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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가톨릭교회사

비잔틴 교회

by 파스칼바이런 2012. 7. 28.

 

비잔틴 교회

― 중세 교회(Ⅳ) ―

 

성화상 파괴 논쟁

 

백여 년 동안 비잔틴(동로마 제국) 교회를 격심한 대립 세력으로 분립시킨 성화상 파괴논쟁(聖畵像破壞論爭)은 많은 박해와 폭력 사태, 정치 호란과 사회 소요를 야기시켰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이는 동로마 제국의 교회 역사에 있어서 전환기의 하나로 서술되고 있다. 그  동인(動因)은 명백하게 전부 밝혀지고 있지는 않지만 여기에는 종교, 정치, 경제, 사회적 배경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사건의 주요 쟁점은 종교적 문제, 즉 그리스도교 교리와 전례에 대한 것이었다. 성화상 파괴는 모든 종교 예술품에 대한 적의에서 비롯되는데, 이러한 자세는 구약성서에서 야훼가 이스라엘 백성을 우상 숭배에서 구하고 신(神)의 영적  본성을 살리기 위해서 어떠한 형태의 모상(模相)도 공경하는 것을 금지한 사실(출애 20,4; 레위 26,1; 신명 4,16)에 기인하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神)이 가시적 인간의 모습을 갖춘 이후로 신약에서 모상 금지는 더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 교회는 오랫동안 모상에 대해 경고하였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모상보다는 상징(象徵)을 택하였다. 2세기경의 십자가에는 그리스도가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 당나귀의 형태로 나타났으며(로마의 겔로티아나 성당의 벽화),  4세기에 이르러 오늘날의 십자가 형태가 나왔다. 그리고 5세기에 성화상(주로 그리스도와  성인의 성화상)의 공경이 시작되고 6세기 말에 전파되어 7세기 비잔틴 교회에 있어서는 대중 신심으로 크게 유행되었다.

 

그런데 후시대에 이르러 소(小)아시아에서 성화상 공경에 대한 반대가 일어났다. 그것은 일반 대중이 모상과 그것이 뜻하는 대상을 구별하지 않음으로써 이러한 신심 행위가 우상 숭배에 떨어질까 걱정이 되어서였다. 육화(肉化)한 그리스도의 모상은 그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을 내포해야 하는데, 신성은 나타낼 수 없었고 또 인간 모습만의 표현은 네스토리우스 사상과 같은 이단에 빠질 위험을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동로마 제국에 있던 단성론(單性論)의 이단자들도 그리스도의 완전하고 참된 인성을 부인하였기 때문에 성화상 공경을 배격하였다. 아울러 동방 교회의 주교들은, 이슬람교도인 아랍인들이 시리아와 에집트에 침입하면서 성화상에 대해 적개심을 갖고 있어서 이들의 개종에 이 신심 행위가 장애가 된다고 생각하여 반대하였다.

 

그러나 제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692)는 성화상 공경에 찬의(贊意)를 공표하였다. 또한 8세기 초에 신학자인 다마소의 요한은, 성화상은 '침묵의 설교', '하느님 신비에 대한 기록', '문맹자들을 위한 책'일 뿐 아니라 성화(聖化)한 물질이 표상은 그리스도의 육화에 의해서 가능하게 되었다고 신학적 설명을 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의 육화'  신학과 성화상의 의미를 연결시켰고 신(神)에게만 바치는 흠숭(欽崇)과 피조물에게 드리는 공경(恭敬)을 구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화상 논쟁은 수그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726년에 황제 레오  3세(717-741)가 비잔틴 제국에서 성화상의 파괴를 명령함으로 해서 이 논쟁은 공개화되었다. 일반 대중은 수도자들의 영향으로 성화상 공경을 주장하고 실천하였다.

 

마침내 730년에 황제는 성화상 공경 금지의 칙서를 반포하여 성당에서 성화상의 강제 철거를 명령하였고 성인들의 유해는 파괴 또는 소각되었다. 콘스탄틴 5세(741-775)의 시대에 성화상 파괴는 극에  달하였다.

이 황제는 754년에 콘스탄티노플의 한 교회에서 종교회의를 개최하여 338명의 참석 주교들의 만장일치로 성화상 공경을 우상 숭배로 결의하여 금지했다. 그는 이 회의에서 성화상 공경을 주창하는 지도자들 ― 특히 다마소의 요한 ― 을 이단으로 단죄하여 처형하였다. 따라서 이는 반(反) 수도원 운동으로 서술되고 있다.

 

레오 4세(775-780)가 황제가  된 후에는 성화상 공경의 지지자였던 아내 이레나 여제(女帝)의 영향으로 온건 정책을 썼고 수도자 박해도 중지하였다. 이레나가 섭정하면서 성화상 신심을 회복시켰고(786), 787년에는 제2차 니체아 공의회(이는 동방과 서방의 교회가 한자리에 모인 마지막 공의회가 됨)를 개최하여 성화상을 이단으로 선언한 754년 종교  회의 결정을 무효화하고 다마소의 요한의 신학적 논증을 재확인하였다. 그러나 레오 5세(813-820)와 테오필로 1세(829-842)의 시대에 다시 성화상 공경을 금지시켰고 수도자들은 박해를 받았다. 그러나 성화상 파괴는 미카엘 3세(842-867)가 등극하면서 서서히 자취를 감추었고, 843년에 콘스탄티노플의 한 성당에서 열린 종교 회의에서 성화상 공경을 부활시킴으로써 논쟁을 끝맺었다.

 

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의 결별

 

비잔틴 교회와 서방의 라틴 교회의 견해는 오랫동안 각기 다른 노선으로  발전하여왔다. 정치, 신학, 전례, 규율에 있어 상호간에  많은 차이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더우기 샤를르 대제와 오토 대제의 서방 제국 건설과 이딸리아 진출, 서방 교회의 개혁 정신 등은 두 교회 사이의 대립 또는 적대감정을 격화하였다. 결국 두 교회의 충돌은 복구의 노르만 민족이 비잔틴 제국의 영토였던 남부 이딸리아를 점령하였을 때에, 교황 레오 9세(1049-1054)가 그의 정치 세력을 이 점령 지역까지 연장하였을 때에  일어났다.

 

비잔틴 제국의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9세(1042-1055)가 점령자들을 축출하기 위해  교황과 동맹을 맺고자 하였다. 이때에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인 미카엘 체룰라리우스(1043-1058)가 그의 관할 지역인 남부 이딸리아에서 교황 세력이 확대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교회내의 충돌을 일으킴으로 비잔틴 제국과 교황청의 상호이해를 저지시켰다.  그는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수도원과 성당을 폐쇄시켰고, 미사 중에 누룩 없는 빵을 사용하는 것과 라틴 예절의 거행을 금지시켰으며, 성직자의 독신 생활과 신조(信條)에 '성자와'(filioque)를 삽입하는 것을 단죄하였다.

 

그래서 레오 9세는 두 교회의 협력관계를 도모하고 체룰라리우스의 비난을 없애기 위해서 당시에 교회 개혁가였던 훔베르토 추기경을 대표로 하는 세 명의 특사를 콘스탄티노플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이 협상은 처음부터 잘못 시작되었다. 교황의 사절들은 총대주교를 거만한 자세로 대하였다. 그들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로마 헌납서와 사도 전승에 의한 교황의 절대적 권한에 의거하여 체룰라리우스에게 로마교황의 수위권(首位權)을 인정할 것을 강요하였고, 서방 교회의 관습이 유일한 것임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야심가였던 총대주교는 협상이 결렬되도록 유도(誘導)하였고 마침내 사절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기서 훔베르토 추기경은 총대주교와 그의 추종자들에  대한 파문서를 작성하여, 1054년 성소피아 성당 제대 위에 놓고 로마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 파문서는 콘스탄티누스 9세의 명령으로 소각되었고, 콘스탄티노플의 한 성당에서 개최된 종교 회의는 훔베르토와 그 일행을 파문하였다.

 

이 파문서는, 서방 교회가 새로운 독자 노선으로 발전되어가고 있었고 서방 교회의 지도자들이 동방 교회의 정신을 잘 이해하지 못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사건의 발단은 인간의 결점과 오해에 있었고 이는 교리 문제이기보다 규율 문제였다.  오늘날까지 쟁점이 되고 있는 것은 훔베트로 추기경이 월권(越權)을 행사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다. 체룰라리우스의 파문이 선언되었을 때에 교황 레오 9세는 이미 사망하였고(4월 19일 사망), 그 후계자인 아드리아노 4세(1054-1059)는 아직 피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12월 4일에 선출).

 

이 결별 이후 오늘날까지 두 교회는 완전한 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다만 일치를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1964년 교황 바오로 6세는 예루살렘 방문에서 총대주교 아테나고라스를 만났고, 1965년에는 가톨릭 교회와 동방 정교회가 1054년의 상호파문을 취소하였으며, 1067년에는 바오로 6세가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하였다. 최근에 와서 돌아가신 복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하여 동방 정교회의 총대주교 디미트리오스 1세와 함께 교회 일치를 위한 공동 성명을 발표하였고(1979.11.30), 두 교회의 완전 일치를 향한 대화를 위해서 합동신학위원회를 정식 발족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