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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가톨릭교회사

종교 개혁시대(Ⅰ) - 문제의 초점

by 파스칼바이런 2012. 8. 8.

 

종교 개혁시대(Ⅰ) - 문제의 초점

 

종교개혁 ― 교회쇄신

 

오늘날 신학 연구에 있어서 교회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신인양성(神人兩性)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해진다. 따라서 교회는 신적 존재라는 점에서는 오류가 있을 수 없고 거룩하지만, 동시에 인간적 실재이기 때문에 교회 안에 과실, 또는 죄악까지도 있을 수 있다. 이는 인간적 공과(功過)를 갖고 행동하는 교회의 구성원이 인간적 동기와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역사적 과오를 범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항상 개혁을 필요로 하며 결코 만족해서는 안 된다.

 

교회가 이제 더 이상 그 전형인 그리스도와 차이를 느끼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잘못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의 흐름 속에서 교회가 그 본래의 모습을 상실하였을 때는 개혁의 외침과 쇄신운동이 일어났다. 무엇보다도 교회의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교회혁신운동은 16세기에 일어난 종교개혁이다. 이 사건 자체는 교회쇄신에 대한 열망의 표현이다. 그러나 이는 또한 신앙의 기본을 파괴하였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 교계(敎界)를 여러 갈래의 분파로 분열시켰다.

 

그런데 이 종교개혁은 두 가지로 구별되고 있다. 즉 교회 밖에서의 개혁과 교회 안에서의 개혁이다. 교회 밖에서의 개혁은 일반적으로 단순히 ‘종교개혁’이라고 불리는, 다시 말해서 개신교의 발단이 되는‘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으로서, 가톨릭적 의미에서는 ‘교회에 대한 반란’이라고도 불린다. 여기에는 몇 가지 형태가 구별된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루터의 종교개혁, 즈윙글리의 종교개혁, 재세례파(再洗禮派)의 급진적 종교개혁, 칼빈의 종교개혁, 영국의 종교개혁 등이 있다. 교회 안에서의 개혁은 가톨릭 종교개혁으로, ‘가톨릭 교회쇄신’ 또는 ‘반(反)종교개혁’이라 일컬어지고 있다.

 

반종교개혁이란 표현은 개신교에서 나온 것으로 이 교회개혁운동에 대한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해석이다.

왜냐하면 이 용어는 교회 안에서의 개혁을 단지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에 반발해서 일어난 방어적이며 부정적 운동으로 규정짓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과 관계없이 그 이전에 가톨릭내에서 일어나 성장한 교회개혁의 움직임이 있었다는 사실과 이러한 개혁운동의 결과가 트리덴티노 공의회(1545-1563)의 결정이라는 사실로 보아 최근의 학자들은 긍정적 의미의 가톨릭 교회쇄신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을 제의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가톨릭 교회쇄신이 방어적 운동, 따라서 반종교개혁이라는 주장도 전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이 가톨릭의 교회쇄신을 촉진하였고 그 방향 설정에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을 거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가톨릭 교회쇄신의 과정 중에 이단자 색출, 종교재판, 처형 등 부정적인 모습도 있었다는 점에서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에 반동으로서의 반종교개혁이란 용어도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

 

종교개혁의 원인

 

종교개혁의 원인에 대한 문제는 오늘날까지도 쟁점으로 남아있다. 많은 교회사가들이 종교개혁이 발생할 수 있었던 역사적 사실들을 조사하였지만 아직 일치된 견해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과거의 가톨릭 학자들은 종교개혁의 원인을 정치적 상황과 윤리적 사실로 설명했다. 정치적 상황으로서는 왕과 지방 관리(제후)들의 권위적 태도와 물질적 욕심을 들고 있다.

 

윤리적 사실로는 자격을 갖추지 못한 고위성직자들이 탐욕적으로 정치권력을 얻으려고 한 사실을 들고 있다. 개신교 학자들은 교황 및 성청 성직자들의 부적합한 생활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가톨릭과 개신교의 역사가들이 모두 사회적 영향을 인정하지만 종교적 원인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종교개혁에 대한 가톨릭의 증언

 

과거에 수많은 가톨릭 지도자들은 교회의 악폐가 개신교의 발단과 성장 및 발전에 이바지하였다고 공공연하게 인정하였다. 그 한 사례는 교황 아드리아노 6세(1522-1523)가 독일 신성로마제국의 뉴른베르그 국회(1522-1523)에 파견한 교황사절 프란치스꼬 치에레가띠 추기경에게 보낸 훈령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 훈령은 1523년 1월 3일에 국회에서 공개되었다. 교황은 루터 이단으로 인하여 교회가 받는 어려움에 대한 책임은 성직자, 특히 교황청과 그 성직자들에게 있다고 솔직히 시인하였다.

 

또한 교회가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은 하느님이 구원의 손길을 뻗치지 않으셔서가 아니라 성직자들의 죄악이 하느님의 모습을 가리는 장막이 되어 그분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리고 수 년 동안에 교회 안에는 가증할 만한 폐습이 많이 있었으며 이러한 병폐들은 교황을 포함하여 성직자들에게서 스며나왔기 때문에 성직자 각자는 자신의 잘못을 자각하고 하느님의 노여움을 재판을 받기 전에 반성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마지막으로 교황은 교회의 분쟁이라는 불행이 원인이 된 교황청을 개혁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리고 가톨릭이 입장에서 볼 때에 예외이기는 하지만, 고위층 성직자들 중에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을 단지 부정적 사건, 즉 반가톨릭 운동으로 생각치 않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프로테스탄티즘의 긍정적 의미를 강조하고 종교개혁은 가톨릭 교회에 대한 적의에서 가 아니라 참다운 종교적 열망에 기인하였다고 서슴없이 선언하였다. 그 한 예로, 지성구주회(至聖求主會)의 알프스 북부 지방 총대리이며 오늘날 비엔나의 사도라고 불리는 성 클레멘스 마리아 호프바우어(1751-1820)를 들 수 있다.

 

그는 1816년 비엔나에서 출판업자인 프리드리히 페르테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독일 민족이 교회에서 이탈한 것은 그들이 종교적 백성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은 이단자들이나 철학자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마음의 종교를 절실하게 추구하던 열심한 사람들에 의해서 뿌리를 내리고 전파되었읍니다. 저는 이 사실을 로마에 있는 교황과 추기경에게 말씀드렸지만 그분들은 본인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고 오히려 종교개혁의 원인은 가톨릭교회에 대한 증오였다고 고집하여 주장하였습니다."

 

사실, 루터는 처음부터 새로운 교회를 세우겠다고 생각치 않았고 한 수사신부로서 비록 실패는 하였지만, 교회 안에서 교회 개혁에 대한 가톨릭적 요구를 내세웠었다. 최근에 이르러 바오로 6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제2회기 개막식(1963년 9월 29일)에서 참관인으로 참석한 갈라진 다른 그리스도교인들을 따뜻하게 맞이하면서 그리스도 교계의 분열에 대한 책임을 가톨릭도 함께 져야 한다고 고백하였다.

 

"우리에게 교계 분열에 대한 잘못이 있다면 우리 가톨릭 교회는 하느님께 뿐 아니라 우리에게서 상처를 받았다고 느끼는 갈라진 형제들에게도 용서를 청합니다. 우리편에서 가톨릭 교회가 받은 피해는 즐거운 마음으로 용서하고 오랜 기간의 분쟁을 통해서 받은 고통을 잊겠읍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이러한 우리의 선언을 받아주시고 우리 모두가 참다운 형제적 평화를 찾도록 해주셨으면 합니다."

 

교황은 1963년 10월 17일에 비가톨릭 그리스도교 지도자들과 만난 자리에서도 다시 한 번 상호간의 용서를 청하는 말을 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일치운동에 관한 교령」도 갈라진 교회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이 단일 유일한 하느님의 교회 안에서 초기부터 분열이 생겼던 것이며, 사도 바오로는 그것을 단죄할 것으로 엄히 책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후세기에 와서는 더 많은 불화가 생겨 적지 않은 단체들이 가톨릭 교회와의 완전한 일치에서 갈라지게 되었으며, 때로는 양쪽 사람들에게 잘못이 있었다.”(3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