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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가톨릭교회사

종교개혁시대(Ⅲ) - 종교개혁의 원인(2)

by 파스칼바이런 2012. 8. 17.

 

종교개혁시대() - 종교개혁의 원인(2)

 

 

신학적 배경

 

1. 교의 신학

신학의 불확실성 :   중세기에 제기되고 있던 신학의  많은 문제들이 교회 당국에 의해서 공식적으로 결정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학자들은 신학의 현안 문제들을 자유롭게 논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신학적 자유주의는 ‘신학의 불확실성 시대’를 도래시켰다. ― 실상 가톨릭의 입장에서 볼 때 핵심적인 신학 문제, 예컨대 대사, 의화론과 구원론, 미사와 성사의 의미, 교회관, 교황의 수위권 등에 대한 교리가 좀더 확실하게 정립되었더라면 루터의 신학적 공격과 논쟁은 일어나지 않았거나 불필요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러한 불명료한 점들은 종교개혁 이후 뜨리덴띠노 공의회(1545-1563)에서 비로소 해결되었다.

 

이러한 신학의 불확실성은 학파간에 ‘신학적 대립’의  결과를 낳았다. 도미니꼬 수도회는 소속 회원인 토마스 아퀴나스(1224/5-1274)의 사상을 기본원리로 삼아 공식  견해로 내세웠고, 프란치스꼬 수도회는 보나벤뚜라(1221-1274)를 계승한 스꼬뚜스(1265-5-1308)의 가르침을 사상의 근간으로 삼았다. 신앙과 이성을 융합하려는 토마스의 합리주의 신학은 스콜라 사상의 전성기(14세기)에 그리스도교 세계를 내외적으로 지배하였다. 그러나 14세기에 프란치스꼬회 신학자들은 토마스의 이성주의 즉 인간에게 있어서 이성이 최고의 기능이라는 견해에 대립하여, 아우구스띠누스의 영향을 받은 스꼬뚜스의 주의주의 신학을 주창하였다.

 

스꼬뚜스(Duns Scotus)는 토마스와 같이 스콜라학파의 신학자로서 신의 계시가  인간이성에 모순되지 않는다고 보았지만, 신과 인간에 있어서 최고 기능은 지식과 이성이 아니라 사랑과 자유의지이며 따라서 신앙은 계시에 대한 인간 이성의 동의가 아니라 신의 원의에서 나온 계시의 권위에 대해 승복하는 데에서 성립된다고 주창하였다. 의지의 우위성을 강조하는 스꼬뚜스의 견해는 프란치스꼬회 신학자들에 의해 계승되었다. 스꼬뚜스 학파들은 후에 이성과 신앙을 완전히 분리시키므로 ‘스콜라 사상의 붕괴’를 초래하였다.

 

신학의 쇠퇴 :   신학적 불확실성 시대의 스콜라 사상의 붕괴는 ‘신학의 쇠퇴’라는 결과를 낳았다. 대학이 필요 이상으로 증설되었지만 토마스 아퀴나스와 보나벤뚜라와 같은 출중한 학자들은 14세기부터 출현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당시의 신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진지한 연구정신을 갖추지 못하였고 토론의 기교에만 관심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종교개혁 이전의 신학은 실존적 학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교회생활을 외면한 단조롭고  장황하거나 괴기하고 조잡한 말마디의 나열로 격하되었다. 이렇게 신앙 문제를 모호하게 만든 신학체계는  윌리엄 옥캄(1300-1349/50)의 유명론(唯名論)으로 절정에 달하였다. ― 여기서 우리가 참된 신학을 교회생활, 특히 그 성사적 생활에서 힘입는 학문이라고 한다면 이 시대의 신학은 ‘죽은 신학’이었다.

 

유명론 신학 :   프란치스꼬회의 신학 전통 속에서 성장한 윌리암 옥캄은 토마스 사상과 스꼬뚜스 신학에 대립하여 ‘유명론 신학’을 제창하였다. 14세기에 새로운 방법의 등장으로 구방법은 그 영향력을 상실하였다. 그런데 옥캄의 신학체계는 근본적으로 비가톨릭적 경향을 띠고 있었다. 그는 토마스 등의 스콜라 신학자들을 반대하여 자연계와 초자연계, 인간이성과 신의 계시 사이의 조화를 부인하고 신과 자연의 내적 연결이 불가능한 것으로 보아, 자연을 통해서 신의 존재가 증명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옥캄은 인간 이성과 자연에 대해 회의를 갖는 대신에 계시에 대한 굳은 신뢰를 내세웠다. 유명론 신학이론에 의하면 계시된 ‘성서만’이 신앙의 원천을 이루고, 인간이성은 무력하며 ‘신앙만’이 인간으로 하여금 신을 알게 하고 구원을 성취하여주며, 인간의 본능은 무능하기 때문에 신의 ‘은총만’이 만물의  근거가 된다. 그런데 루터는 유명론 신학자인 가브리엘 비엘(1420-1495)을 통해서 옥캄의 사상을 가톨릭의 유일한 정통신학으로 받아들여 자신을 옥캄의 제자로 자처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루터의 세 가지 유일사상 즉  성서 유일, 신앙 유일, 은총 유일은 옥캄의 신학을 발전시킨 것이다.

 

2, 신비 신학

유럽의 14세기는 정치적 동요, 전염병과 농민반란 등의 사회적 불안과 교회의 내분으로 인한 종교적 혼란으로 불안정의 시대였다. 이러한 불행 속에 허덕이는 인간의 마음 속에서 세속적 관심을 제거하고, 영혼이 신과 직접 대면할 수 있다는 새로운 창조적 정신이 움트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개인의 종교적 체험과 신심을 갈망하는 표현이 교회와 성직자 위주의 사상에 반발하는 경향과 함께 곳곳에서 나타났다. 특히 이러한 반교계적인 정신은 신비주의를 통해 독일(특히 라인강 지역)에서 크게 전파되어 사변적 신비사상이 등장하였고, 이는 후에 네덜란드에서 실천적 신비주의운동을 일으켰다.

 

독일의 사변적 신비주의 :   독일 신비사상의 창시자로 지적되는 마이스터 엑크하르트(1260-1327)는 비정통적 신학사상을 제창하였다. 그는 당시 도미니꼬 수도회의 유명한 설교가로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제자로 자처하였지만, 신앙의 우위성을 강조하고 교회의 성사 신학을 비판한 신비주의자였다(이렇게 신앙을 중요시하고 성사를 거부한 점에서 루터의 선구자로 간주되기도 함). 엑크하르트의 신비사상에 의하면, 인간은 신의 존재 속으로 흡수되어 인간성을 상실하고 신격화될 수 있다. 이러한 이론은 그 시대의 토마스 사상과 성사를 중요시하던 사조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엑크하르트의 가르침은 그의 제자인 요한 타울러(1300-13601)에게 계승, 발전되었다. 타울러 역시 도미니꼬회의 경건한 수도자요 열렬한 설교가였다. 그의 가르침은 성직자와 수도자의 규율생활 ― 인간이 구원을 추구하는 데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 을 할 수 없는  일반대중을 대상으로 하였다. 타울러에 의하면, 구원은 금욕 수도자와 같은 생활을 하는 그리스도교인에게  부여되는 (신의) 선물이었다. 그는 신이 인간에게 자유로이 주는 은총을 강조함으로써 성사생활의 의미와 가치를 감소시켰다. 인간이 개인적 체험을 통해서 신의 자유은총에 직접 접촉하였다면, 이제 그에게는 교회와 그 권위가 불필요하거나 적어도 의미가 없게 된다. 이러한 신비사상을 통해 교계와 성사를 거부하려는 정신이 만연된 독일에서는 이미 종교개혁이 싹트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네덜란드의 실천적 신비주의 :   네덜란드의 신비주의는 독일의 신비주의와 비슷하지만 동일한 것은 아니었다. 이 실천적 신비주의자들은 ‘새로운 신심’이란 운동을 일으켰고 ‘공동생활의 형제회’라는 신심단체를 이루고 있었다. 새로운 신심은 그리스도중심의 개인의 내적신심을 강조한 신앙부흥 운동이었다. 이 운동 후기의 대표적 인물은 토마스 하메르켄 폰 켐펜(1380-1471)이다.

 

그의 저서로 알려져 있는 「그리스도를 본받음에 대하여」(준주성범)는 경건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지침서로서, 오늘날까지 성서 다음으로 그리스도교 신도들을 위로하고 믿음을 강하게 해주고 있다. 공동 생활의 형제회원들은 속화된 교회를 공격하지는 않았지만 그 개선을 추구하려 노력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교회의 혁신과 그리스도교인의 종교적 자각을 이룩하는 지름길로 교육을 선택하였다. 후에 공동생활의 형제회가 운영하는 학교에서 종교 교육을 받고 배출된 이들이 바로 교회쇄신의 주창자들인 에라스무스를 비롯한 그리스도교 인문주의자들과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가들(루터, 멜랑크톤, 칼빈, 즈윙글리 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