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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교회(Ⅵ) - 성직자와 수도자의 각성

by 파스칼바이런 2012. 8. 8.

 

중세 교회(Ⅵ) - 성직자와 수도자의 각성

 

 

수도회의 개혁 활동

 

수도회, 특히 클루니 수도단체에서 시작된 교회 개혁운동은 서구 전체에 종교심을 앙양(昻揚)시켰다. 이제 새로운 형태의 수도원 생활제도와 성직자나 평신도의 영성생활에 대한 염원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신심 깊은 모든 계층의 신도들은 수도생활로 전향하여 어떤 이들은 베네딕또 수도회에 입회하거나 광야에서 은수자의 생활을 하였고, 어떤 이들은 방랑의 고행자로서 또는 설교자로서 활동하였다. 이러한 영성생활을 이끈 사상은 가난과 자발적 자아 포기의 사도적 생활이었다.

 

수도자들은 교회 쇄신과 수도원의 혁신을 열렬하게  주창하고 실천하였다. 그 대표적 인물로서 이딸리아에서 명성을 떨친 성(聖) 로무알두스(951-1027)를 들 수 있다. 그는 자유 분방하게 젊은 시절을 보내다가 927년경에 부친의 살인죄를 속죄하기 위해 고향인 라벤나  근처에 있던 성(聖) 아폴리나레 수도원에 들어갔다가 좀더 엄격한 수도생활을 하기 위해서 베네치아 근교에 있는 마지누스 은수자회에 입회하였다. 그 후에 피레네 산맥에 위치한 쿡싸의  클루니 개혁 수도원에서 지내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늪지대의 외딴 곳에서  기도에 열중하였다. 그러나 로무알두스는 때때로 민중 앞에 나타나서 속죄의 설교를 하였다. 그의 경건한 종교심과 심금을 울리는 설교는 대중에게 감명을 주어 많은 젊은이들이 그의 주위에 모여들어 그들을 위해서 여러 수도원들을 창설하였다.

 

이 수도원들은 은수생활과 단체생활이 혼합된 공동체를 이루고 있어, 수도자들은 처음에 베네딕또 수도 규칙을 따라 단체생활을 하다가 후에 수도원 주위에 있는 암자에서 은수자의 생활을 하였다. 이 수도원들 중에서 까말돌리 수도원은 열렬한 교회 개혁자인 성(聖)  베드루스 다미아누스(1007-1072)와 같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그리고 알프스 북부 지역에서는 아브리쎌의 로베르투스와 티에체빌레의 비탈리스는 순회 선교사로서 독일과 프랑스 지역에서 대중에게  속죄의 설교를 하면서 사도적 생활을 실천하였다. 또한 쾰른의 성(聖)  브루노(1032-1101)는 렝스의 주교직을 사임하고 6명의 동료와 함께 그레노블 근처의 험한 산악지역에 카르투시아 수도회를 창설하였다.

 

이 수도회는 관상(觀想) 수도회로서 회원은 많지 않았지만 기도와 묵상을 통해 내적 힘과 참된 종교심을 간직하면서 종교개혁 시대까지 그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또한 수도회의 교회 개혁 활동뿐 아니라 베네딕또회 소속 수도원 자체에 대한 개혁의 요구가 일어났다. 씨토(치스테르치안) 수도회는 바로 개혁 베네딕또 수도회였다. 이 수도회는 몰레슴의 로베르투스(1111 사망)가 20명의 동료와 함께 씨토의 광야에서 창설하였다.

 

씨토 수도회는 사도적 청빈, 기도를 위한 침묵, 규칙적인 엄격한 노동을 강조하고 부(富)를 가져오는 종래 수도원의 봉건적 구조 질서를 거부하였다. 이러한 새로운 수도회의 이상(理想)을 실현한 이가 부르군디 지방의 귀족 출신인 클레르보의 성(聖) 베르나르두스(1090-1153)였다. 그는 1112년에 30명의 동료들을 이끌고 씨토 수도원에 입원(入院)하여 1115년에는 클레르보에 새로운 수도 공동체를 세웠고, 이것이 크게 발전하자 12세기 말경에는 씨토 여자 수도원이 설립되었고, 1500년경에는 700여 개의 수사원(修士院)과 900여 개의 수녀원으로 증가되었다.

 

이 수도원들은 지역사회의 개척과 선교활동에 크게 공헌하였다. 그러나 베르나르두스의 업적은 영신적인 면에 있었다. 그의 목표는 교회의 종교적부흥과 베네딕또 수도자들의 성화(聖化)였다. 그는 많은 이들로부터 조언과 협력을 요청받았고 교황, 황제, 제후들과 계속적인 접촉을 하였다. 그는 신전기사 수도회의 규칙서를 작성해주었고, 교황청 분규(1130)에 있어 결정적 역할을 하였으며, 1147년의 십자군 창설은 대부분 그의 설득력있는 설교의 결과였다. 베르나르두스는 당시대에 위대한 개혁가, 신학자, 종교인으로 불리었으나 우리는 그를 무엇보다도 성인, 수도자, 영신 지도자로 기억하여야 한다.

 

재속 성직자의 생활 쇄신

 

재속 성직자들도 개혁운동에서 제외되지는 않았다. 11-12세기에 주교좌 대성당과 합동교회의 참사회원(參事會員)의 쇄신운동이 강하게 일어났다. 이 운동의 목적은 모든 재속 수도 성직자들에게 그리스도교적 사목정신을 각성시키는 것이었다. 자립  본당이 별로 없었고 대부분의 성직자들이 주교좌 대성당이나 합동교회를 중심으로 모여 생활하면서 성직을 수행하던 당시에, 이 참사회원들의 규율을 제정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이미 히포의 주교인 성(聖) 아우구스티노(354-430)는 자기와 함께 살고 있던 성직자들을 위해 일정한 규율을 만들어 주었다.

 

이 참사회원들의 생활은 사도들을 본받아 영위되는 초대교회의 공동체 생활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공동 생활의 질서와 규칙을 준수하고 주교에게 순종할 의무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수도자와는 달리 개인 재산을 소유할 수도 있었고 수도 서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성직자들은 좀 더 자유를 누릴 수 있었기 때문에 타락할 위험에 빠질 수 있었고 따라서 항상 생활 제도의 쇄신이 필요하였다.

 

그래서 이미 성(聖) 보니파시우스(680-754)와 샤를르 대제(764-814)가 참사회 개혁을 시작하여, 768년에 메쯔 주교인 크로데강은 새로운 참사회칙을 만들었고, 805년에 제정된 참사회칙은 프랑크 제국의 모든 성직자들이 수도자처럼, 또는 공동체 속에서 생활할 것을 요구하였으며 816년에 경건왕 루이 1세는 참사회 법규를 반포하였으나 카롤링 왕가의 붕괴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유감스럽게도 9-10세기에 이르러 주교좌 대성당과 합동교회의 재산이 각 성직자의 성직록으로 분산되고, 공동체의 생활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레고리우스 개혁은 과거의 성직자 생활  제도를 회복시켰다. 1059년에 로마에서 열린 종교회의에서 힐데브란트(후의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모든 주교좌 대성당과 합동교회의 성직자와 수도자들에게 그들이 사유 재산을 포기하고 엄격한 규율에 따라 생활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 요구에 따른 성직자는 ‘수도참사회원’ 이라고 불리었고 전과 같이 사유 재산을 소유하고 생활한 성직자들은 ‘재속 참사회원’ 이라고 일컬어졌다. 이 참사회의 개혁 의도는 모든 참사회원들이 아우구스띠노 규율을 받아들일 것을 권장하는 것이었다.

 

이후 4500여 개의 수도 참사회 단체가 있었고 이들은 그레고리우스 개혁이 핵심적인 그룹이었다. 이 단체의 목적은 성직자들을 사도적 이상(理想)으로 좀더 가깝게 인도하는 것이었다. 그레고리우스 개혁은 재속 성직자들의 성화를 요구하고 성사적 사제직과 교회에서의 그 위치를 새롭게 강조함으로써 재속 성직자의 내적 갱신을 전제로 하였다. 이 시대의  새로운 성직자상은 사도적 청빈,  독신생활, 교회 지도자에 대한 복종, 신학연구, 교계제도에 대한 의식, 개인 생활의 성화 등이다.

 

중세기에 가장 큰 영향력을 갖고 있었던 참사회 단체는 참사회 사제인 크쌍텐의 노르베르투스(1082-1134)가 1120년에 프랑스의 라옹 근처에 있는 쁘레몽트레에서 창설한 ‘쁘레몽스트라텐시아 참사회’ 였다. 노르베르투스는 귀족 출신의 청년으로서 황제 하인리히 5세의 국정을 돕다가 1113년에 캄브레 교구의 주교로 서임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베네딕또 개혁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 수도원에서 만족한 생활을 찾지 못하고 어떤 은수자를 방문하여, 그로부터 성직자의 개혁이 절실히 요구된다는 사실을 듣고 자기 자신을 성직자의 개혁에 헌신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몇 년 동안 순례 수도자로서 속죄의 설교를 하면서 프랑스를 순회하였다. 이때에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가난을 강조함으로써 일반 민중 속에 만연되고 있던 이단을 성공적으로 쳐 이길 수 있다고 믿었다.

 

노르베르투스가 설장한 이 단체의 특수한 임무는 성직자의 성화, 사목 활동, 설교였다. 1156년에 이르러 이 참사회 단체는 100여 개의 공동체를 갖게 되었다. 1125년에 그는 막데부르그의 대주교가 된 후, 자기 참사회 성직자들을 그의 교구로 불러들여 활동하게 했다. 이 재속 성직자들은 후에 씨토 수도회원들과 함께 엘베강 동부 지역의 선교와 문화발전에 크게 공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