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일 5월 25일 성 그레고리오 7세(Gregory VII) St. GregoriusⅦ / Saint GREGORY VII Pope St. Gregory VII St. Gregory VII (Hildebrand), OSB Pope (RM) San Gregorio VII Papa 신분: 교황 활동연도: 1022/1025-1085년 같은이름: 그레고리, 그레고리우스
교황 성 그레고리오 7세(Gregorius VII)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Toscana)의 소아나(Soana) 태생인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또는 그레고리오)는 힐데브란트(Hildebrand)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어린 시절 로마(Roma)로 가서 삼촌이 원장으로 있던 아벤티노(Aventino)의 성 마리아 수도원에서 성장하였다. 그는 라테라노(Laterano) 학교에서 지오반니 그라시아노의 문하생으로 공부하였는데, 그의 스승이 후일 그레고리우스 6세 교황(1045-1046년)이 되었을 때 교황 비서로 임명되었다.
그는 1073년에 알렉산데르 2세(Alexander II) 교황이 서거한 뒤 제157대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성직매매의 죄를 들어서 밀라노(Milano)의 대주교를 면직하면서부터 교회 규율을 바로잡고 개혁을 추진했으며, 1075년 이전 해에 열린 로마 회의의 교령을 재확인하는 동시에 평신도의 성직 임명을 금지하는 교령을 반포하였다. 그의 재임 기간 중에 복잡한 사건들도 많았으나 교회가 크게 부흥한 것 또한 사실이다. 그는 개혁 운동을 통해 교회의 자율성을 회복하고 교황권을 크게 확립한 교황으로 손꼽힌다.
그러나 동방 교회와 로마 교회 간의 일치에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황제와의 대립으로 이탈리아 남부 살레르노(Salerno)까지 피신했던 성 그레고리오 7세는 그곳에서 선종하였다. 그는 1584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8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728년 교황 베네딕투스 13세(Benedictus XI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성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의 편지에서 (Ep. 64 extra Registrum: PL 148, 709- 710)
자유롭고 정결하며 보편적인 교회
그러나 옛 원수는 이 모든 것을 싫어하기에 모든 것을 전복시키고자 교회의 지체들인 우리를 거슬러 무장했습니다. 이 원수는 콘스탄티누스 대제 때부터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큰 피해를 우리에게, 특히 사도좌에 입혔습니다. 진정코 그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세월이 더 지나면 지날수록 그 옛 원수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말살하려고 더욱더 광분합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우리가 여러분에게 말하는 것을 귀담아들어 주십시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고 진실로 그리스도교 신앙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전세계 누구라도 사도들의 으뜸이신 성 베드로가 모든 그리스도인의 아버지이며 그리스도 다음의 첫 목자라는 것과 거룩한 로마 교회가 모든 교회들의 어머니요 스승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또 믿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믿고 또 흔들림 없이 지지한다면, 여러분의 형제요 자격 없는 스승인 나는 전능하신 하느님의 사랑으로 청하고 명하니, 여러분이 이들을 통하여 모든 죄의 사함과 현세와 내세의 축복과 은총을 얻고자 한다면, 위에서 말한 여러분의 아버지와 여러분의 어머니를 도와주고 구출하십시오.
모든 선의 원천이신 전능하신 하느님께 여러분의 정신을 언제나 비추어 주시고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열매를 맺게 해주시어, 여러분이 변함없는 헌신으로써 위에서 말한 여러분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여러분에게 빚진 분들로 만들고 부끄럼이 없이 그분들과 친교를 이루게 되기를 빕니다. 아멘. (가톨릭홈에서)
그레고리오 개혁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본명이 힐데브란트(Hildebrand, 1020/25-1085)로서 그레고리오 6세(재위1045-1046)의 자문위원으로 임명되었다가 로마 교회의 암흑기 말(1046)에 교황과 함께 쾰른으로 축출되었다. 그는 클뤼니 수도원에 머물며 엄격한 수도생활 가운데 클뤼니 개혁을 체득하였다. 1049년 새로 선출된 교황 레오9세(재위1049-1054)의 요청으로 로마에 돌아온 그는 차부제품을 받고, 교황청의 재정 관리인과 로마 성 바울로 수도원의 원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1073년 교황에 선출되어 개혁을 통한 교권 확장에 나섰다.
그레고리오 개혁은 그의 정치적 성향으로 클뤼니 개혁과는 달랐다. 클뤼니 개혁에서 교회의 자유는 세속 군주와 주교들의 외부 압력과 침해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했다. 그러나 그레고리오 개혁은 황제나 귀족들을 통해 또는 성직매매의 방법으로 주교와 수도원장이 임명되던 제도를 공격하였다. 즉 그레고리오 7세의 주요 과제는 성직매매와 평신도(황제)의 성직(주교직) 서임권(敍任權)에 투쟁하는 것이었다.
서임권 문제에 있어서 그레고리오 7세는 황제를 교회에 복종해야 하는 평신도로 보았고, 인간에게 있서 영혼이 육신 위에 위치하듯이 그리스도교 제국에 있어서 교회와 교황은 국가와 황제에 우선한다는 신학적 주장을 내세웠다. 1075년 교황은 그레고리오 개혁의 지침서가 된 27개 항묵의 ’교황의 훈령’(Dictatus Papae)을 선표하였다. 교황은 이 훈령에서 교황의 수위권과 무류권을 강조하였다. (세계교회사에서)
성 그레고리오 7세 교황
그레고리오는 희랍어로 ’파수하다’ 또는 ’지키다’란 뜻이다. 10세기와 11세기 전반기는 교회의 암흑기였는데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교황권이 몇몇 로마 가문의 꼭두각시 노릇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049년에 개혁가인 교황 레오 9세가 선출되자 사태는 변하기 시작했다. 그는 젊은 수사인 힐데브란드를 로마로 불러서 교황의 고문 겸 중요한 사명을 담당할 특사로 임명했다. 그가 바로 그레고리오 7세이다.
그 당시 세 가지 악습이 교회를 휩쓸고 있었다. 성직이나 성물을 사고 파는 성직 매매, 성직자의 불법 결혼, 왕과 귀족들이 교회의 성직자 임명을 통제하는 평신도 서임권 등이 문제였다. 이 모든 악습에 대하여 힐데브란드는 개혁의 초점을 잡았는데 처음에는 교황의 고문으로서, 다음에는(1073-1085) 교황이 되어 스스로 개혁해 나갔다.
그리스도교의 역사에서 이정표가 되는 그레고리오 개혁은 이 세상 통치자의 부당한 간섭에서 온 교회를 구하고 교황권을 보호하고자 애를 쓴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의 이름을 딴 것이다. 그레고리오 교황은 특정한 지역의 불건전한 국가주의적 교회에 대항하여 그리스도께 기초를 둔 온 교회의 일치를 주장했고 로마의 주교가 성베드로의 후계자임을 강조했다.
그레고리오 교황은 사회적 또는 민족적 종교가 미묘한 요구를 해오고 있는 우리 시대에 하실 말씀이 많을 것이다. "모든 나라에서는 가장 가난한 여인이라도 그 나라의 법률에 따라서 그리고 또 자신의 선택에 따라서 합당한 남편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악한 사람들의 욕구나 악한 행실에 의하여 하느님의 배필이고 우리 모두의 어머니인 거룩한 교회는 하느님의 율법과 자기 자신의 뜻에 따라서 지상의 배우자를 정당하게 지키는 것이 용납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성그레고리오 7세,’신자들에 대한 호소’)
- 성 바오로수도회 홈에서 -
’그레고리오 개혁’ 영권(靈權)의 우위 확립
교황직은 그레고리오 대교황 때(590-604) 세계적 지배자로 부각되었으나 그 후로는 11세기 초까지 침체와 쇠퇴를 면하지 못했다. 그간 니콜라오 1세(858-867)를 제외하면 별로 뛰어난 교황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카롤링 왕조가 멸망하자 교황직은 강력한 황제들의 후견을 받지 못함으로써 무방비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이때 교황직은 로마 귀족들의 파벌 싸움의 노리개가 되어, 점차 그 보편성을 잃고 일개의 평범한 교구로 전락했다. 후세의 역사가는 이 시기를 ’암흑의 세기’로 부르게 되었는데 그것은 카롤링 왕조가 멸망한 880년부터 교회가 자율을 되찾으려고 자각하기 시작하는 1046년까지 계속되었다. 여교황 요한나도 실은 이런 암흑세기와 관련되어 만들어진 전설이다.
1046년부터 국가의 간섭으로부터 교회의 자주와 자유를 수호하려는 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먼저 수도회에서 시작되었다. 그것은 수도원과 수도생활을 주교나 제후들의 부당한 압력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운동이었으니, 클뤼니 수도회가 이 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했다.
수도회에서 일어나 교회 개혁운동은 곧 교황청으로 파급되어, 이른바 그레고리오 개혁을 낳게 했다. 그레고리오 개혁이란 성 그레고리오 7세(1073-1085)의 교황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실제로 그는 교황이 되기전 클뤼니 수도회의 수도자로 있을 때부터 이 운동을 주로 했었다. 그에게는 국왕도 단순한 평신도였고 그래서 교회에 순종해야 했다. 그래서 그레고리오 개혁은 교회를 세속의 권세가들의 간섭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을 최고의 목적으로 삼았다. 그레고리오는 교황이 된 후 그의 유명한 ’교황령’에서 이러한 원칙을 이론화했다. ’교황령’에 의하면 교황은 그리스도교 세계 최고의 권위자이다.
그는 모든 주교들의 권리에 간섭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요, 또한 영적인 최고권의 소유자로서 제왕들보다 높고, 따라서 종교적원리적 견지에서 필요한 때엔 제왕을 파면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독일황제 하인리히 4세는 도리어 영권을 구속하려 했다. 그는 왕인 동시에 사제임을 부인했다. 속권과 영권을 둘러싸고 이와 같이 대립된 견해는 대결하지 않을 수 없었고, 결국 그것은 속인에 의한 성직서임의 폐단을 제거하려는 소위 임직권(任職權) 논쟁에서 구체화되었으며 카노사에서 결판을 내리게 되었다.
성그레고리오 7세는 하인리히 4세가 밀라노 주교 선거에 간섭하려 하자, 임직권을 엄금하고 그것을 어길 경우 파문도 불사할 것을 선언했다. 하인리히는 교황의 그러한 선언에 개의하지 않을뿐더러 교황의 폐위를 선언했다. 교황은 하인리히에게 파문으로 응수했다. 어떻게 판결이 날것인가. 온 세계가 숨을 죽였다. 상황은 하인리히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독일 제후들은 하인리히편을 들지 않았고, 만일 1년 이내에 교황으로부터 파문의 해제를 받지 못하면 새 왕을 선출할 것을 선고했다.
하인리히는 하는 수 없이 교황을 찾아 가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로마로 가려면 알프스를 넘어야 했고, 거기서는 하인리히를 반대하는 제후들이 있어서, 알프스를 쉽게 넘을 수가 없었다. 부득이 하인리히는 가족을 이끌고 에페닌 산맥의 북쪽에 있는 카노사 성으로 갔다. 그 때가 1077년 1월 아주 추운 겨울이었다. 여기서 하인리히 황제는 참회자로서 참회복을 입고 그레고리오 교황에게 사죄를 간청하게 되었다.
하인리히는 패배했다. 그레고리오가 강자임이 드러났다. 속권이 영권에 굴복함으로써 서구 세계의 헤게모니가 황제에게서 교황한테로 넘어갔다. 독일 왕권은 소위 ’카노사의 굴욕’으로 앞으로 재가가 거의 불가능한 정도로 심한 타격을 받았다. 이처럼 카노사의 사건은 세계적인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그 후 모든 제왕들에게 굴욕적인 상징으로 남게 되었다. 1872년 문화투쟁의 주인공인 비스 마르크는 독일의회에서 교황과의 문제가 나오자 "우리는 카노사로 가지는 않을 것이다"고 선고함으로써 의원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고 한다.
성 그레고리오 7세 교황과 하인리히 4세 황제와의 관계는 곧 다시 악화되었다. 그레고리오는 다시 하인리히를 파문하고 폐위시켰다. 하인리히는 대립교황을 세움으로써 그레고리오에게 응수할뿐더러, 직접 로마 공격에 나섰다. 그레고리오 교황은 부득이 이탈리아 남쪽으로 피신했다. 그는 거기서 1085년 5월에 사망했다. 그는 죽으면서 "나는 정의를 사랑하고 불의를 미워했다. 이로 인해 나는 귀양살이에서 죽는다."는 마지막 말은 남겼다고 한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확실하다. 이 말은 시편(44)에 나오는 말이다.
그레고리오는 시편의 ’이로 말미암아 하느님은 너를 기쁨의 기름으로 발랐다’는 말을 ’이로 말미암아 나는 귀양살이에서 죽는다.’는 말로 바꾸었을 뿐이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이 말을 패배자의 표현으로 해석했다. 즉 하느님이 의로운 그레고리오에게 그의 공적으로 보답하기를 거절했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는 그 해석을 다르게 하고 있다.
즉 그 말은 오히려 그레고리오의 순교자적 고백을 나타낸 것으로서, 세상이 하느님의 사자인 그레고리오를 유배시킴으로써, 세상이 하느님이 주신 구원을 배척했음을 입증하는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의 죽음은 패배 같이 보였으나 실제로는 승리였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성 그레고리오 7세(Gregory VII)
우리 주 예수께서 성 베드로와 그의 후계자들에 대해 "잘 들어라. 너는 베드로(반석)이다.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 (마태 16,18)라고 말씀하신 예언은 우리를 속이지 않는다.
외부로부터의 압박과 박해, 내부에서의 분쟁과 소란도 없지는 않았지만 많은 폭풍우 속에서도 로마의 성좌는 천고의 바위와 같이 높고 뚜렷하게 솟아 있어 그 위에 서있는 교회를 태산과 같이 안전하게 지탱했다.
그 뿐 아니라 하느님께서는 교회라는 작은 배가 큰 파도에 휩쓸려 금방이라도 침몰될 위기에 처할 것 같으며 반드시 훌륭한 분을 선두에 내세워 교회를 위험에서 하셨다. 여기에 수록할 성 그레고리오 7세도 교회의 위기에 하느님께 특별히 선택되신 위대한 교황 중의 한 분이셨다.
힐데브란트(그레고리오 7세 교황의 전 이름)는 1020년에서 1025년 사이에 이탈리아 토스카니아 지방 소아나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가정은 가난했지만 본당 사제가 그의 영리함을 보고 로마에 유학시켜 고등교육을 받게 했다. 그 후 수도 생활을 시작했고 클뤼니 수도원과도 연관이 있는 듯하다.
1045년, 가르침을 받은 바 있는 은사 그레고리오 6세 교황에게 초청되어 로마에 갔다. 그레고리오 6세 교황은 이듬해 세상을 떠났으나 그 뒤 5대에 걸친 교황들에게 봉사하며 로마에서 중책을 맡았다.
성 레오 9세 교황은 그의 열렬한 신앙심을 인정해 그에게 로마의 한 베네딕토 수도원의 개혁을 의뢰했다. 그 회 수사들은 사기가 퇴폐되고 수도 생활의 열심도 놀랄 만큼 식어져 있었다. 그레고리오는 늘어진 인심을 가다듬고 그들의 열심을 일으키기 위해 말보다는 실천으로 모범을 보여 예상외로 빠리 수도회를 쇄신 할 수 있었다. 이 비상한 수완은 그가 나중에 행한 바 있는 전 교회에 걸친 혁혁한 혁신의 성공을 미리 약속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성 레오 9세 교황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어 두거나 침상 밑에 두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누구나 등경 위에 얹어 놓아 방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그 빛을 볼 수 있게 할 것이다"(루가 8, 16-17)하신 성서 말씀대로 이처럼 훌륭한 그레고리오를 추기경에 오르게 하고, 프랑스 주재 교황 사절로 임명했다. 그 후 그레고리오는 독일의 교황 사절이 되어 황제 하일히 4세와 여러 가지 절충에 노력했는데 언제든지 그의 직무에 대한 감탄할 만한 열심과 출중한 인격 등은 만족한 결과를 가져오곤 했다.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1073년 알렉산데르 2세 교황이 서거하자 추기경, 주교 사이에, 평신도 등 모든 방면의 삶들에게 교황 취임을 의뢰받게 된 것도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전승에 의하면 고화의 장례식을 마친 후 어떤 사람이 "힐데브란트 경이야 말로 베드로의 성좌에 오르실 부니다"라고 절규하자 모든 사람이 이에 합해 폭풍우와 같이 환호하며 그레고리오를 들고 교황의 옥좌에까지 모시고 갔다 한다. 여기에서 그는 이것이 하느님의 성의라는 것을 깨닫고 이 중책을 받아들여 기뻐하기보다는 오히려 책임의 중대함을 통감하고 하느님의 도우심을 청했다 한다.
당시 교회 내에는 슬프게도 성직 매매의 폐풍이 유행하고 있었고, 성직자의 타락도 우려할 만한 것이어서 단호히 개혁하지 않으면 전 교회를 부패의 병독(病毒)에서 구할 수 없으리라고 평소부터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감된 일이지만 독일 황제 하인리히 4세도 성직 매매에 관계가 있었으므로 전대의 교황에게 파문당한 일도 있었다. 그래서 그레고리오는 등극 후 바로 로마에서 열린 공의회에서 위와 같은 폐단의 방지책으로 새로이 엄중한 규칙을 정하고 많은 회칙을 교회의 각 지방에 보내 이를 개혁하는 데 힘썼다.
오랜 인습에 젖은 성직자들 중에는 그레고리오 7세의 개혁을 좋아하지 않고 그의 훈계를 따라가지 않는 자도 있었다. 독일 황제 하인리히 4세는 1075년 이와 같은 불만의 주교들을 모아놓고 보름스에서 회의를 열어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의 폐위를 기도하고 무례한 결의문을 그에게 보냈다.
그는 우리 주 예수와 같이 진심으로 원수들을 용서할 뿐만 아니라 곁에 있던 로마 귀족이 분개해 결의문을 가지고 온 사신을 죽이려고 했을 때도 그를 보호해 주기까지 했다. 그러나 교회 질서를 어지럽힌 황제 등을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없었으므로 그는 눈물을 머금고 그들을 파문했다.
하인리히 4세 황제는 크게 분노하며 우트레히트의 주교에게 그를 살해하라고 했다. 그러나 바로 그 시각부터 주교좌성당이 벼락을 맞아 전기가 끊기는 등 천벌이라고 할 만한 여러 가지 불행이 닥쳤고, 독일 국민은 황제를 배반해 하인리히는 곤궁에 빠졌다. 그래서 할 수없이 독일의 제후들의 트리부르 회의에 참석한 교황을 카노사(Canossa)성에서 방문하고 자기 죄의 용서를 청해 겨우 파문은 벗어났으나 진심으로 회개한 것은 아니었다.
하인리히 4세는 다시 포악한 태도로 교황을 괴롭혀 다시 한 번 파문을 내리자 그는 교황에 대해 갖은 욕설을 퍼부었을 뿐만 아니라 군대를 인솔하고 이탈리아에 침입해 로마를 포위하고 교황을 포로로 삼으려고 해서 교황은 할 수 없이 살레르노(Salerno)로 피신했다.
그곳에서 교황은 병을 얻어 1085년 5월 25일 귀양살이와 같은 적적한 생애였지만 주님과 함께 살았던 자로서의 고요한 최후를 맞았다. 전설에 의하면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은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이 몸은 정의를 사랑했다. 그랬던 만큼 추방되어 이 유배지에서 죽는 것이다."
(대구대교구홈에서)
[역사속의 그리스도인] 교황편 - 그레고리오 7세
강력한 개혁 추진 교황권 강화 시민들의 환호 속에 교황으로 옹립 성직매매.성직자 결혼 등 금지시켜
10세기에서부터 11세기 초반에 이르기까지는 그야말로 교회의 암흑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교황권이 몇몇 로마 가문의 꼭두각시 노릇을 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교황 니콜라오 1세(858~867)가 세상을 떠난 뒤 레오 9세가 등장하기까지의 근 200여년간은 교황권이 극도로 쇠약해진 시기였다. 754년에 교황청과 동맹을 맺은 후 로마 교회의 보호자가 된 카롤링거의 프랑크 왕국이 국력이 약화되면서 로마를 둘러싸고 있던 정치 세력들이 교황청을 지배하게 됐다.
유력한 가문들이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로마교회를 지배하게 됐고 이들은 자신들의 측근들을 교황으로 선임하고 나중에는 자기 가문에서 교황 요한 11세(931~935)와 요한 12세(955~963)를 선출해 교황직을 장악했다.
요한 12세가 동프랑크 삭소니아의 왕 오토 1세(936~973)로부터 군사적 지원을 받은 것을 계기로 그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축성했지만 오토 1세는 오히려 요한 12세를 폐위하고 자기 측근을 레오 8세 교황으로 임명했다. 게다가 그는 황제의 동의 없이 교황을 선출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로마인들에게 강요했다. 이후 황제들은 그들의 임의대로 교황을 임명하기 시작했고 로마 교회는 정통 교황과 대립 교황의 등장으로 혼란의 시기를 겪다가 1046년에 이르러서야 분규를 해결할 수 있었다.
교황 레오 9세(1049~1954)는 즉위하자마자 교회 회의를 소집해 성직 매매로 인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마침내 힐데브란트(Hilderbrand)를 포함한 탁월한 인물들을 교황청에 불러들여 그들의 자문을 들었다. 그가 바로 나중에 교황으로 선출돼 평신도, 즉 세속 군주들의 성직 서임을 금지함으로써 서구 그리스도교를 개혁한 「그레고리오 개혁」의 주인공인 그레고리오 7세였다.
제157대 교황(1073~1085)으로 선출된 그레고리오 7세는 토스카나 지방의 소아나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로마로 간 그는 아벤티노의 성 마리아 수도원의 원장이었던 삼촌 밑에서 생활하면서 후일 교황 그레고리오 6세(1045~1046)가 된 지오반니 그라시아노를 스승으로 교육을 받았다. 그는 그레고리오 6세 교황의 비서로 임명됐는데, 1046년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3세가 교황청 분규를 해결하기 위해 그레고리오 6세를 폐위했을 때 교황을 수행해 퀼른으로 갔으나 이듬해 그레고리오 6세는 세상을 떠났다.
1049년 레오 9세 교황이 즉위하자 그는 다시 로마로 불려와 차부제품을 받고 교회의 재정을 맡는 한편 성 바오로 수도원의 원장으로 임명돼 수도회 개혁을 추진하게 된다. 이후 그는 5명의 역대 교황들의 고문과 특사로 교황권을 수호하기 위한 개혁 정책을 추진했다.
1059년 교황 니콜라오 2세(1058~ 1061)에 의해 로마 교회의 대부제로 임명된 그는 1073년 교황 알렉산데르 2세가 서거한 뒤 교황 선출권을 갖고 있던 주교 계층 추기경들이 아니라 시민과 성직자들의 환호 속에 교황으로 옹립됐다. 그해 6월 29일 교황으로 즉위한 그는 이미 자신이 전임 교황들을 도와 추진하고 있었던 교회 개혁 조치들을 자신의 주요한 임무로 여기고 재위 기간 동안 이를 본격 추진했다. 그 첫 조치로서 즉위 이듬해인 1074년, 로마회의에서 성직 매매와 성직자의 결혼에 대한 금령을 다시 공포하고 다음해에 이 교령을 재확인하는 한편 평신도의 성직 서임을 금하는 교령을 반포했다.
그레고리오 7세는 교황만이 정당하고, 교회의 주인이며, 새로운 법령을 제정하고, 주교를 폐하거나 복직시킬 권한을 갖는다는 입장을 명백하게 밝혔다. 또 세속과의 관계에서도 교황은 황제를 폐위할 자격을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교회와 세계의 주인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당연히 서임권 문제를 둘러싸고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갈등을 빚게 됐다. 성직자 계층이 왕권의 지배 하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것은 국가의 권력과 사회 구조를 뒤흔드는 중대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평신도 성직 서임에 대한 금령은 주교를 임명하던 황제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이었다. 그레고리오 7세의 이러한 견해에 저항한 것이 바로 하인리히 4세였다. 그는 교황의 금령에도 불구하고 주교와 수도원장에 대한 서임권을 계속 행사했다. 결국 1075년 12월 그레고리오 7세는 황제에게 엄중한 경고 편지를 보냈고 황제는 보름스 회의를 개최해 그레고리오 7세에 대한 폐위를 선언했다.
교황은 이에 대응해 황제를 파면, 파문했으며 신성로마제국의 제후들은 1076년 10월 황제에게 1년 이내에 교황의 파문 취소를 받지 못하면 새 황제를 선출하겠다는 최후 통첩을 보냈다. 결국 하인리히 4세는 카노사에서 사흘 동안 교황에게 파문의 해제를 간청했다. 이로써 그레고리오 7세는 성직 서임권 논쟁에서 승리하고 황제권은 치명타를 입었으며 서구 세계의 주도권은 황제에게서 교황에게 넘어가게 됐다.
하지만 하인리히 4세는 또다시 로마를 침공했고 이후 계속된 갈등 끝에 교황은 1085년 남이탈리아의 살레르노로 피신했다가 그곳에서 세상을 떠나게 됐다. 유배지에서 맞은 죽음은 그를 패배자로 보이게 했지만 뒤를 이은 교황들이 속권에 대한 투쟁을 계속해 그가 추진한 개혁들을 성취함으로써 결국 그는 승리자로 남았다. 11세기 중반에서 12세기로 이어진 「그레고리오 개혁」은, 비록 그레고리오 7세가 그 주창자나 완성자는 아닐지라도 교황권의 확립에 크게 기여한 업적으로 인해 그의 이름이 붙여졌다.
[가톨릭신문, 2004년 2월 8일, 박영호 기자]
[그리스도교 영성사] 혼란과 개혁시대에 일어난 영성 - 그레고리오 개혁 전달수 신부(교황청립 로마 한인신학원장)
그레고리오 개혁이란 제 157대 교황 성 그레고리오 7세가 행한 제도적인 개혁을 말한다.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한 교황 친히 어느 정도의 중앙집중화 내지 교황권에 대한 순종의 필요성을 강조한 정책인데 정치적인 색채가 농후하나 이론적인 위상을 부여하고 제도적으로 개혁을 추진했다는 점에서는 대단히 중요하다.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은 이탈리아의 토스카니아 지방 소아나에서 1020년 경 출생한 힐데브란트이다. 젊을 때 수도생활을 하였고 교황청과 연관을 맺어 1046년 교황 그레고리오 6세가 귀양 갈 때 동행하였으며 원래 클뤼니 수도원과 연관이 있는 듯하다. 후에 교황청에서 근무하면서 재무 담당관과 로마 성 밖 사도 성 바오로 대성전 수도원의 원장으로 임명되면서 두드러진 활동을 하게 되었다. 교황 사절로도 파견되어 뚜르 지방 공의회를 주관하기도 하고 교황청의 일을 하다가 1073년 만장일치로 교황이 되어 개혁에 착수하게 되었다.
성직 매매와 성직자들의 혼인과 평신도의 서임을 금하는 칙령을 발표하였다. 교황 사절들을 파견하여 이를 감독하고 불순종하는 이들에게는 성무 정지를 내렸다. 이 때부터 교황 사절들의 역할이 중요하게 대두되었다. 그리고 왕과 황실이 주교들을 서임하여 직책과 은전을 베풀던 관행들을 쇄신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사방에서 문제가 일어났다.
가장 심한 마찰을 빚은 나라는 독일이었다. 왜냐하면 독일과 교황청은 여러 면에 있어서 상호 밀접한 연관성을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마찰은 전임 교황이 하인리히 4세의 고문 5명을 파문했을 때부터 일어나기 시작했다. 또한 큰 교구인 밀라노의 교구장이 공석이었을 때 황제는 황실과 가까운 자를 임명하였으나 빠따리노들(그 당시 이탈리아 북구지방에서 교회의 쇄신을 주장하던 이들이었으나 지나쳤기 때문에 문제가 있었다)은 교황청과 가까운 지원자를 추천하였다.
이 내용은 독일 제국의 전복을 의미하였다. 제국의 기반이 흔들릴 정도로 심각해진 것이다. 황제 하인리히 4세는 이에 굴하지 않고 1076년 1월 말 보름스에서 교회 회의를 소집하여 교황 반대 운동을 전개하여 주교 26명의 서명을 받아 교황을 규탄하고 폐위시키기로 결정하였다. 그러자 교황은 그 해 사순절에 황제를 파문하면서 모든 권한을 박탈시키고 신하들에게는 황제에게 충성할 의무가 없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황제는 폐위되지 않았다. 그는 교황을 지지하던 주교들과 수도원장들의 직위를 해임시켰다.
그러나 독일의 제후들은 황제가 1년 내에 교황에게 파문을 취소해 주도록 간청하거나 아니면 자기들이 힘을 모아 새 황제를 뽑을 움직임을 보이자 황제는 1076~77년 겨울 소수의 수행원을 대동하고 교황이 잠시 머물고 있던 알프스의 아펜닌 산맥의 북쪽 카놋사에 가서 회개의 옷을 입고 성문 앞에서 3일간을 기다렸다(유명한 카놋사의 굴욕 사건). 황제는 독일 제후들의 분쟁에 있어서 교황의 중재적 판결에 따른다는 조건으로 교황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를 받아 권한의 일부를 회복할 수 있었으나 황제의 권위와 독일 제국의 위세는 무너지고 말았다.
황제는 복수심으로 불타고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독일의 제후들이 1077년 3월 교황의 승인 없이 슈바벤의 루돌프를 독일의 황제로 선출하자 문제가 생겨 3년간 격렬한 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이 내란을 중재하기 위해 교황은 '대화'를 발표하여 양측의 분쟁을 제거하려 했으나 실패하자 1080년 사순절에 하인리히 4세를 재차 파문하여 그를 독일과 이탈리아의 황제에서 폐위시키고 제후들이 선출한 슈바벤의 로돌프를 독일의 합법적인 황제로 승인하였다. 이리하여 유럽의 실권은 독일의 황제에게서 교황으로 넘어갔다.
그러자 황제 하인리히 4세는 대립교황 클레멘스 3세를 세운 후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격해 들어가자 교황은 천사의 성으로 피신하였다. 다시 살레르노로 피신하여 노르만인들의 보호를 받다가 세상을 떠났다.
교황은 하인리히 4세에게 패한 것처럼 보였으나 그리스도교의 뿌리가 내린 유럽의 최고 통치자와 목자로 활동하면서 교회의 쇄신을 제도적으로 수행한 훌륭한 교황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개혁 의지는 후대 교황들(빅토리오 3세와 우르바노 2세 등)에 의해 보다 알차게 열매 맺을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었다. 교황 바오로 5세는 1606년 그레고리오 7세를 성인품에 올렸다.
[가톨릭신문, 2002년 3월 1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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