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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가톨릭교회사

종교개혁시대(Ⅶ) - 마르틴 루터와 종교개혁(3)

by 파스칼바이런 2012. 8. 17.

 

종교개혁시대() - 마르틴 루터와 종교개혁(3)

 

 

루터의 개혁운동

 

보름스 국회 :   스페인의 왕 카를로스 1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권을 두고 프랑스의 왕 프랑소와 1세와 치열한 선거전 끝에 황제로 선출되어(1519년 6월 28일) 카알 5세로 즉위하였다. 이 황제 선거에서 교황 레오 10세는 카알을 반대하였다. 따라서 독일에서는 많은 이들이 새 황제의 반교황 정책을 기대하면서 열렬히 환영하였다. 루터도 황제에게 격렬한 격문을 보내어 교황청에 대한 불만과 증오심을 선동하였다.

  

그러나 카알은 중세기적 전통에 의한 황제의 사명을 고수하여 교회와 서구 그리스도교의 옹호자로 자처하였다. 루터가 자신의 주관적 체험에 이끌려 새로운 신앙을 강조한 반면, 카알은 교황에 대한 개인적인 반감보다는 전통적인 신앙과 교회의 일치를 중요시하였다. 따라서 황제는 루터 문제에 있어 가톨릭 교회의 입장에서 루터의 저서를 소각하는 데에  참석하였고, 루터가 교회의 공식 파문을 받자 그를 국외로 추방할 것을 승낙하였다.

  

그런데 이때에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의 간청으로 우선 보름스 국회에서 루터 문제를 조사할 것을 허락했다. 루터는 1521년 4월 16일 군중들의 환영을 받으며 보름스에 도착했다. 그는 다음날 국회에 출두하여 자신의 저서들을 변호했고, 끝까지 자기의 주장을 고수할 것인지 아니면 취소할 것인지에 대한 최후통첩을 받고 생각할 시간을 요청하였다. 루터는 4월 18일 국회에 다시 등장하여 그의 주장이 성서에 입각하여 오류라는 것이 증명되지 않는 한 자신의 양심을 거슬러서까지 취소할 수 없다고 열변을 토하였다.

루터의 변론은 국회의원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그러나 다음날 황제도 자신이 작성한 연설을 하였다. 그는 자신의 선조들이 로마 교회의 충실한 후예였으며 가톨릭 신앙과 관례, 교령과 경신례의 수호자들이었음을 상기시키고 선조들이 남긴 이러한 유산을 성실하게 수행하겠다고 선언하였다.  동시에 카알은 루터의 오류에 대해 아직 어떠한 조처도 취하지 않은 것은 유감으로 생각한다면서 국회의원들에게 이제 루터를 이단자로 공인해야 한다고 촉구하였다.

  

이로써 독일 신성로마제국 안에서 루터에 대한 공식적인 입장이 천명되었다.  황제는 5월 8일 루터와 그의 추종자들을 추방하기로 결정한 칙령에 서명하여 5월 25일 국회에 제출하였으나, 많은 의원들이 귀가했고 황제는 전쟁으로 인하여 독일을 떠나야 했기 대문에 추방령은 시행되지 못하였다.

 

루터의 바르트부르그 생활 :   루터는 1521년 4월 26일 보름스를 떠나 바라트부르그로 호송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기 시작하였다(이 독일서 성서는 1522년에 출판되었음). 이 성서는 독일 민족의 언어, 생활, 종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불멸의 작품이었다. 그 외에 루터는 미사성제, 성직자의 독신생활, 수도허원을 지나친 표현을 통해서 비난하는 소책자들을 출판하였다.

 

루터의 과격한 설교와 저서들은 독일을 혼란 속에 빠뜨렸다. 1521년부터 성직자들은 성직을 포기하고 수도자들은 수도원을 떠나기 시작하였다.  1521년 12월에 비테베르그에 미사를 봉헌하려는 신부들에 대한 폭행 사건과 성당의 성화상 파괴 행위가 발생하였다.

 

루터의 후기 생활

 

농민반란 :   이 사건은 당시의 정치적 압박과 불의에 대한 반발의 결과로서, 교회사보다는 세계사에 해당된다. 그러나 이것은 루터의 혁명적인 저서에 자극을 받은 농민들이 1524년 관청과 교회에 공격을 감행한 사건이다.  농민 지도자들은 루터의 말을 인용하여 그들의 요구 사항을 루터에게 제시하였다(1525년 3월 6일). 루터는 1525년 4월 농민들에게 평화와 인내를 호소하고 군주들에게는 양심에 입각하여 농민들의 요구를 들어주도록 권고하였다.

 

그러나 농민들의 방화와 살육이 전해지자 과격한 행동을 싫어하고 권위를 존중하던 루터는 농민들을 비난하는 입장에서 「강도적이며 살인적인 농민 도당을 거슬러」라는 저서를 써내었다. 여기서 그는 사회의 무질서를 방지하기 위해 귀족들에게 무력 진압을 요구하였다.

  

결국 루터는 종교개혁에 무력 사용을 호소한 셈이 되었고 따라서 그는 이제 더 이상 독일 국가영웅의 이미지를 상실하였다. 이러한 인기 하락은 그의 결혼으로 가속화되었다. 루터는 42세 때에 씨토 수녀회에서 환속한 16세 연하의 가타리나 폰 보라와 결혼했다(1525년 6월 13일). 이 행동은 그의 가까운 친구들에게도 커다란 충격을 주었고 그에게서 멀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독일의 종교문제 해결 모색 :   이제 교회 사건은 정치 문제화하여 국회에서 다루게 되었다. 제1차 시파이어 국회는 교회 문제에 대한 조정을 군주들에게 위임하기로 결정하여(1526년) 일부 군주들은 자기의 지방을 신교 지방으로 개혁하였다.  그러나 1527년 보름스 국회의 칙령을 수행할 것을 결의하자 신교 국회의원들은 처음으로 공식적인 반대의사를 표명하였고(여기서‘저항자’라는 의미에서‘프로테스탄트’란 용어가 나왔음) 비밀동맹을 결성하였다.  그동안 전쟁으로 독일을 떠나있던 카알 5세가 9년 만에 다시 돌아와 교회 문제를 해결하고자 1530년 아욱스부르그 국회를 개최하였다. 황제는 평화적 방법으로 신구교의 종교적 대립을 해소하고 교회개혁을 논의하도록 하였다.

 

우선 루터의 친구인 멜란히톤이 신조문을 작성하여 1530년 6월 25일 국회에 제출하였다. 이 「아욱스부르그 신조문」에는 신구교의 교리적 구별은 없었고 전체적으로 가톨릭적이었으며, 다만 교회 규율 면에 있어서 혁신 요구사항을 제시하였을 뿐이다. 이와 같은 화해적 태도는 재합일의 기반이 될 수 있었다. 황제는 신구교의 협상위원회를 구성했고 양측 위원들은 최대한의 절충과 최소한 요구의  양보 자세로 임하였다.  

 

그러나 통합의 시도는 루터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그는 추종자들과의 서신 연락으로 국회에 영향을 미쳤고, 멜란히톤의 양보에 대해 엄중히 힐책했으며 작센의 군주 프리드리히에게 어떠한 담판도 거부한다는 태도를 분명히 밝혔다.   결국 수많은 회담과 충돌을 거쳐 루터가 죽은(1546년 2월 18일) 후 1555년에 아욱수부르그 국회에서 일차종교협정이 이루어졌다. 이에 의하면, 백성들은 자기 영주의 종교를 따르거나 다른 곳으로 이주해야 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복잡한 협의가 있었으나 이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 종교전쟁이라고 일컬어지는‘30년 전쟁’(1618-1648)이 발발하였고 독일은 초토화되었다.

 

마침내 1648년의 베스트팔리아 평화회담에서 종교분쟁은 최종적으로 일단락되었다. 이제 어디에서나 신구교가 공존할 수 있게 되었다.   1570년에 이르러 독일의 2/3가 루터파로 개종했고 기타 일부 유럽 지역에도 루터파가 전파되었으나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스칸디나비아 지방은 전부 루터파로 전향하였다. 동시에 프로테스탄트의 종교개혁은 쯔빈글리(1484-1531)와 칼빈(1509-1564)에 의해서도 이루어졌고 영국에서는 성공회가 창설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