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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가톨릭교회사

로마 교회의 암흑기

by 파스칼바이런 2012. 7. 28.

 

로마 교회의 암흑기

― 중세 교회(Ⅱ) ―

 

 

카롤링거 왕조의 붕괴

 

샤를르 대제를 계승한 카롤링거의 어느 왕도 이 대제만큼 정치적 수완을 갖추고 있지 못하였다. 따라서 샤를르의 사망(814) 후에 카롤링거의 프랑크 제국은 붕괴하기 시작하였다. 다만 샤를르 대제의 아들인 루이 1세(814-840, 敬虔王 이라 불림)가 종교적인 면에서 공헌하였을 뿐이다. 그는 부친의 정책을 이어받아 교회에 특별한 관심과 배려를 보여주었다. 루이 1세는 교회법과 성직자에 대한 규율의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는 대성당 참사회(參事會) 제도를 설정(816)하여 성직자들이 공동생활을 하도록 조처하였고, 수도회 법령집을 반포(817)하여 프랑크 제국의 모든 수도원들이 성 베네딕또 수도 규칙을 준수하도록 명령하였다. 또한 819년에 황제는 교회 법령집을 공포하여 자유인에게만 성직자의 자격을 부여함으로써 봉건사회에서 교회가 지주(地主)에게 예속되는 위험을 방지하였고, 주교만이 성직자를 임면(任免)할 수 있다고 규정하여 지주들의 월권 행위를 금지한 동시에 주교의 권한을 강화하였다. 그리고 이 시대에 북부 유럽의 스칸디나비아 지역과 동남부 유럽의 슬라브 족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루이 1세가 프랑크 왕가의 상속법에 의해서 그의 아들들에게 국토를 분배하면서 프랑크 제국은 패망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817년에 루이 1세는 큰아들인 로타르에게 황제의 칭호와 권한을 부여하면서 영토로 제국의 중심부를 내주었고, 페펭과 루이 2세에게는 각각 서부 지역과 동부 지역을 나누어주었다. 그러나 황제가 재혼하여 독두왕(禿頭王) 샤를르 2세를  낳고나서 제국을 재분할 하였을 때에 전처소생의 왕자들이 반발하였고, 그 후 왕자들의 권력투쟁으로 국력은 쇠퇴하였다.

 

루이 1세의 사망 후에 황제인 로타르는 동생인 샤를르 2세, 루이 2세와 싸웠으나 패전하여, 베르덩 조약(843)으로 제국의 영토는 완전히 삼분(三分)되었다. 로타르는 황제 칭호를 보유하는 동시에 이딸리아와 로타르 국 즉 로트린지아(로트링겐)를, 샤를르 2세는 서 프랑크를, 루이 2세(이제부터는 루트비히 2세)는 동 프랑크 왕국으로서 라인 강 동부 지방을 차지하였다.

 

이로써 통일된 카롤링거의 프랑크 제국은 붕괴되었고 봉건 제도가 탄생하였다. 870년에 샤를르 2세와 루트비히 2세는 메르센 조약에서 국경을 획정(劃定)하여 후에 독일과 프랑스 양국의 성립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에 동 프랑크의 소아왕(小兒王) 루트비히 4세의 사망(911)으로 독일지역에서는 카롤링 왕가가 단절되어 양국의 분리는 완전히 이루어졌다.)

 

그 후, 황제 칭호를 소유하고 있던 로타르의 아들인 로타르 2세(855-875)가 사망하자 황제권을 놓고 루트비히 2세와 독두왕 샤를르 2세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 이때 황제의 대관권을 행사할 수 있는 교황 요한 8세(872-882)는, 남부 이딸리아를 침략하여 교황령을 위협하는 사라센을 쳐이길 수 있는 이는 샤를르라고 판단하고,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 그를 875년 성탄축일에 황제로 대관하였다. 샤를르는 교황청의 힘있고 헌신적인 옹호자가 되었다. 그러나 서부 프랑크 왕의 자격으로는 소수의 군대밖에 갖고 있지 못하였고, 그의 제국 또한 약탈자인 노르만 족의 쉴 새 없는 공격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이딸리아를 원정하려고 결심하였을 때에는 프랑크의 귀족들이 그를 돕지 않았다. 그는 알프스 산을 넘는 도중에 사망하였다. 루트비히 2세의 아들인 카를로망이 잠시 북부 이딸리아를 통치하였고, 이때 교황은 다시 비만왕(肥滿王)이라고 불리는 동부 프랑크 왕 카알 3세의 이름으로 제국을 회복시키고자 시도하였다. 그러나 카알 3세는 나라를 비참한 운명에 처하게 만들었고, 결과적으로 제국은 내외의 파벌싸움 사이에서 분열되었다. 그는 교황 마리누스 1세(882-884)와 하드리아누스 3세(884-885)의 단명하고 소란한 재위 기간 중에 수수방관자로서 살았고, 그가 트리부르의 국회에서 해직된(887) 후에 제국은 일곱 왕국으로 나뉘어졌다.

 

교황권의 추락

 

프랑크 제국의 정치적 붕괴는 교회의 쇠퇴를 초래하였다. 교회는 880년 이후에 암흑기(暗黑期)를 맞았다. 이 시기는 1046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가 교회 개혁을 시작할 때까지 계속되었는데, 이 기간중의 교황들은 대부분 무능한 교회 지도자였다. 교황청은 주교좌는 동일한 수준으로 전락하였고, 포악한 귀족들의 정치적 투쟁의 희생물이 되었다. 이러한 교황권의 쇠퇴는 몇 가지 허황된 전설이나 불미한 사건을 유발시켰다. 13세기에 트라포의 마르트누스라는 사람은 이 시대의 교황권의 무력을 야유하기 위해서 여(女)교황 요안나의 야화(野話)를 조작하였다.

 

이 이야기에 의하면 교황 레오 4세(847-855)와 베네딕뚜스 3세(855-858)의 재위 기간 사이에, 남장을 한 마인쯔의 소녀가 아테네에서 공부를 하고 로마에 와서 교황청의 공증인이 되었다가 추기경으로 임명된 후에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2년 후에 라떼란으로 공식 행렬을 하는 도중 해산의 진통으로 교황의 신분이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중세기에는 이를 전설로 믿었으나 16세기 종교 개혁 시대에 개신교에 의해서 악용되거나 과장하여 해석되었다.

 

그러나 이 전설은 역사적으로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왜냐하면 레오 4세와 베네딕뚜스 3세의 재위 기간 사이에는 단지 2주의 공백기가 있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한편, 암흑기 초에 일어난 교황 포르모수스(891-896)의 시체 재판은 실제로 있었던 불미한 사건이었다. 당시 이딸리아에는 두 권력층 즉 스폴레토 공국(公國)의 가이와, 가린티아 공국의 아르눌프를 대표로 하는 동 프랑크의 세력이 정권장악을 위해 투쟁하였다.

 

그런데 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에 가이는 너무 가까운 곳에 위치하여 쉽게 폭군으로 변질할 수 있었고, 아르눌프는 먼 곳에 있었으나 국가의 내부문제로 너무 바빴기 때문에 교황청은 주저하고 있었다. 이때 가이가 선수를 쳐서 교황 스테파누스 5세(885-891)로 하여금 자신을 황제로 대관케 하였다(891).  스테파누스의 후계자인 포르모수스는 가이의 아들인 람베르투스를 황제로 대관하도록 압력을 받았을 때에, 교황청의 자주권이 손상될 위험을 느끼고 아르눌프에게 원조를 청하였다.

 

이 때문에 포르모수스 교황이 사망한 후, 897년에 스폴레토의 가이 가(家)가 로마를 점령하고, 교황 스테파누스 6세(896-897)에게 묻힌 지 9개월이 된 포르모수스의 시체를 발굴하여 교황복을 입혀 한 종교집회에서 악명높은 재판을 하도록 명하였다. 재판 후에 포르모수스의 시체를 발굴하여 교황복을 절단되어 로마 티베르 강에 표류되어있는 것을 본 로마 시민은 분노하여 교황 스테파누스 6세를 한 수도원에 감금하였다가 처형했다.

 

또한 10세기 초에 투스쿨룸 의 귀족인 테오필락투스의 가정이 로마에서 득세하여 교황청을 지배하였다. 테오필락투스의 아내인 테오도라, 딸인 마롯지아와 테오도라 2세가 교황을 제멋대로 임명하였다. 테오도라는 교황 세르지우스 3세(904-911)를 임명하였고, 마롯지아는 세 번씩이나 결혼하면서 그녀의 꼭두각시인 교황 레오 6세(928-929)와 스테파누스 7세(929-931)를 선임하였고 마침내는 그의 아들을 교황 요한 11세(931-936)로 임명하였다.

 

그녀는 요한 11세에 의해서 여황제로 대관되기를 꿈꾸었지만, 다른 아들 알베릭은 그의 어머니를 감금하였으며,  마롯지아는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다. 알베릭 2세는 로마 시를 통치하면서 자신을 로마 인의 왕이며 원로원이라고 자처하였다. 교황 레오 7세(936-939), 스테파누스  8세(939-942), 마리누스 2세(942-946), 아가페투스(946-955)는 이름뿐인 교회의 지도자였다. 이제 교황청은 로마 시의 의회 기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알베릭은 로마 시의 질서를 회복하였고, 성직자들이 그들의 교황 후보를 선출하는 권한을 존중하였고, 로마의 수도원들을 개혁하는 업적도 남기었다. 그의 아들 옥타비아누스는 무절제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교황 아가페투스의 사망 후에 16세의 나이로 자신을 교황으로 공표하였다. 그가 요한 12세(955-964)라는 교황명을 갖고 교황으로서 가장 악덕한 생활을 하면서 교회의 암흑기는 그 절정에 다다랐다. 이는 교회가 신인양성(神人兩性)의 특성을 지니고 있어 신적(神的)면에 있어서는 오류가  있을 수가 없지만, 인간적인 면에서는 인간의 한계성에 의해서  잘못과 죄악까지도 범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