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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가톨릭교회사

종교개혁시대(Ⅷ) - 교회 쇄신의 움직임

by 파스칼바이런 2012. 8. 17.

 

종교개혁시대() - 교회 쇄신의 움직임

 

 

교회 개혁의 시도 :   교회 쇄신은 이미 콘스탄스 공의회(1414-1417)와 바젤공의회 (1431-1491)에서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이때에는 수많은 장애, 특히 각 국가와 단체들의 상반된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서 5개의 개혁 교령들이 선포되었으나 실천되지는 못하였다. 대부분의 르네쌍스 교황들도 교회 혁신에 대한 계획을 제시하였다. 교황 비오 2세(1458-1464)는 두 추기경, 도메니키니와 니콜라스의 전교회 쇄신을 위한 포괄적인 ‘프로그램’을 받고 시행하여 하였으나, 회교도와의 전쟁과 그의 급서로 인하여 개혁 칙서의 초안이 작성되었을 뿐 결실을 거두지 못하였다.

 

교황 식스또 4세(1471-1484)와 알렉산델 6세(1492-1503) 치하에서도 교회 혁신의 분위기가 있었다. 알렉산델 6세는 1497년 가정의 불행한 사건으로 자신의 생활을 반성하고 교회 쇄신에 경주하기로 결심하여, 6명의 추기경으로 구성된 위원회에 자신의 개혁 의지를 알리는 교령을 선포하도록 위임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시도에 불과하였고 교령은 반포되지 않았다. 또한 교황 율리오 2세(1503-1513)는 제5차 라테란 공의회(1512-1517)를 개최하여 소규모의 교회 쇄신을 단해하였고 수도원 개혁을 시도하였다.

 

마지막 르네쌍스 교황인 레오 10세(1513-1517)도 제5차 라테란 공의회를 속개하여 교회 혁신에 착수하였다. 제8차 회기(1513년 12월 19일)에 까말돌리 수도회의 또마소 쥬스티아니와 빈첸쪼 귀리니는 교황에게 교회 혁신을 위한 계획서를 제출하였다. 이 계획서에는 교회의 잘못과 이에 대한 비판, 그리고 교회법의 개정, 수도원의 재조직, 전례의 통일화, 동방교회와의 재일치 등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공의회는 이 개혁 수사들의 계획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오직 몇 가지 개혁 교령을 반포하였을 뿐이다. 이와 같이 르네쌍스 교황들의 교회 쇄신 계획은 좌절되거나 시행되지 못하였다. 그것은 교황들과 교황청이 이를 시행할 만한 내적 그리고 종교적 역량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개혁 공의회의 준비 :   마르틴 루터는 이미 1518년에 전체 공의회의 개최를 요구하였다. 1521년의 보름스 국회에서 루터 문제를 공의회에 상정하려는 견해가 거론되었다. 특히 교황 아드리아노 6세(1522-1523)는 독일의 뉘른베르그 국회(1522-1523)에 파견한 교황 사절에게 훈령을 내려 교회의 잘못을 고백하고 교회 쇄신을 약속하였다. 이에 대해서 독일 군주들은 ‘독일 안에서의 자유로운 그리스도교 공의회’를 개최할 것을 요구하였다.

 

1524년 11월에 독일 군주들은 교황이나 그 특사가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체 공의회를 개최할 수 없어서 슈파이어에서 ‘독일민족의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그러나 카알 5세는 “어떻게 한 국가가 교회 질서의 변경을 감행할 수가 있는가?”하며 공의회의 개최를 금지하였다. 그 대신 황제는 교회 개혁을 위한 전체 공의회의 개최를 교황에게 간곡하게 요청하였다. 그러나 교황 끌레멘스 7세(1523-1534)는 전체 공의회의 개최를 주저하였다.

 

그 첫째 이유는, 교황이 콘스탄스 공의회와 바젤 공의회에서 주창되었던 공의회주의, 즉 교황보다 공의회가 우위에 있다는 사상의 망령이 다시 살아날까봐 전체 공의회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실상 독일 국회의원들이 ‘자유로운 그리스도교 공의회’의 소집을 요구했을 때, 그들은 이 공의회가 교황의 간섭도 받지 않고 참석 교부들은 공의회에 앞서 교황에게 선서하지 않도록 했다. 따라서 교황의 우려도 근거가 없는것은 아니었다.

 

둘째 이유는 교황령과 관계되는 문제였다. 선임 교황들과 같이 끌레멘스 7세도 교황령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카알 5세의 신성로마제국이 교회의 안보에 큰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여, 1526년에 프랑스의 왕 프랑소아 1세와 ‘꼬냑동맹’을 맺고 카알 5세에 대항하였다. 이에 대해 황제는 교황에게 프랑스와의 동맹을 취소하지 않으면 전체 공의회를 열어 새 교황을 선출하겠다고 위협하는 동시에, 자기의 힘을 교황이 체험하도록 하기 위해 로마 군대를 진군시켰다. 거칠고 상관을 갖지 못한 스페인과 독일의 용병들은 1527년 5월 6일에 로마를 습격하여 1주일 동안 약탈과 살육을 일삼았다(이 사건을‘로마의 함락’이라고 부름).

 

교황은 산 안젤로 성에 피신할 수 있었으나 6월 5일에 항복하고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교황은 1529년 6월에 바르첼로나에서 황제와 화해하였고, 볼로냐에 머물고 있는 동안(1529년 11월-1530년 2월) 다시 황제와 독일 문제에 대해 회담하였다. 이때에 카알 5세는 곧 개최될 아욱스부르그 국회에서 분열된 교회가 평화로운 통합을 이루지 못하면 전체 공의회를 개최할 것을 교황에게 약속 받았다. 결국 국회가 결실도 보지 못한 채 폐회되자 황제는 교황에게 약속 이행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끌레멘스 7세는 이 요구를 거절하였다. 독일인이 공의회와 전세계를 혼란 속에 빠뜨리게 될 것이라는 불안을 교황이 갖고 있었고, 독일의 프로테스탄트와 공의회를 개최할 의사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황 바오로 3세(1534-1549)에 이르러 공의회 개최와 교회의 개혁에 대한 전망이 밝아졌다. 바오로 3세는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에 가톨릭의 교회 쇄신을 신중히 받아들여 실천한 첫 교황이었다. ‘로마의 함락’은 교황에게 교회의 반성과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따라서 우선 개혁이 가장 필요하였던 추기경단의 혁신부터 시작하여 개혁의 선구자들을 추기경으로 선임하였다. 그리고 1536년에는 교회 개혁을 갈구하는 추기경들로 구성된 위원회를 구성했고, 여기서 ‘교회 쇄신을 위한 의견서’(이것은 후에 트렌트 공의회의 의안이 됨)가 제출되었다. 그 외에 교황은 새로운 혁신 수도회를 장려 또는 인가하였고 교회 개혁과 동양 선교에 공헌한 예수회도 인가하였다.

 

그리고 교황은 카알 5세에게 1537년 만뚜아에서 공의회를 개최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프랑스의 프랑소와 1세는 공의회 소집을 방해하였다. 그것은 서구 전체에 대한 주도권 장악을 꾀하고 있던 프랑소와 1세가 공의회로 인하여 카알 5세의 지위가 강력해지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톨릭 신자인 그는 같은 가톨릭 신자인 카알 5세에게 대항하기 위해서 회교도와 독일의 프로테스탄트와 손을 잡았다.

 

그러나 카알 5세는 이 전쟁(1536-1238)에서 승리하였다. 아울러 하겐하우, 보름스, 레겐스부르그 국회에서 있었던 신구교의 평화 통합의 회담이 무위로 돌아가자 공의회는 더욱 필요하게 되었다. 황제의 독촉을 받고 바오로 3세는 1542년 6월 29일에 뜨렌또에서 공의회를 소집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때에 프랑소와 1세가 다시 카알 5세에게 선전포고하여 공의회의 개최는 연기되었다.

 

또 한번 전쟁(1542-1544)에서 승리를 거둔 황제는 끄레피 평화회담(1544년 9월 19일)에서 프랑소와 1세에게 다시는 공의회를 방해하지 않도록 다짐을 받았다. 따라서 교황은 1545년 3월 15일에 트렌트 공의회를 소집한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 개혁 공의회는 12월에 가서야 개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