파견되었다. 그러나 그의 선교활동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둘째 선교사는 유명한 아일랜드의 주보성인 파트리시우스였다. 그는 골  지방의 수도원에서 선교활동을 위한 준비교육을 받고 432년에 팔라디우스의 후계자로 주교가 되었다.  그는 대중의 개종을 위해서 우선 부족장이나 왕에게 복음을 설교하였다.

 

아일랜드의 교회는 수도원 중심의 교회였다. 이것은 파트리시우스의 수도원에 대한 애착심에서 나온 교회조직이다. 6세기부터 많은 수도원이 창설되고, 그 발달은 교회조직에 큰 영향을 끼쳤다. 수도원은 교회행정의 중심이 되었고, 수도원장은 수도원이 위치한 전지역을 관할하였다.  이러한 수도원장이 모두 주교는 아니었다. 어느 원장은 주교 제자를 두어 그로 하여금 주교로서 할 수 있는 직무를 수행케 하였다. 그리고 이 교회는 고유한 종교관습을 갖고  있었다. 이들은 유대교의 유월제와 일치하는 부활절을 지냈고, 성사적 참회의 예식을 행하고 있었다. 여기서 유명한 '속죄총칙'(贖罪總則)이 생겼다. 이는 죄인의 신분, 죄의 경중, 죄에 대한 원의 등에 따라 보속을 규정한 책자다. 이 교회는 또한 열성적 신앙생활의 실천으로 많은 성인들을 배출했다.

 

아일랜드 교회는 선교사업에도 종사하였다. 이 교회의 유명한 선교사는 우리는 두  성인, 즉 골룸바(597년 사망)와 골룸바누스(540/550-615)를 들 수 있다. 아일랜드 교회의 선교활동은 유럽 대륙(독일과 프랑스)에서 그리스도인 생활의 추진력이 되었고 수많은 개종자들을 냈다. 그러나 이 선교는 프랑크 왕국의 정치적 보호를 받았으므로 개종자들 중에 새로운 종교에 대한 반감이 일었다. 왜냐하면 이 종교는 그들의 정치적 박해자들의 교회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프랑크 세력이 물러나자 새 개종자들은 대부분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버렸다. 또한 아일랜드 교회는 그들의 지방의 강한 고유성으로 적응력이 결여되어, 선교지방의 주민들과 충분히 일치하지 못했다. 그리고 선교사업에 계획이 없었고 선교사들 상호간에 협조가 없었다. 게다가 중심 교회인 로마와의 계속적인 협력이 없었기 때문에 항구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앵글로―색슨 교회

 

앵글로―색슨 족의 그리스도교화에 대한 계획과 실현은 교황 대(大)그레고리우스 (590-604)에서 비롯되었다. 교황은 596년에 로마의 성 안드레아 수도원 원장인 아우구스티누스를 40명의 수사와 함께 영국에 파견하였다. 그레고리우스 교황은 수도자들에게 선교사업을 맡김으로써 수도원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였다. 즉 수도생활과 사목생활을 합치시켰다. 이것은 이제까지 없었던 것으로 수도원 출신인 교황의 고유한 정책이었다. 그리고 그는 선교방법에 있어서 토착화를 강조하였다. 한 신앙 안에 여러 관습이 있다는 것을 가르치면서, 그 관습 중에 영국인에게 맞는 것을 선택하여 복음을 전파하도록 명령하였다. 또한 문맹자들을 위해서는 신앙의 교육의 수단으로 교회의 성상(聖像)을 사용하라고 지시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선교활동이 성공을 거두어, 601년에는 12개의  교구가 있는 두 관구(요크와 캔터베리)가 설립되었고, 6세기 말까지는 영국의 대부분 지역이 그리스도교화되었다.  그는 고대 영국 교회가 존속하여오던 서부지방(웨일즈)과의 접촉을 시도하였으나, 브리튼 족의 게르만 민족에 대한 증오로 실패하였다. 앵글로―색슨 교회는 로마 교회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로마에 충실하였다. 수도원은 크게 발달하지 못하였으나, 남녀 공동 수도원이 이곳에서 창설되었다. 여기서 수녀원장이 두 공동체의 장상이 되며, 두 수도원은 상호 접근하여 있으면서 한  성당을 사용하되 서로 다른 시간에 예절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수도원은 지적 활동의 중심지로 수사학, 문법, 자연과학 등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유럽 대륙으로부터 복음을 받아 성장한 앵글로―색슨 교회는 다시 대륙선교에 나섰다. 이 교회의 선교사들은 아일랜드 선교사들이  갖추지 못했던 인내심, 적응성,  조직능력을 지녔고, 로마와 협조하고 있었기 때문에 항구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중요한 선교사로는 프리시아(네덜란드)의 사도인 윌리브로드(658-739)와 독일의 사도인 보니파시우스 (672/675-754)를 들 수 있다. 윌리브로드는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고, 11명의 수사와 함께  프리시아에 가서 프랑크 왕국의 보호 아래서 선교를 시작하여, 695년에는 프리시아의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는 로마와 긴밀한 유대를 가지면서 대중의 개종을 위해서 지도자들에게 우선 복음을 전하였다. 보니파시우스 역시 수도원(성 베네딕또 회)에서 교육을 마친 후에 유럽 선교에 나섰다. 722년에 선교주교로 임명된 그는 747(또는 748년)에 마인쯔를 그의 관구교구로 세웠다. 그는 프랑크  교회를 재조직하고 개혁을 단행하였다. 무엇보다도 로마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 프랑크 교회와 로마 교회와의 결합을 위해 노력하였고, 교황의 영향력을 북부 유럽에까지 확대하는 데  힘썼고 교황청과 프랑크 왕국의 일치를 준비하여 그리스도교 서구(西歐) 즉 중세 탄생케 하는 데 공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