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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가톨릭교회사

종교개혁시대(Ⅴ) - 마르틴 루터와 종교개혁(1)

by 파스칼바이런 2012. 8. 17.

 

종교개혁시대() - 마르틴 루터와 종교개혁 (1)

 

초기 생애

 

가정과 교육 :   루터는 1483년 11월 10일 삭소니아(작센) 튜린기아(튀링겐) 지방의 아이즐레벤에서 농민인 한스 루터(당시에는 루데르라 불리었음)와 마르가레테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그는 성 마르티노 축일인 출생 다음날에 세례를 받고 마르틴이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루터의 부친은 1484년에 만스펠트의 광산 지역으로 집을 옮겨 소규모의 동광업에 종사하였다. 여기서 루터는 초등교육을 받았고(1489-1495), 이어서 경건한 신앙인들의 단체였던 ‘공동생활의 형제회’가 운영하던 마그데부르그 대성당 부속학교에서 1년(1496-1497)을 보낸 후, 어머니의 고향인 아이제나하의 성 게오르그 성당 소속 라틴어 학교에서 중등교육을 마쳤다(1498-1501). 루터는 이상 학교들에서 엄격한 규율 생활을 통해 종교교육을 받았다. 이러한 학교교육은 엄격한 가정교육과 더불어 후에 루터의 신관, 즉 위엄과 분노의 재판관으로서의 신에 대한 개념을 형성하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루터는 1501년에 에르프르트 대학에 입학하였다. 그는 대학 시절 노래를 잘 불렀고 특히 류우트(14-17세기에 사용되던 기타와 같은 현악기)를 즐겨 연주했으며 진지한 토론을 좋아하여, 친구들 사이에서 음악가 또는 철학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이 대학에서 당시 새로운 학문사조로 등장한 옥캄의 유명론의 영향을 받기 시작하였다. 1502년 57명의 졸업생 중에서 30등으로 학사학위를 받았고 3년 뒤에는 17명중에서 2등으로 석사학위를 받은 후, 루터는 부친의 강력한 원의에 따라 1505년 5월 법과대학에 등록하였다. 당시는 법률가는 야심 있는 청년들에게 성직자 다음 가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부친의 희망은 아들의 수도원 입회로 결실을 맺지 못하였다.

 

수도회 입회 :   루터는 1505년 7월초(7월 2일로 추측됨) 만스펠트에서 에르프르트로 가던 도중 스토테른하임 근처에서 천둥 번개에 놀라, 마지막 성사도 받지 못하고 죽지 않을까 하는 불안과 공포에 떨면서 땅바닥에 엎드려 성부(聖婦) 안나에게 도움을 청하며 수도자가 되겠다고 서원하였다. 그가 성부 안나에게 도움을 청한 이유는 중세기 대중신심의 핵심적 대상은 신이 아니라 성인들이었으며, 안나는 성모 마리아 다음으로 공경의 대상이었고 특히 루터의 부친과 같은 광부들의 주보성인이었다는 사실에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루터는 부친의 노여움과 친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7월 17일 에르프르트에 있던 탁발 수도회인 아우구스티노 은수사회에 들어갔다.

 

루터의 수도원 입회에 대한 서원은 순간적인 결심이라기보다는 이미 오래 전부터 마음 속에 준비되었던 것이다. 그는 다른 중세인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구원과 영생을 갈망하였고, 이러한 평소의 자세가 갑작스러운 죽음의 위험과 신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서 실천에 옮겨졌을 뿐이다. 이러한 주장은 그의 성실한 수도생활에 의해 입증되고 있다. 따라서 루터의 수도원 입회 결심은 그의 강한 의지와 강렬한 종교심에서 나온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루터의 후기 반가톨릭적 종교개혁을 염두에 두고 스토테른하임의 수도서원을 단순히 돌발적 사건으로만 간주하여, 그에게는 참된 수도성소가 없었다고 내세우는 것은 지나친 편견이라고 생각된다. 루터는 청원자로서 2달을 지낸 후 수련생활을 시작하였다. 1506년 9월 수도허원을 하고 정식 수도자가 되었고 다음해 4월 3일에 사제 서품을 받고 수사신부가 되었다.

 

신학 연구 :   루터는 에르프르트 대학에서 1년 동안(1507-1508) 당시의 표준신학교과서였던 베드로 롬바르도의 「신학명제론 4집」을 공부하였다. 1508년에 비텐베르그에 있는 아우구스티노 은수사회 수도원으로 간 루터는 그곳의 대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철학을 강의하며 신학연구를 계속하였다. 당시에 그는 성서와 아우구스티노의 저서에 관심을 갖고 있었고 유명론 신학을 탐구하였다. 여기서 그는 성서학 학위를 받고 성서 강의 자격을 얻었다. 1509년 루터는 다시 에르프르트 대학으로 가서 롬바르도의 「신학명제론」의 강의 자격을 부여하는 학위를 받고 정식 신학교수로서 생활하였다. 그리고 수도회의 일로 로마 여행(1510-1511)을 다녀온 후 1512년 10월 비텐베르그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이 대학에서 성서학 교수로서 시편, 로마서, 갈라디아서, 히브리서를 강의하였다.

 

종교적 체험

 

영신적 번회 :   루터는 수도생활중에 심각한 영신적 갈등을 체험하였다. 당시 루터의 최대 관심사는 ‘나의 구원’이었다. 그는 수도생활이 구원을 실현하는 데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하여 기도, 극기 등의 엄격한 수도규칙을 준수함으로써 공로쌓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육욕 ― 성적 욕망, 악의 충동, 동료 수사에 대한 시기, 미움, 노여움의 감정 ― 을 느낄 때마다 마음의 평화를 잃고 고통을 당하였다. 마침내 그는 수도규칙의 엄수와 같은 인간의 노력과 선행으로는 완전한 의화(義化)와 구원에 도달할 수 없다고 확신하기에 이르렀다. 루터는 이제 자기 자신이 살아있는 지조차 분간하지 못하였고 신의 존재를 의심할 정도로 실의에 빠졌다.

 

신학적 고민 :   루터는 이러한 번뇌의 해결책을 성서에서 찾고자 하였다. 그러나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1장 17절에 나타난 ‘신의 정의’라는 단어는 그의 고민을 더욱 가중시켰다. 그는 이 정의를 죄인을 벌하는 신의 엄책으로 보았다. 여기서 루터는 그리스도교인에게 신은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두려움의 대상이라고 믿었다. 이제 그는 정의의 신에게 분노하고 증오하는 독성죄를 범하기에 이르렀다.

 

탑실 체험 :   루터는 자신의 영신적 번뇌와 신학적 고민에서 벗어나기 위해 계속 로마서 1장 17절의 의미를 탐구하였다. 비텐베르그 수도원 탑의 아랫방에서 이 성구를 묵상하며 기도하던 어느 날(1512-1519년 사이에 일어난 것으로 추측됨), 마침내 그는 조명 또는 계시의 순간에 신의 정의를 수동적 의미로 발견하였다. 루터는 신의 정의란  신이 인간을 신앙에 의해서 의화시키는 것이라고 깨닫게 되었다. 따라서 인간은 선행 없이도 신앙만으로 신의 은총에 의해서 의화된다고 주장하였다. 이제 그는 재생하였고 마음의 평화를 찾았다고 회고하였다.

 

루터의 탑실 체험은 돌발적 사건이 아니라, 아우구스티노의 저서, 독일의 신비주의(요한 타울러), 옥캄의 유명론, 성서의 영향을 받아 나온 것이다. 그리고 이 체험은 신과의 직접적 접촉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이러한 신과의 실제적 만남은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신의 개입의 결과를 나타내는 회심(回心)을 일으키는 것이다. 따라서 루터의 이러한 체험은 다른 이들에게도 나타날 수 있는 것이며, 그 근본은 가톨릭적 의미를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