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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가톨릭교회사

서구 그리스도교 제국의 창설

by 파스칼바이런 2012. 7. 28.

 

 서구 그리스도교 제국의 창설

―중세 교회(Ⅰ)―

 

 

샤롤르 마르텔과 교황청

 

프랑크 왕국에 있어서 메로빙가 왕조의 왕들은 명목상의 국가 원수였을 뿐이고 궁재(宮宰)들이 실질적 통치자들이었다. 639년 이래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카롤링거 가(家)의 궁재인 샤롤르 마르텔(715-741)이 732년에 프랑스 남부지방까지 침입해온 이슬람 교도를 격퇴하여 서구(西歐)를 구하면서, 그는 대관식을 갖지 않은 서구의 왕이 되었고 카롤링거 가의 지배권을 장악하였다. 한편, 서 로마 제국이 멸망한(476년) 후에 비잔티움(동 로마 제국)이 로마 제국의 유일한 합법 정부가 되었다.

 

그러나 아랍 인 침입과 전쟁으로 인하여 국력이 쇠퇴한 동 로마  제국은, 그 보호령이었던 로마가 740년경 롬바르드 족에게 공격을 받고 패망의 위기에 처하여있었을 때에 아무런 도움도 줄 수가 없었다. 따라서 교황 그레고리우스 3세(731-741)는 새로운 보호자를 구하여야 했고 여기서 교황은 프랑크 족에게 눈을 돌려 마르텔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마르텔은 사신들에게 많은 선물을 주어 보내었으나 이 요청은 거절하였다. 그것은 그가 당시에 롬바르드 족과 동맹을 맺고 아랍 인과 전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교황은 롬바르드 왕과 20년 간의 평화협정을 맺게 되었다.

 

마르텔은 자기의 정치적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서 교회의 협조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선교사들에게 프리시아 지역에서 복음을 전파하도록 편의를 베풀었고, 교회 보호를 약속함으로써 교황청과 프랑크 왕국과의 연합의 길을 터놓았다. 그러나 중세기의 특징인 그리스도교 제국의 사상을 염두에 두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교회를 세속화하였고 프랑크  교회를 쇠퇴케 하였다.

 

그의 시대에는 교회 발전을 위해 지방공의회나 종교회의(시노드)가 개최되지 않았다. 마르텔은 교회의 고위성직과 성직록(聖職錄)을 그 자신의 이익 추구와 권세확장을 위한 수단으로  보았다. 그래서 그는 교회 재산을 약탈하고 주교좌나 수도원을 팔아버리거나 그의 친족과 정신(廷臣) 들에게 하사하였다. 따라서 성직자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장사를 하였다.

 

프랑크 왕국과 교황청의 동맹

 

샤를르 마르텔이 사망한(741년) 이후에 생 드니 수도원에서 교육받은 두 아들, 카를로망과 소(小) 페펭(페펭3세)이 궁재직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747년에 카를로망이 수도원에 입회하여 페펭이 프랑크 왕국의 유일한 실권자가 되었다. 더 나아가 그는 이제 명실공히 프랑크 왕국의 영도자가 되기를 원하였다. 그런데 왕권에 대한 게르만 족의 사상은 신성한 종교적 의미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페펭은 그의 집권을 정당화하고 왕가혈통의 결여를 영신적인 축성으로 대치하고자 왕권보다 높은 권위를 필요로 하였다.

 

여기서 그는 이러한 권위를 교황에게서 받을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페펭은 교황 자카리아스(741-752)에게 사신을 보내어 왕권을 소유하지 못한 프랑크의 메로빙가 왕의 문제에 대해서 문의하였다. 이에  교황은 왕권을 박탈당한 이보다는 왕가의 지배권을 받은 이가 왕으로 불려져야 한다고 답변하였다. 이러한 답변은 페펭이 왕위 찬탈(簒奪) 시도를 승인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페펭은 교황의 판결에 힘입어 751년에 수아송에서 국회를 소집하여 귀족들에 의해 정식으로 프랑크 왕국의 영도자로 선출되었고, 교황이 지명한 프랑크 대주교에 의해 축성되어 그리스도교 왕권이 확립되었다. 그리고 프랑크 왕국에서 카롤링거 왕조가 시작되었다. 이제 로마 교황은 동 로마 제국과의 유대관계를 끊고 서방에 눈을 돌리면서  서구의 대표인 프랑크 왕국과 제휴하였다.

 

따라서 753년에 롬바르드 족이 재침하여 로마를 위협하였을 때에 교황 스테파누스 3세(752-757)는 프랑크의 페펭을 방문하여 원조를 청하자 왕은 쾌히 승낙하였다. 왜냐하면, 페펭의 입장에서 볼 때, 교황청이 과거에 자기의 왕위 찬탈을 승인해 준 빚을 갚을 수 있고 그가 받은 그리스도교 왕권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였으며, 그는 또 왕권이란 그의 정치력과 군사력을 교회 보호를 위해 사용해야 된다는 종교-윤리적 의무를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페펭은 754년 1월에 폰티온에서 교황청과 일종의 방위조약인 우호동맹을 맺어 롬바르드 족의 침략에서 교황청을 보호하고 침략자가 점령한 지역을 교황에게 반환해 줄 것을 약속하였다. 같은 해 4월에 퀴에르지에서 열린 국회에서는  교황청을 보호할 것을 결정하였다. 7월에 교황이 직접 생 드니에서 페펭과 그의 두 아들, 샤를르와 카를로망을 축성하고서 이들에게 '로마의 보호자'란 칭호를 수여하였다. 이런 칭호는 프랑크 민족에게 새로운 임무, 즉 서방 그리스도교를 보호하는 역할이 부여된 것을 의미한다. 페펭은 두 차례(754,756)에 걸친 원정으로 롬바르드 족을 격퇴시키고 그 영토를 교황에게 증여하여 그의 약속을 이행하였다. 따라서 이제 교황이 군주로서 지배하는 교황령의 건설에 그 기반이 이루어졌다.

 

샤를르 대제와 그리스도교 제국

 

후시대에 샤를르 대제(Carolus Magnus)라고 불리는 샤를르(768-814)는 중세기에 있어 가장 유능한 통치자였다. 그는 그의 동생 카를로망과 함께 국가를 분할하여 통치하다가 771년에 동생이 사망하자 단독 영도자가 되었다. 773년 롬바르드 족이 로마를 공격하였을 때에  교황 아드리아누스(772-792)는 샤를르에게 원병을 청하였다. 이에 프랑크 군대는 이딸리아로 진군하여 롬바르드 족을  멸망시켜 프랑크 왕국에 합병하였다. 그리고 774년 부활절에 샤를르는 교황과 함께 로마의 베드로 사도의 무덤에서 영원한 우호관계를 선서하였고, 군사적으로 로마를 보호할 것을 선언한 동시에 그의 부친처럼 롬바르드 족이 점령하였던 땅을 교황에게 기증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롬바르드 족을 쳐이긴 후에 샤를르는 이딸리아 전역에 대한 자신의 권익을 추구해야 되었기에 헌납약속의 실행을 주저하다가 781년에 로마 공국(公國), 라벤나 등 몇 개의 소지역구를 교황에게  기증했다. 이렇게 하여 이제 교황령이 건설되었고, 이는 1870년까지 존속하였다.

 

이 교황령은 교회의 역사를 통해서 교회를 견고케 하는 데에 도움도 주었지만 부담이 되기도 하였다. 샤를르 대제는 교회의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그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서, 「하느님의  나라」(神國)를 애독하면서 그의 왕권을 그리스도교 정신으로 이해했다. 게르만 민족의 토대  위에 그리스도의 새 나라를 건설한다는 것이 그를 지배한 사상이다. 그래서 그는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원정하는 것을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뿐 아니라 종교적으로나 교회적  입장에서 이룩하여 점령 지역의 이교인이나 미신자 주민들을 프랑크 왕국에 예속시키는 동시에 가톨릭으로 개종시켰다.

 

또한 그는 그의 부친과 보니파시우스가 시작한 교회개혁을 계속 추진하였다.  그런데 이 개혁과정에서 샤를르는 교회를 내외적으로 간섭하였다. 그는  교회생활의 활성화를 위해서 법령을 반포하고 국가종교회의를 개최하고 국가 공무원으로 하여금  종교 업무까지도 감독케 하였다. 샤를르는 자신의 이러한 행동을 보니파시우스의 개혁을 완성시키기 위한 것으로 정당화시켰다.

 

샤를르의 왕권 사상은 신인(神人) 양성의 성격을 띠고 있어 자기 자신을 ‘왕이요 사제’ (Rex et Sacerdos)로서 간주하였다. 그에게 있어서는 영신적인 것과 세속적인 사실의 구분이 명백치 않았다. 특히 그가 황제권에 대한 비잔티움의 개념, 즉 황제교황주의(皇帝敎皇主義)를 알고난 후에 더욱 그러하였다. 그는 자신을 프랑스 교회의 통치자로서 자처하여 교회의 여러가지 규율과 교리에 대해서 간섭하였고 교회 재산을 세속화하였다.

 

또한 고대교회로부터 전승되었던 교회의 주교선출의 자주권, 즉 성직자단이 주교 후보자를 추천하고 평신도들이 환호로써 승인하여 선출하던 관례를 무시하고 자신이 임의대로 주교를 임명하여 교회의 요직에 배치하였다. 이제 교회 지도자들은 목자라기보다는 국가의 공무원으로서 영신면을 담당하는 이들에 불과하였다. 이들은 그들의 영신적 임무수행에 있어 세속권의 정책을 그대로 실행하는 왕의 정치적 도구가 되었다. 이것은 보니 파시우스가 교회개혁을 위해 시도한 본래의 의도와는 정반대였다. 그후 샤를르의 후계자들에 의해서 이러한 교회 세속화는 더욱 더 강조되었고, 마침내 중세 후기에 와서는 세속권과 교권의 서임권(敍任權) 투쟁의 불씨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