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가톨릭 관련>/◆ 가톨릭교회사

중세 교회(Ⅴ) - 교회 개혁 운동

by 파스칼바이런 2012. 8. 8.

 

중세 교회(Ⅴ) - 교회 개혁 운동

 

 

중세 초기의 서구 사회에 있어서 국가와 교회가 평형을 유지한 이원론적 상황은, 교회의 암흑기에 들어서면서 국가와 황제가 일방적으로 유리한 입장에 서게 되어 두 세력 사이의 마찰이 불가피해졌다. 이 투쟁은 교회의 쇄신 운동에서 시작되었는데 이는 우선 순수한 수도원 개혁으로 나타났다. 이 개혁 운동은 점차 신앙과 윤리 생활에 확대되었을 뿐  아니라 정치, 종교, 문화 등 사회 전반에 대한 새로운 자세를 지향함으로써 그 영향은 수도원 밖으로 확산되었다. 따라서 이 운동은 국가와 교회 간의 투쟁을 야기시킨 것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여러가지 형태로 발전하여 모든 정신 분야에 파급되었다.

 

클루니 수도 단체의 개혁 운동

 

중세기의 수도원 개혁 운동은 클루니 수도회에서 시작되었다. 이 수도회는 아퀴텐느의 윌리엄이 909년에 창설하였다. 그는 9세기 교회가 쇠퇴한 주요 원인 중의 하나가 수도원의 독립성을 교회 행정가(주교)와 국가 관리에게 박탈당한 데에 있다고 간파하고 클루니 수도회에 내외적으로 자율권을 보장해주었다. 즉 자유 선거에 의한 수도원장 선출과 교구 주교로부터의 치외법권이 창립헌장과 교황의 특권에 의해 보장되었다.

 

그리고 베네딕또 수도회의 규칙의 엄수, 원장에 대한 절대적 순종, 엄격한 극기생활, 전례에 대한 특별한 관심은 이 수도회의 특징적인 정신이었다. 클루니 수도회는 위대한 원장들의 영도 아래 교회 안에서 가장 강력한 종교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그런데 이제까지 수도원은 세속에 대해 초연한 자세를 취해왔었다. 그러나 수도원도 그리스도교에 속해있었고 그리스도교는 세속화의 위험 속에 처하여 있었다. 서구의 수도원은 신비주의적인 동방 수도회와는 달리 항상 그리스도교 전체에 대해 책임을 느끼고 있었다.

 

이러한 서방 수도원의 자세는 클루니 수도회의 개혁 운동이 단순히 수도원 운동에 그치지 않고  유럽의 역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하였다. 10~12세기에 펼쳐진 클루니 수도회 개혁 운동의 빛나는 활동과 영향은 이 수도회의 종교적 활력과 내적 견고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즉 수도생활은 외부 세력으로부터 흔들리지 않으면서 수도원의 담 속에서 힘있게 성장, 발전하여왔다. 클루니 수사들은 조용한 묵상 속에서 기도하면서 동시에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는 클루니 수도회가 이기주의에서 벗어나게 하였다. 이 수도회의 힘은 세속 거부와 현실 도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영신적 임무를 수행하는 데에서 발견되었다. 클루니 수사들은 열렬한 개혁 정신을 갖고 있었을 뿐 아니라 세속에 대해  관용과 수용의 자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들은 학문을 연구하였고, 정치적 관심을 갖고 황제들과  접촉하면서 친교를 맺었다.

 

클루니 수도회의 제2대 원장인 오도(927-942)는 개혁 운동을 확대시켰다. 많은 수도원들이 클루니 수도회에 합병하거나 이 수도회 규칙으로 재정비하였다. 이에 따라 클루니 수도 단체가 결성, 발전하여 모원(母院)인 클루니 수도원과 밀접한 유대관계를  갖고 그 지시를 받았다. 이 수도 단체는 12세기에 이르러 3천여 개의 수도원을 갖게 되었다. 클루니 수도회의 수도원과 교회 개혁 운동은 심화(深化)하였고 민중에게 종교의 중요성,  교회의 독립권, 교황의 권위를 각성시켰다. 따라서 이 운동은 후 시대에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1073-1085)가 추진한 그레고리우스 개혁의 길을 열어주었다.

 

그레고리우스 개혁

 

그레고리우스 개혁은 그 정치적 성향으로 인해서 클루니 수도 단체의 개혁 운동과는 다르다. 물론 두 운동은 모두 ‘자유의 교회’ 라는 개념에서 시작하였다. 그러나 클루니 수도회의 개혁은 이 자유를 세속 군주와 주교들의 외부 압력과 침해에서의 해방으로 제한하여 생각하였고, 반면에 그레고리우스 개혁은 왕이나 귀족들을 통해 또는 성직매매(聖職賣買)의 방법으로 주교와 수도원장이 임명되던 체제를 공격하였다. 이 교회의 정치적  개혁은 종교의 독립을 옹호하기 위해서 교회의 성직자 자유 선출권의 회복과 그 권한의 행사를 요구하였다. 결과적으로  교권(敎權)과 정치 세력의 충돌이 일어나게 되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본래의 이름이 힐데브란트로서 그레고리우스 6세(1045-1046)의 자문위원으로 임명되었고, 교회의 암흑기 말에 교황과 함께 독일의 쾰른으로 축출되었다(1046).

 

그레고리우스 6세의 사망(1047) 후에 클루니 수도회에 입회하여 엄격한 성직생활을 서원하였다. 그러나 새로 선출된 교황 레오 9세(1049-1054)의 요청에 의해 로마로 돌아와서(1049) 교황령의 관리자가 되었다.

힐데브란트는 역대 교황들의 교회 개혁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는 1059년에 로마 교회의 대부제(大副祭)로 임명되었다. 특히 교황청의 개혁파인 훔베르토 추기경 사망(1061) 후에는 개혁의 주도 세력이 되었다. 그의 개혁의  중요한 과제는 성직매매와 평신도의 성직 서임권에 투쟁하는 것이었다. 서임권 문제에 있어서는 힐데브란트는, 국왕을 교회에 복종해야 하는 평신도로 보았고, 인간에게 있어서 영혼이 육신 위에 위치하듯이 그리스도교 제국에 있어서 교회가 국가에 우선한다고 주장하였다.

 

성직 서임권 투쟁 ― 카놋사 사건

 

힐데브란트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로 선출된 후에 교황의 수위권을 선언하면서(Dictatus Papae, 1075) 교황만이 주교를 임명하고 해임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 주장은 이제까지 주교를 임명하던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에 대한 도전이었고 독일의 제국 교회의 붕괴를 의미하였다. 신성 로마 제국이 황제 하인리히 4세(1056-1106)가 황제는 교회의 수위권을 소유하고 있다는 종래의 사상에 의해 밀라노의 주교 선출에 간섭한 사실에 대해서, 그레고리우스 7세는 렌텐 종교회의(1075)에서 평신도의 성직 서임에 대한 금지령을 선포하고 하인리히 4세의 주교 임명권을 박탈하였다. 여기서 황제는 교황의 금령을 무시하고 1076년 1월에 보름스 국회를 개최하여 제국의 주교들을 충동하여 그레고리우스 7세의 개혁에 반대하며 교황의 해임을 선언하였다.

 

교황은 그 대응책으로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하고 그 신하들이 국황에 대한 충성 선언을 해제시켰다. 이에 제국의 신하들은 같은 해 10월에 트리부르에서 집회를 갖고, 황제에게 일년안에 교황에게 파문의 취소를 받아내지 못하면 새 황제를 선출하겠다는 최후 통첩을 보냈다. 하인리히 4세는 자기의 입장이 불리함을 깨닫고 그해 말 추운 겨울에, 그의 아내와 자녀들을 데리고 카놋사로 속죄 여행을 떠났다.

 

황제는 카놋사에 도착한 후에 3일 동안(1077년 1월 26일~28일) 속죄의 옷을 입고 그레고리우스 7세가 머물고 있던 변경백(邊境伯)의 저택 문 앞에서 교황을 기다렸다. 하인리히 4세의 대부(代父)이며 클루니 수도회의 원장인 휴그와 집주인 마틸다 부인의 중재로 마침내 교황의 사면을 받았다. 그러나 이 사건은 독일의 황제권에 있어서 결코 회복될 수 없는 치명적 타격이었고, 이로써 서구사회의 지도권은 황제에게서 교황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그레고리우스 7세의 사망 후에도 국가와 교회 간의 기본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지 않아 사소한 투쟁이 계속되었다. 따라서 두 세력은 상호 관계 개선의 해결점을 모색하게 되었다. 교황 파스칼 2세(1099-1118)와 황제 하인리히 5세(1106-1125)는 1111년 2월에 수트리에서 종교협약을 맺었다. 이 협약에 의해 독일의 제국 교회는 황제로부터 받은 영토와 특권을 반납하고 황제는 성직 서임권의 행사를 포기하였다.

 

그러나 독일의 제후들과 주교들은 이 종교협약에 반대하였다. 왜냐하면 이는 그들에게서 실권을 박탈하는 것을 의미하였기 때문이다. 이 서임권 문제는 보름스 종교협약(1122)에서 해결되었다. 여기서 두 가지 서임권이  규정되었다. 황제는 세속적 서임권을 소유하고 교황은 영신적 서임권을 행사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질적 해결은 완수되지 못하였다. 따라서 국가와 교회 사이의 투쟁은 그 후에도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