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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가톨릭교회사

신성 로마 제국의 탄생

by 파스칼바이런 2012. 7. 28.

 

신성 로마 제국의 탄생

― 중세 교회(Ⅲ) ―

 

교회 지배에 의한 집권 정책

 

카롤링 왕조의 쇠퇴에 따라 프랑크 제국의 황제는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었고 동 프랑크 왕국(독일 지방)에는 다섯 공령(公領), 즉 프랑코니아(프랑켄), 삭소니아(작센), 투링기아(튀링겐), 스와비아(쉬바벤), 바바리아(바이에른)가 등장하였다. 이 공령의 통치자인 공(公)들은 카롤링 왕조에 충실하였지만, 911년에 카롤링 왕조가 단절된 후에 이들은 프랑코니아와 콘라르드 공(公)을 왕(콘라르드 1세)로 선출하였다. 그러나 콘라르드의 통솔력 부족과 공령간의 대립으로 각 공들은 소공국(小公國)을 세우고 군주가 되었다. 콘라르드 1세는 사망 직전에 삭소니아 공을 그의 후계자로 지명하였다(918). 그가 독일 황제 시대를 연 작센 왕가의 창시자 하인리히 1세(919-936)였다.

 

이제 그와 그의 아들 오토 1세(936-973)는 국가의 통일 사업을 추진하여 주위의 공국들을 통합 정복함으로써 왕권을 확립하였고, 슬라브 족, 데인 인(덴마크인), 마쟈르 족(헝가리 민족)의 침략을 격퇴하였다. 오토 1세는 왕국의 정치 체제를 지방분권화에서 중앙집권화로 전환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래서 처음에는 점령한 공령들 중 프랑코니아는 왕령(王領)으로 정하여 그 자신이 통치하고, 그 밖의 공령들은 자기 가족에게 분배하여 가부장적(家父長的) 집권에 의한 중앙집권 체제를 실행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실패하였다. 953년에 일족 제후(一族諸侯)들이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오토는 반란 제후들을 힘겹게 진압하고 새로운 통치 체제를 계획하였다.

 

오토는 그의 족벌주의 정치 체제의 실패를 뼈아프게 체험하고나서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위해서 교회 지배에 의한 집권 정책으로 전환하였다. 그는 교회의 주교들에게서 지지 세력을 확보함으로써 국가의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교회는 그 재산을 지방 귀족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강력한 중앙집세력을 필요로 하였고, 반면에 오토는  관직 세습과 지방 세력 형성이 불가능한 주교들(독신이므로)은 국가 붕괴나 전복의 위험이  없음을 깨달았다. 여기서 교회와 국가의 상호 이해 관계가 성립되었다. 오토는 교회에 재산을 증여하고 왕의 권리와 특권을 주교에게 부여함으로써 주교의 권한을 강화하였다. 이로써 그는 중세기 봉건 교회의 세속권을 기초하였다. 이 권한은  이후 1803년에 독일 교회가 세속화될 때까지 독일에서 큰 영향을 미쳤다.

 

오토는 국가를 교회의 관할하에 두었다. 그는 교회와 국가는 하나이며, 둘의 이해 관계는 서로 일치되어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관계는 오토와 그 후계 황제들에게 유리한 입장을 제공하였다. 후에 이  제국 교회와 그 지역은 독일 황제들에게 가장 믿음직한 옹호자로서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황제들은 교회를 통해서 제국의 지방을 통치할 수 있었다. 더 나아가 교회와 국가간의 서임권 투쟁에  있어서 이 제국 교회는 황제의 편을 들었다. 교회는 이 새로운 제휴로 생각치  못한 기회를 얻었다. 즉 교회는 일반 사회에서 자유롭게 그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때 독일에서는 종교적 임무를 수행하면서 정치적 수완을 보인 유명한 주교들이 많이 출현하였다. 또 수도원에 있어서는 그리스도교 예술과 문화의 전성기를 이룩하였다(오토 르네쌍스).

 

신성 로마 제국

 

교황 요한 12세는, 로마 귀족들의 지배를 받고 자칭 이딸리아의 왕이라는 이브레아 후(侯)인 베렝가리오의 위협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오토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오토는 961년에 로마로 진군하기 시작하여 파비아에서 이딸리아의 왕권을 쟁취하고 로마시에 개선하였다. 같은 해 2월 2일에 교황은 감사의 뜻으로 오토를 베드로 대성전에 인도하여 황제로 대관하였다.

 

이것이 바로 독일에서 1806년까지 지속된 신성 로마 제국의 기원이 되었다. 이때에 오토는 유명한 문서인 ‘오토의 특허장’ 을 공표하였다. 이에 의하면 오토는 교황청에 이딸리아 왕국의 3/4을 부여하는 대신, 교황 피선자는 축성 예절이 있기 전에 황제에게 충성 선서를 해야 했다. 그리고 황제의 감독관이 파견되어 법 이행을 감시하였다. 이제 교회는 로마 귀족의 지배에서 벗어났지만 독일 황제의 보호 아래에서 제2의 암흑기(962-1046)을 맞이하였다.

 

작센(오토) 왕조와 교회

 

오토 대제가 로마를 떠나자 요한 12세와 로마 인들은 새로운 지배자에게 굴복하였다는 것을 깨닫고 반대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오토는 963년 11월에 다시 로마에 돌아와서 반대파를 진압하고, 교황은 도주하였다. 오토는 종교회의를 소집하여 요한 12세의 교황으로서의 무자격을 선포하고, 로마 인들에게 앞으로 어느 교황도 황제의 동의 없이 선출하지 않겠다는 것을 서약하도록 요구하였다.

 

그리고 황제의 측근에 있는 평신도가 하루 만에 부제와 사제로 서품되었고 동시에 레오 8세로 교황에 축성되었다. 왜냐하면 요한 12세는 개인적으로 과오가 많은 현직자(現職者)였고, 황제가 서임한 레오 8세는 반(反) 교황이었다. 따라서 독일의 신성 로마 제국 초기부터 교황청은 세속권이 부여하는 하나의 독일 주교좌로 간주되기에 이르렀다.

 

오토 대제가 로마를 떠난 후에 요한 12세가 다시 로마에 돌아와 레오 8세를 축출하였다. 그러나 요한 12세는 며칠 후에 사망하였고, 로마 인들은 새 교황으로 베네딕뚜스 5세를 선출하였다. 오토는 격노하여 다시 로마에 와서 그가 선출한 레오 8세를 복권시키고, 서약을 깨뜨렸다는  이유로 로마 인들에게 다른 확약을 강요하였다. 교황 레오 8세의 교령으로 일반 신도가 교황 선출에 참여하는 것을 막았다.

 

레오 8세의 사망(965) 후에, 오토 대제는 가장 세력이 있던 투스쿨룸의 데오필락투스(테오도라 2세의 아들)를 교황(요한 13세)으로 선출함으로써 로마 교회의 지배를 꾀하였다. 그러나 그의 시도는 실패하였다. 새 교황은 소동을 일으키는 로마 귀족들을 엄격하게 처리하려 함으로써 반란이 일어났다. 그래서 교황은 성 안젤로 성에 감금되었다. 오토는 다시 로마에  와서 반란을 진압시키고 6년 동안 로마에 머물렀다. 967년 성탄 축일 미사에서 오토 대제는 13세의 아들 오토 2세를 공동 황제로 대관하였고, 973년 5월 7일에 사망하였다.

 

오토 대제가 사망한 후에 로마 인들에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독일 황제의 압정(壓政)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래서 로마 귀족들은 크레쉔티를 그들의 우두머리로 삼았다. 974년에 반란이 일어나 베네딕뚜스 6세(973-974)는 교살되었고 보니파치오 프랑코가 보니파치우스 7세(974)로 교황이 되었다. 그러나 오토 2세(973-983)는  반란을 진압시키고, 교황은 비잔티움으로  도주하였다.

 

대신에 수트리의 주교가 황제의 동의를 받아 베네딕뚜스 7세(974-983)라는 이름으로 교황에 선출되었다. 이 교황이 사망한 후에는 황제는 그의 서기를 교황 요한 14세(983-984)로 서임하였다. 그러나 오토 2세의 사망 후에 로마에서 다시 크레쉔티가 득세하여 축출되었던 보니파치우스 7세가 돌아왔고, 요한 14세는 살해되었다. 그러나 크레쉔티와 보니파치우스 7세도 곧 사망하였다.

 

새 황제 오토 3세(983-1002)는 옛 로마 제국의 재건을 꿈꾸었다. 그리고 그는 독일의 주교들을 이딸리아의 교구에 임명하여 독일과 동등한 통치기구로 마련함으로써 이딸리아에서 그의 황제권을 행사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오토 3세는 황실 성당의 성직자인 브루노를 첫 독일인 교황 그레고리우스 5세(996-999)로 서임하였다. 그레고리우스 5세의 사망 후에 황제는, 그의 스승이었던 라벤나의 대주교 게르베르를 교황으로 서임하였다.

 

그가  첫 프랑스 인 교황인 실베스테르 2세(999-1003)였다. 그는 실추된 교황권 회복에 노력하였고 교회 개혁에 힘썼다. 오토 3세의 사망 후에  바이에른의 하인리히 공이 계승하였다. 그가 성왕(聖王) 하인리히 2세(1002-1024)였다. 그는 교회의 적극적인 옹호자였다. 그는 교회의 이익을 위해서만 이딸리아 문제에 개입하였다. 1014년 2월 14일에 하인리히 2세는 그가 선출한 교황 베네딕뚜스 8세(1012-1024)에 의해 황제로 대관되었고 곧 교회 개혁에  착수하였다. 그는 덕망있는 성직자를 주교로 임명할 것을 강조하였고, 부유한 교회의 재산을 가난한 교회에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자녀가 없어 작센(오토) 왕조는 그에게서 단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