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가톨릭 관련>/◆ 가톨릭교회사

종교 개혁시대(Ⅱ) - 종교개혁의 원인(1)

by 파스칼바이런 2012. 8. 8.

 

종교 개혁시대(Ⅱ) - 종교개혁의 원인(1)

 

 

정치적 배경

 

서부 유럽 :   중세 말기에 이르러 프랑스, 스페인, 영국 등 서부 유럽 국가들은 중앙집권직인 전제군주 정치체제로 발전해가고 있었다. 이러한 중앙집권주의 정책은 전체적 이익보다는 자국(自國)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추구하게 하였다. 예컨대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의 가장 가톨릭적 국왕인 프랑소와 1세(1515-1547)는 왕권 강화와 세력 확장을 위해 신성로마제국의 가톨릭 황제인 카알 5세(1519-1556)를 대항하여, 이교 국가인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회교 군주 술레이만 1세(1520), 그리고 독일의 프로테스탄트 제후들과 동맹을 맺기를 주저치 않았다.

 

또한 중앙집권주의의 통치자들은 국교회사상(국교회사상)을 갖고서 교회를 국가에 예속시키고자 하였다. 예컨대 영국의 헨리 8세(1491-1547)는 국가교회를 세웠다. 이러한 통치자들은 교회 문제에 있어서 성직 임명권과 같은 특권을 요구하였다.

 

중부 유럽 :   독일, 이딸리아와 같은 유럽 중부지방에서는 중앙집권의 정치체제가 나타나지 않았고 오히려 지방분권화의 정치적 상황에 놓여있었다. 신성로마제국인 독일의 경우, 황제의 권력은 실질적이기보다는 하나의 형식적이며 이상적인 것이었다. 황제는 자신의 직책을 수행하는 데 있어 선제후(選帝侯)들과 지방 제후들에 의해 제한을 받았다. 이들은 황제에게 충신을 다하던 봉신(封臣)들이었지만 15세기에 이르러 황제의 권한의 일부를 요구하고 나섰다.

 

따라서 이들은 후에 이러한 요구를 실현하기 위해, 황제와 충돌한 마르틴 루터와 그의 종교개혁을 열렬히 환영하고 나서기에 이르렀다. 이딸리아는 찬란한 문화와 경제적 풍요를 갖고 있었으나 내부의 투쟁과 외세의 간섭을 겪으면서 정치적으로 분열된 지방이었다. 교황 알렉산델 6세(1492-1503)와 율리우스 2세(1503-1513)치하에서 교황청은 이딸리아의 실질적인 정치세력이었다.

 

경제-사회적 배경

 

중세 말기에는 경제 및 사회적으로 볼 때에 도시와 지방 사이에 빈부의 차이가 심하였다.

 

도시인의 배금사상 :   도시의 부유한 상인들은 전통적인 윤리관이나 고리대금의 금지에 아랑곳없이 황금만능주의에 젖어있었다. 금(金)은 부유를 가져오고 인간의 모든 행동의 동기는 바로 금에 있다고 확신하였다. 금의 위력은 천국에 이끌 수 있을 만큼 위대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는 후에 대사에 대한 참된 신학적 의미를 외면한 대사부(大赦符) 판매의 길을 쉽게 열어주었다.

 

지방민의 빈곤 :   지방에서는 일부의 귀족과 몰락한 기사, 그리고 대부분의 농민들이 가난하였고 따라서 불만 속에 살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지방은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또 종교적으로 혁명이 일어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지성적 배경

 

르네상스 인문주의 :   이 인문주의(人文主義)는 14세기에 이딸리아에서 일어나 15-16세기에  영국, 스페인, 헝가리, 폴란드, 프랑스, 네덜란드에 번진 문화적 또는 지성적 운동이다. 이 운동은 관심사가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의 양양에 있기에 인본주의라고도 불린다. 그리고 이 역사적 사건을 다른 인문주의적 운동과 구별하기 위해 르네상스 인문주의라고 일컫는다. 서구문화 발전에 있어서 르네상스 인문주의가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이를 새로운 역사 시대인 현대의 시작으로 보는 이도 있다.

 

이 이딸리아의 르네상스 인문주의는 고전문학 즉 희랍과 로마 문학에 대해 철학적이기보다는 심미적 관심을 갖고 있었고 따라서 중세의 학자들과는 달리 고대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보다 수사학자인 치체로에 더욱 호감을 가졌다. 그리고 이들은 국가주의적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 초기 인문주의자들은 고대 로마 문화의 상속자로 자처하면서 이를 부흥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교적 로마 문화의 재건에 대한 관심사가 그리스도교 신앙의 거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대부분 그리스도교에 충실하였고 오히려 고대 로마의 이교를 본받는 것을 경고하였다. 아울러 이들은 객관적, 스콜라적, 체계적 사상 대신에 주관주의, 개인주의, 인간  각자의 경험에 치중하는 경향을 갖고 있었으며 새로운 과학적 방법, 즉 역사적이며 철학적인 연구방법을 존중하였다.

 

이러한 방법은 원천에 대한 비판적 탐구 및 복귀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유럽 북부 및 서부의 인문주의는 그 개인주의적 성격에 종교적 의미를 적용하여 인간 각자를 성신(聖神)의 궁전으로 존중하였고 고대 원문(原文), 원서로의 복귀에 있어서 고전보다는 그리스도교적인 원천, 즉 신약성서 - 특히 희랍어 신약성서 - 와 교부들의 저서를 중시했고 성서연구에 있어 철학적이며 비판적 방법을 도입하였다. 여기서‘ 그리스도교적’  또는 ‘성서적’ 인문주의란 용어가 나왔다. 그리고 이 그리스도교 인문주의자들은 교회생활에 있어서 초대교회의 제도와 규율을 다시 일으킬 것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성서를 강조하고 종교개혁은 사도시대로의 복귀로 확신하였던 루터와 그리스도교 인문주의가 연결을 맺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이는 직접적이기보다는 간접적으로 종교개혁의 길을 마련한 원인(遠因)이었다. 그리스도교 인문주의자들은 내적생활을 강조하면서 교회개혁을 주장하였지만, 대부분이 혁명적인 인물들은 아니었으며 후에 그리스도교계의 일치와 단결을 보존하기 위해서 가톨릭 교회를 떠나 프로테스탄트를 따르기를 거부하였다.

 

그 대표적 인물들인 영국의 로체스터 주교 존 피셔(1469-1535)와 대법관 토마스 모어(1478-1535)는 이혼 문제로 인한 헨리 8세와 교황청과의 대립에서 로마 교회의 입장을 옹호하고 영국의 종교개혁에 반대한 이유로 처형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인문주의의 제1인자는 네덜란드 로테르담의 학자인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1466/9-1536)였다. 그는 1486년 아우구스티노 참사수도회에 입회하여 1492년 사제서품을 받았다. 에라스무스는 빠리에서 4년간(1495-1499) 수학한 후 영국을 방문하여 위에 언급한 그리스도교 인문주의자들과 친교를 맺었다.

 

그는 빠리에 돌아와서 「그리스도 군사의 제요」라는 저서를 발간하여 지나친 외적 신심행위를 비판하고 성서에 의거한 내적생활을 강조하였다. 이딸리아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획득한 그는 다시 영국을 방문하여(1509-1514) 런던에서 풍자적 글로써 성직자들의 타락을 비난하였다. 그리고 그의 희랍어 신약성서 개정판이 스위스 바젤에서 출판업자 요한 프뢰벤에 의해서 출판되었다. 후에 벨기에의 루뱅에 머물고 있을 때에 그곳의 보수주의 신학교수들은 이 성서를 비판하였다. 그러나 에라스무스는 성서는 원어로 연구되어야 하며 신학자들은 고대 성서 언어에 대한 밝은 지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의 친구인 프뢰벤이 루터의 저서들을 출판하였을 때에 에라스무스는 이 신학자들에게 이단자의 혐의를 받았다. 더우기 그는 루터처럼 교회의 악폐를 비난하고 성서에 입각하여 교회를 쇄신할 것을 촉구하였기 때문에 어떤 신학자들은 그를 루터의 지지자로 간주하였다. 이때 그는 자신이 루터를 전혀 모르는 인물이라고 반박하였다. 어쨌든 1519년 11월 7일 루뱅 대학 신학교수들이 루터의 저서를 단죄하여 소각하는 것을 좋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독일 종교개혁의 소용돌이 속에 휩쓸리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는 중도(中道)입장을 취하면서 이 신학자들과 루터 사이의 중재역할을 희망하였다. 그러나 그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에라스무스는 1521년에 바젤로 돌아왔다. 여기서 그는 오랫동안 주저한 끝에 루터의 교리를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1529년 바젤에서도 종교개혁이 일어났을 때 그는 독일 프라이부르그에 피신하여 저술생활을 하다가 다시 바젤로 돌아가 1536년 7월 12일에 사망하였다. 그의 마지막 저서들은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를 재결합하기 위한 중재신학의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이 신학은 가톨릭 측에서 많은 지지자를 갖게 되었고 프로테스탄트 측에서도 멜랑크톤과 같은 추종자들이 있었다. 멜랑크톤은 아우구스부르그 국회(1530)에서 에라스무스의 정신으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재일치를 꾀하였으나 루터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