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일 5월 25일 성 베다(Bede) St. Bede the Venerable St. Bede, Benedictine, Doctor, San Beda detto il Venerabile Sacerdote e dottore della Chiesa 신분: 신부, 교회학자, 역사가 활동연도: 672/673-735년 같은이름: 비드
성 베다(Beda)
영국 타인(Tyne) 강 남쪽 지역의 노섬브리아(Northumbria) 왕국에서 태어난 성 베다(Beda)는 7세 때 친척들에 의해 캔터베리(Canterbury) 위어머스(Wearmouth)의 성 베드로 수도원으로 보내져서, 수도원 원장인 성 베네딕투스 비스코프(Benedictus Biscop, 1월 12일)의 지도하에 교육을 받았다. 685년부터는 성 베네딕투스 비스코프가 새로 지은 재로우(Jarrow)의 성 바오로 수도원으로 옮겨 그곳의 원장인 성 체올프리두스(Ceolfridus, 9월 25일)의 지도를 받았다. 그는 성장한 뒤에 그 수도원의 수도자가 되었고, 19세에 부제품 그리고 30세에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몇 차례의 짧은 여행을 제외하고는 늘 수도원 안에서 생활하면서 주로 성경 연구에 전념했으며, 수도원 내의 교육과 저술 활동에 몸을 바쳤다.
성 베다는 일생 동안 기도하고 노동하며 단순하게 살고자 노력한 수도자였으나 그의 학문적 업적으로 유럽 전역에 널리 알려졌다. 그래서 그의 지혜와 학문을 높이 인정한다는 의미에서 '존자'(Venerable)라는 칭호를 덧붙였고, 이 칭호는 853년 아헨(Aachen)의 교회회의에서 공식화되었다. 그는 뛰어난 학자이면서도 겸손하였으며, '영국 역사의 아버지'라고도 불린다. 1899년 교황 레오 13세(Leo XIII)가 교회학자로 선언하였고, 성 보니파티우스(Bonifatius)는 성 베다를 일컬어 '성령의 빛이자 교회의 빛', '우리 스승이신 베다 존자'라고 하였다. 그는 단테(Dante)의 "신곡"(La Divina Commedia)의 '천국 편'에 등장하는 유일한 영국인이기도 하다. 비드(Bede)로도 불리는 그는 1100년 이전까지 영국 전례력에서 5월 26일에 기념되다가 1969년부터 5월 25일로 확정되어 기념되고 있다.
성 베다 사제 학자
673년 위어마우스 수도원 근교에서 태어났다. 성 베네딕도 비스코프에게 교육을 받았고 수도원에 입회한 후 사제가 되어 가르치고 저술하는데 생애를 바쳤다. 교부들의 전승을 따르고 성서를 주석하는 신학 및 역사학의 저술을 남겼다. 735년에 세상을 떠났다.
성 베다의 임종에 대한 커버스트의 편지에서 (Nn. 4-6 PL 90, 64-66)
나는 그리스도를 보고 싶습니다.
그러나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온종일 우리에게 학습을 지도하고 즐거운 표정으로 자신이 저술하려는 것을 받아쓰게 하였다. 다른 여러 가지 중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학습 과제를 지금 속히 배우십시오. 내가 얼마나 오래 살아있을지는, 잠시 후 나를 지으신 분께서 데리고 가실는지 모르니까요."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가 자신의 죽음이 언제 올지 잘 알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래서 수면도 취하지 않고 감사드리면서 그날 밤을 지새웠다. 수요일 아침이 밝아 오자 우리가 이미 시작했던 것을 지체하지 말고 끝마치라고 지시했다. 우리는 아홉시까지 그 일을 했다. 아홉시가 되자 그날 늘 하던 대로 유해 행렬을 했다. 우리 중 하나가 그의 곁에 남아 있었는데, 그는 베다 형제께" 스승님, 스승께서 받아쓰게 하신 그 책은 아직도 한 장이 더 남아 있습니다. 저희 질문에 계속 대답하시는 것은 무리가 되시겠지요?"라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펜을 뾰족하게 깎고 나서 빨리 쓰시오." 그 형제는 성인이 지시하는 대로 했다.
오후 세시가 되자 나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옷장 속에는 몇 가지 선물, 후추가루, 수건 그리고 향이 있습니다. 빨리 달려가서 우리 수도원의 사제들을 모시고 오십시오.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선물은 비록 적은 것이지만 그분들께 나누어 주고 싶습니다." 사제들이 왔을 때 모두 모아 놓고 말씀하면서 각 개인에게 자기를 위하여 미사와 기도를 바쳐 달라고 권고하며 간청했다. 그들은 기꺼이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다음 말을 하는 것을 들었을 때 모두 기뻐했다. "나를 지으신 분의 마음에 드신다면, 지금 이 시간이 내가 존재하기 전 무로부터 나를 지어내신 분께로 돌아갈 때입니다. 나는 오래 살아왔고 자비로우신 심판관께서는 내 일생을 당신 섭리로써 지켜주셨습니다. 이제 떠날 시간이 다가왔으니 내 몸이 해체되어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갈망합니다. 내 영혼은 영광 속에 나의 임금이신 그리스도를 보고 싶어 합니다." 이렇게 감화를 주는 다른 여러 가지 말씀을 하면서 저녁이 될 때까지 이날을 기쁘게 보냈다.
내가 이미 말했던 윌버트라는 젊은 형제가 다시 "스승님, 아직도 쓰지 못한 문장이 하나 남아 있습니다." 라고 말하자, 그는 " 그 문장을 빨리 쓰십시오." 라고 대답했다. 잠시 후 젊은 형제가 "이제 다 되었습니다." 라고 말하자 스승은 " 그 말이 맞습니다. 다 되었습니다. 이제 다 끝났습니다. 손으로 내 머리를 받쳐 주시오. 내 아버지께 기도할 수 있도록 내가 즐겨 기도했던 성당을 향해 기대어 앉기를 정말 원합니다." 그리고 나서 방바닥에 누워 영광송을 외우기 시작하여 "성령께"를 외울 때는 숨을 거두었다. 그가 항상 하느님을 찬미하는 데 그토록 노력한 것을 생각하면 자기가 그리워하던 천국의 기쁨으로 틀림없이 옮겨 갔다고 우리는 믿는다.
(가톨릭홈에서)
웨어마우스에서 태어난 그는 성 베네딕도 비스코프에게 교육을 받았으며 영국 쟈로우이 베네딕도 수도원에 들어가서 평생을 그곳에서 자신이 표현한대로 "신성을 찬양하고, 공부하고, 가르치기 위하여" 지냈다. 자연주의자이며 역사학자, 시인이었던 그는 또한 훌륭한 신학자였다. 간단한 설교로써 성서를 쉽고도 감동적으로 깨닫게 하였다. 그분의 시 중에서는 동정녀 성 마리아를 찬양하는 매우 아름다운 시가 몇 편 있다.
(성바오로딸수도회 홈에서)
성 베다(Bede) 교회 학자
"슬기로운 지도자들은 밝은 하늘처럼 빛날 것이며 대중을 바로 이끈 지도자들은 별처럼 길이길이 빛날 것이다.”(다니 12,3). 이 구역의 예언은 성 베다에 대해서도 적용될 것이다. 그는 베네딕토회의 수도자로서 4세기부터 5세에 걸쳐 게르만 민족이 이탈리아, 그리스 등에 침입해 찬란한 문화의 꽃을 뿌리 채 멸망시키려고 했을 때 이를 보호해 뒷날 서양 문명의 귀중한 모태가 되도록 한 것은 주로 그의 공로 덕분이라 할 것이다. 또한 그는 당시의 신학과 기타 일반 학문의 방면에 있어서도 큰 공적을 남겼다.
그는 672년 영국 웨어마우스 쟈로우의 세인트 피터와 세인트 폴 수도원 근처에서 태어나 세 살 때 이 수도원으로 보내져서 베네딕토 비스콥 원장과 체오프리드의 지도 아래 교육을 받았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베다는 매우 급속히 지식이 진보해 교사인 수사까지 놀라게 했으나 그의 경건한 신심도 이에 못지않게 뛰어나 모든 덕을 닦는데 극히 열심 했다. 이리하여 19세로서 일찍이 부제가 되고 나서 신학 연구에 전념하기 11년 만에 사제로 서품되었으나 그 뒤에도 연구를 계속해 마침내 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가 성인이라는 평판은 이미 그 수도원에서부터 영국 전토에 퍼져 주교, 국왕과 같은 권력자도 그와 교제하며 그의 예지와 덕행의 빛이 충만한 말을 듣는 것을 좋아했다. 더욱이 그의 말이 일층 더 권위를 지니게 한 것은 그의 성스러운 생활인데, 일반 사제, 수도자들도 그의 고결한 모범을 우러러보고서는 엄숙히 정장을 하고, 스스로 반성해 개과천선에 노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St. Bede, Benedictine, Doctor
성인이 무엇보다 힘을 쓴 것은 성서 지식의 보급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 보급을 위해 거의 모든 성서의 주해서를 저술했다. 또한 여력을 기울여 물리, 천문, 식물 등의 방면에서도 박학한 지식을 쌓아 많은 저서를 발간했고, 동양 문화를 서양에 소개하는 일에도 크게 공헌한 바 있었다. 이상을 보고도 알 수 있는 것처럼 베다는 직접 선교 사업으로 진리를 수많은 나라에 전한 성 보니파시오,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 프란치스코 솔라노와는 달리 주로 문필로써 사람들 사이에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려고 노력했다.
끊임없는 노고 때문이었는지 위의 질병과 호흡 곤란 등으로 고생하면서도 담당하고 있던 신학생에게 하는 강의를 중단하지 않고 공동 기도에도 출석할 뿐 아니라 한밤중에도 다윗의 시편을 외우며 주님께 기도드린 때가 많았다고 한다. 병약의 몸인 그가 주님께 불리어 그의 찬란한 공적의 보수를 받기 위해 천국으로 떠난 것은 735년 5월 26일 마침 주님 승천 축일이었다.
그는 뛰어난 학자이면서도 겸손했으며 영국사의 아버지로도 불린다. 1899년 교황 레오 13세가 교회 박사로 선언했고, 성 보니파시오는 베다를 일컬어 ‘성령의 빛이자 교회의 빛’,‘우리 스승이신 복자 베다’라 했다. 그는 단테의 천국 편에 나오는 유일한 영국인이다.
(대구대교구홈에서)
[이달의 성인] 성 베다(673-735) 윤 클레멘트 신부
영국 가톨릭교회의 사람으로서는 유일하게 ‘교회의 박사’(Doctor of the Church)로 선포된 그는 영국의 자로우(Jarrow)에서 태어나는데, 그의 거룩함으로 인하여 널리 존경받아 오고 있다. 일곱 살이 되던 해에 그는 교육을 받기 위해 자신의 부모들에 의하여 북 움브리아 지방의 위어마우드(Wearmouth)에 있는 성 베드로와 바오로 수도원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베네딕토 아빠스의 돌봄을 받으면서, 특별히 라틴어 성서교육을 받는다.
그의 태생 언어는 옛 영어였지만, 그가 공부한 책들은 라틴어 책들이었던 까닭에 그는 후일 성서를 번역하는데 기여하게 될 탁월한 라틴어 실력을 얻는다. 그는 열아홉 살이 되던 해에는 부제품을 받는데, 사제품은 서른이 되었을 때 받았다.
그는 다른 이웃 수도원들을 방문하는 일 외에는 자신의 수도원에서 대부분의 생애를 보내는데, 그의 주된 즐거움은 오로지 ‘공부하고 가르치며 글을 쓰는 것’이었다.
그의 관심들은 시대적인 어떤 탁월한 방법들과 역사적인 것들뿐만 아니라 사목적인 것들에도 많아서, 그는 매주 혹은 매일 거룩한 성체를 모시며 살아갈 수 있도록 허락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흠 없이 살아가는 많은 평신도들을 보았다. 그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기도와 마음으로 외우는 사도신경’을 알 수 있기를 바랐다.
그는 그의 시대에 가장 많이 공부한 사람으로 알려지는데, 그는 성서적이고 역사적인 탁월한 많은 책들을 썼다. 그는 자신의 생애 40년을 통하여, 요한복음을 라틴어에서 영어로 번역하였다.
그의 죽음은 자신의 학생이었고 후일 자로우의 아빠스가 되는 커드베르트(Cuthbert)에 의해 기록되는데, 그의 마지막 병고는 매우 짧았다. 그는 생의 마지막까지 가르치고 시편을 외우며 묵상하는 일로 바빴다. 예고도 없이 그에게 죽음이 가까이 오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그가 쓰던 작업을 서둘러 마무리해야 했다.
그는 마지막 쓰기가 마쳐졌을 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모든 것을 다 마쳤다.” 그 날은 승천축일이었는데, 그는 자신의 몸을 침대가 아닌 마루 바닥에 옮겨달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그가 영광송을 외우는 동안 그의 영혼은 그의 육신을 떠나 하늘로 올라갔다. 그는 어느 날 이렇게 기도하였다. “사랑이신 나의 예수님, 당신은 이 몸으로 하여금 당신 지식의 말씀들로 맛들이게 하시고 당신께 나아갈 수 있는 선물을 주셨음에 감사하나이다. 당신은 지혜의 샘이시니 이 몸 언제까지나 당신 현존 안에 살게 하소서.”
[그리스도교 영성사] 영국교회의 영성 전달수 신부(교황청립 로마 한인신학원장)
성서 주석 등 왕성한 활동 펼친‘성 베다'
한편 논쟁거리로는 63년 경 아리마테아의 요셉이 영국에 건너갔으며 브리톤의 루치우스 왕이 교황 엘레우테리오에게 선교사들을 파견해달라는 요청은 근거가 희박한 듯하다. 그러나 3세기 중엽이나 4세기초에 그리스도교인들에 대한 박해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429년 영국의 순교자로 공경받는 성 알반이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일찍부터 이 나라에도 신앙이 전파되었으며 영성적으로는 마르띠노 성인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있다. 313년 밀라노 칙령이 나온 이래 영국 교회는 안전하게 발전되었다. 314년에 열린 아를 종교회의에 주교 3명이 참석했다는 것은 이미 교계제도가 있었다는 증거이다. 4세기이래 마르띠노 성인이 파견한 수도자들이 정착한 듯하며 위대한 두 성인 빠뜨리씨오와 골룸바노의 영향은 지대하였다.
5세기에 옥세르의 제르마누가 뺄라지우스 이단 사상을 대적하라는 사명을 띠고 이 곳에 왔으며(450년경) 563년 골룸바노가 아일랜드의 수도생활에 감화를 받아 이오나에 수도원을 세워 영향력을 강화시켜 나갔다. 그 이후 교황 성 대 그레고리오가 파견한 선교사 40명이 본격적으로 이 나라에 신앙을 전파하였다. 그들 중 대표자였던 켄더베리의 아우구스띠노 주교는 1년 후 켄트의 에털버트 왕과 많은 저명 인사들을 개종시켰으나 말년에는 켈틱 민족과 앵글로-삭손 민족 사이에 일어난 불화로 인해 별로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한편 601년에 파견된 빠울리누스 주교는 625년 경 요크까지 신앙을 확대시켰고 베네딕도의 규칙서가 전달되어 많은 사람들이 이를 따라 신앙생활을 하려고 노력하였으므로 영성생활에 큰 도움을 주었다.
수도자 사제 신학자이며 교회박사 칭호를 부여받은 성 베다는 영국 요크 출신으로 훌륭한 수도자와 학자로 이름이 높으며 많은 제자들을 길러낸 뛰어난 스승으로 큰 존경을 받고 있다. 그는 열성을 다해 가르쳤고 거룩한 삶을 살았다. 그의 제자들은 모두 라틴어로 교육을 받았고 교리를 단순하게 표현한 영성으로 양성되었다.
성인은 청년들과 성직자들에게 유익한 저술 활동을 통하여 교회에 활력소를 주었으며 제자로서 요크의 대주교가 된 에그버트에게 보낸 서신에서 사목생활을 위한 지침서를 제시하였고 교회의 제도와 수도원 제도에 도입된 악습들에 대해 올바른 견해를 밝힘으로써 영국 교회의 영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의 저술 활동은 문법, 작시법, 연대기, 역사, 시, 성서 주석 등 다방면에 걸쳐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특히 성인의 대작 교회사는 매우 귀중한 역사적 자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도 중요하지만 신학적 통찰을 준다는 의미에서도 대단히 유명하다.
[가톨릭신문, 2001년 8월 19일]
St. Bede’s Tomb Photo ⓒ The Dean and Chapter, Durham Cathedr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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