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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가톨릭교회사

중세 교회(Ⅶ) - 평신도의 종교심 앙양

by 파스칼바이런 2012. 8. 8.

 

중세 교회(Ⅶ) - 평신도의 종교심 앙양

 

 

서구사회의 새로운 그리스도교 정신의 자각은 평신도의 신심 앙양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는 평신도의 십자군 운동과 청빈 운동으로 나타났다.

 

십자군 운동

 

이슬람교도가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성지순례에 불편을 느끼고 있던 중, 동로마제국 황제 알렉시오 1세(1081-1118)가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될 위기에 서방교회의 군원을 청하였다. 이에 교황 우르바노 2세(1088-1099)는 1095년 두 차례의 종교회의에서 서방 그리스도교 국가들에게 이를 호소하였다. 이때 동방교회를 돕기 위한 염원과 이교도로부터 성지를 탈환하려는 열망은 국가란 장벽을 넘어 서구세계를 단결시켰다. 이 십자군 운동은 대중의 종교적 운동으로 시작되어 몇 세기 동안 8차례(또는 6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그러나 중세 후기에 서구의 단일성이 와해되어 그 위력을 상실하였다.

 

십자군 운동은 그리스도교적인 목적을 위해서 일어났지만 기사들의 모험심, 명예욕 등의 세속적 동기도 있었다. 그리고 기사들의 활력은 비그리스도교적인 광포로 나타나 십자군 운동을 중세의 한 가지 잔인한 현상으로 변질시켰다. 십자군 운동의 결과로 기사 수도회, 즉 성 요한 기사 수도회, 신전 기사회, 뉴우튼 기사회가 창설되었다. 이 수도회들은 청빈, 순명, 정결의 일반 수도서원 외에 병든 순례자의 간호와 투쟁을 통한 이슬람교도로부터의 성지회복을 선서하였다. 아울러 이 운동은 비잔티움과 이슬람 문화의 접촉으로 학문(특히 스콜라 철학과 신학)과 예술의 발달에 영향을 끼쳤으며 이교도의 세력 확장을 저지시켰고 그리스도교와 교황의 권위를 크게 떨쳤다.

 

청빈 운동

 

십자군 운동에서 돌아온 군인들은 예루살렘 성지에서 본 가난한 그리스도의 생생한 모습을 마음 속에 그리면서 그리스도를 본받고자 하는 염원을 갖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평신도들은 그리스도의 생애가 담겨있는 복음성서에 관심을 갖고 성서 모임을 구성하여 성서를 읽고 해설하면서 그리스도의 생활을 배우려 하였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글자 그대로 실천하기를 갈망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청빈 생활을 당시의 교회 상황과 비교하게 되었을 때 부유한 교회의 봉건체제에 대한 반발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동시에 12세기에 성장한 도시들은 더 이상 교회 지도자(주교)의 통치 아래에 있지 않았고 이러한 도시에서 일반 대중의 세력이 확대되었다. 교회의 평신도들도 자각하여 교회와 종교 문제를 성서에 입각하여 해결하려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시도가 교회 안에서 그 내부의 쇄신을 위해 일어났다면 이는 평신도의 교회 복음화 운동으로 나타날 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위험도 도사리고 있었다. 이러한 평신도의 신심 운동이 비그리스도교적인 사상을 내포하고 있는 이단 운동이라는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청빈의 복음화 운동 :   12세기에 ‘베귀’(말더듬이)라는 평신도 신심단체가 네덜란드에서 태어났다. 이 공동체는 수도서원은 하지 않으나 수도자와  같은 엄격한 고행의 공동생활 속에서 사유재산을 포기하고 성서 봉독, 기도와 묵상, 노동, 병자 간호 등의 자선  활동에 종사하였다. 직공(織工), 염색공 출신인 이들에게는 공동 규칙이나 모원(母院), 총원장이 없었다. 이딸리아의 밀라노 지역에서도 직공들이 ‘후밀리아띠’(겸손한 자)라는 신심단체를 조직하여 초창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본받아 사유재산을 거부하고 공동 소유하였다.

 

그러나 점차로 이 신심 운동이 과격한 경향을 띠게 되어 교황 인노첸스 3세(1198-1216)때에 교회가 지도 감독하였다. 이제 이 공동체의 회원들 중에서 어떤 이들은 베네딕또 규칙을 지키는 공동 수도생활을 하였고, 어떤 이들은 속세에 남아 기도를 통하여 이 수도원과 제휴하면서 수도원의 신심행사에 참여하였다. 이들이 바로 수도회의 재속 제3회의 기원이 되었다.

 

이단운동 :   12세기 초에 네덜란드의 열광적 개혁가인 탄켈름은 성직자의 사유재산 소유와 세속적 생활을 힐책하였다. 그는 후에 당시 평신도에게 금지되었던 교리 문제 즉 교계제도, 성사적 교회, 성체성사 등에 반대하여 이단으로 단죄되었다. 1115년에 일반 대중에게 살해되었으나 그 이단은 그의 죽음과 함께 사라지지 않았고 12세기 중엽에도 잔존하였다. 이딸리아의 급진적 사상을 지닌 속죄 설교가 아르놀드도 재산이 없는 교회를 요구하면서 교황청을 맹렬히 비난하였다. 그러나 그는 정치 분쟁 속에 휘말려 1155년에 황제 프리드리히 1세(1152-1190)에 의해 처형되었다. 아르놀드 추종자들은 후에 왈도파의 카타리파에 가담하였다.

 

프랑스 리옹의 호상인 베드로 왈도는 1173-1176년에 마태오 복음(19,21-26)에서 청빈의 이상을 발견하여 자기 재산을 포기하고 엄격한 사도적 청빈과 속죄의 설교에 헌신하였다. 그와 그의 추종자들은 ‘그리스도의 가난한 이들’ 또는 ‘리옹의 가난한 사람들’ 이라고 자칭하였다. 이들의 의도는 매우 좋았으나 교회에 대한 비난 설교가 너무 지나쳤을 뿐 아니라  신앙의 위험까지도 내포하고 있었다.

 

따라서 리옹의 주교들은 이들을 추방하였고 1184년 교황 루치오 3세(1181-1185)는 왈도의 속죄 설교가로서의 활동을 금지하였다. 그러나 즉시 그는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사명을 받았다면서 모든 것을 버리고 가난한 생활을 하는 이만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설교할 자격이 있다고 주장하여 교회로부터 파문을 당했다.

 

12세기에 마케도니아로부터 이원론적 이단인 ‘카타리’(순수파)의 사상이 여행 상인과 십자군의 군인들에 의해 서구에 도입되었다. 이 이단자들은 세력을 확장하면서 1167년에 프랑스에서는 종교회의까지 개최하여 교회를 죄악이 되는 재산을 소유한 부유한 가톨릭 교회와 재산의 소유를 포기한 ‘카타리’교회로 구분하였다. 고행과 극기의 생활을 하는 이들은 이상적 그리스도인이며 가톨릭교회는 사탄의 집회이고 성직자들은 위선적 죄인들이며 성사는 악마의 장난이라고 비난하였다. 또한 국가에 반대하여 황제는 사탄의 우두머리이며 제후들은 사탄의 협조자라고 욕하였다. 남부 프랑스, 특히 알비 지방의 '카타리'파는 프랑스 왕에 대적한 제후들과 제휴하여 종교적이며 정치적인 알비 전쟁(1209-1229)을 일으켰다.

 

'카타리' 이단 운동은 서구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정치, 사회, 종교의 기반을 공격하였기 때문에 국가와 교회가 함께 행동하였다. 1183년 교황 루치오 3세와 황제 프리드리히 1세는 교회가 파문한 이단은 즉시 제국이 금지, 색출하여 국가 법정에 기소하는 종교재판 설정에 합의하였다. 이는 서구세계가 그 자체를 정치-종교적 한 단위로 보았기 때문이다. 교회의 '알비'파를 개종시키려는 시도가 실패하고 1208년에 교황사절이 살해된 후에 교황 인노첸스 3세는 십자군 운동을 일으켜 비그리스도교적인 잔인한 살육 전쟁이 20년 간 계속되었다.

 

종교재판의 절차는 교황 인노첸스 3세 시대에 완성되었다. 국가는 이단자가 고발될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직책상 색출하여 이단의 용의자에 대해서도 공소를 제기하기 위해 종교 심문관을 임명하였고 1252년에는 이단자가 고백하도록 종교재판관들에게 고문까지 허용되었다. 이는 교회사에 있어서 비극적인 장면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고려할 점은 당시의 신학자들이 신앙 문제에 있어서 폭력 사용을 배격하였지만 대중은 종교의 이단자를 정치 반란자로 간주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불행한 결과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반면 아씨시의 프란치스코(1181/2-1226)와 도미니코(1170-1221)는 복음전파와 이단 근절의 새로운 방법을 보여주었다. 이 두 성인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청빈의 이상대로 생활하면서 동시에 부자를 무조건 힐책하거나 재산 그 자체를 악이라고 부르지 않음으로써 바오로 사도의 말씀(1고린 6,10)대로 재산을 소유하고 포기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이들은 사도적 청빈생활의 실천과 '카타리'파의 개종을 위해 노력하는 프란치스꼬회와 도미니꼬회라는 탁발 수도회를 각각 창설하였다. 중세의 탁발 수도회는 이외에도 성 아우구스티노 은수자회와 까르멜회가 있었다.  이 네 수도회들은 중세의 훌륭한 설교가와 유명한 신학자들을 배출하였다. 또한 이들은 여자 수도회와 재속 제3회도 설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