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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축일 & 성인

축일 5월 29일 성녀 우르술라 레도호프스카 / 1865-1939년

by 파스칼바이런 2012. 9. 5.

축일 5월 29일 성녀 우르술라 레도호프스카

(St. Ursula Ledochowska)

M. Orsola (Giulia) Ledóchowska (1865-1939)

18 MAY 2003, Saint Peter's Square

신분 설립자, 수녀원장

활동연도 1865-1939년

같은이름 레도호브스카, 마리아, 메리, 미리암, 오르솔라,

우루술라, 우르슐라, 우술라, 율리아, 줄리아, 쥴리아

 

 

성녀 우르술라 레도호프스카(Ursula Ledochowska)

 

성녀 우르술라 레도호프스카는 1865년 4월 17일 오스트리아(Austria)의 저(低) 오스트리아(Lower Austria) 주(洲)의 루스도르프(Loosdorf)에서 폴란드 출신 귀족인 안토니 레도호프스카(Antoni Ledochowski) 백작과 스위스 태생으로 살리스(Salis)의 명문가 출신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율리아 마리아 레도호프스카(Julia Maria Ledochowska)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가문 출신 중에는 유럽과 교회의 역사와 관련된 많은 정치인과 군인,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있었다. 그녀는 사랑 가득하고 독실한 집안에서 다섯 형제자매와 함께 성장했는데, 마리아 우르술라를 포함한 세 명이 봉헌생활을 선택하였다. 마리아 테레사(Maria Teresa)는 후에 성 베드로 클라베르의 수녀회(Society of St. Peter Claver)를 설립하였고, 1975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다. 남동생인 블라디미로(Vladimiro)는 후에 예수회의 총장신부가 되었다.

 

1874년 그녀의 가족은 재정적인 어려움에 직면해 장크트푈텐(Sankt Polten)으로 이주하였고, 그곳에서 율리아 마리아와 그녀의 자매는 메리 워드(Mary Ward) 수녀가 설립한 수도회에서 운영하는 문법학교를 다녔다. 1883년 그녀의 가족은 다시 폴란드(Poland) 동남부 타르누프(Tarnow) 인근 리프니카 무로바나(Lipnica Murowana)에 있는 레도호프스카 백작 가문의 영지로 이사를 했다. 1885년 2월 아버지가 천연두로 사망하자 그녀의 삼촌인 레도호프스카 추기경이 가족들을 돌보게 되었다.

 

수도 성소를 느낀 율리아 마리아는 1886년 8월 18일 크라쿠프(Krakow)에 있는 우르술라회에 입회하여 수련기를 마치고 서원을 발하면서 ‘예수의 마리아 우르술라’라는 수도명을 선택했다. 마리아 우르술라는 크라쿠프의 수녀원에서 21년을 살았으며 1904년에는 원장수녀로 선출되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 안에서 그녀의 교육적인 재능과 감각은 사회적 · 정치적 · 윤리적 상황의 변화에 놓인 젊은이들의 요구를 향하고 있었다. 비로소 여성들에게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졌을 때 그녀는 폴란드에 여학생들을 위한 첫 번째 기숙학교를 성공적으로 조직하여 여학생들에게 공부와 생활에 전념할 수 있는 안전한 장소를 제공하고 또한 충실한 종교적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마리아 우르술라 수녀의 이러한 열정은 교황 비오 10세(Pius X)의 축복과 함께 교회에 대한 반감이 심했던 러시아의 중심으로 진출할 힘을 주었다. 수도복이 아닌 평상복을 입고 당시 수도생활이 금지되어 있는 페테르부르크(Petersburg)의 수녀원을 향해 떠날 때, 그녀는 자신이 미지의 목적지를 향하고 있으며 성령께서 그녀가 알지 못하는 길로 인도하고 계심을 잘 알지 못했다. 페테르부르크의 우르술라회 수녀들은 우르술라 원장수녀와 함께 비밀리에 생활하며, 비밀경찰의 지속적인 감시에도 불구하고 열성적으로 교육과 종교적 사업을 펼쳐 나갔다. 그러면서 폴란드와 러시아의 관계가 개선되기를 희망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마리아 우르술라는 러시아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스톡홀름(Stockholm)으로 향했고,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스웨덴 · 덴마크 · 노르웨이를 두루 다니며 교육 활동뿐만 아니라 전쟁 희생자들과 교회일치 사업을 돕기 위한 지역교회의 활동에도 주의를 기울였다. 그러면서 그녀가 활동하던 수녀회는 정치적, 종교적으로 다른 성향을 지닌 사람들의 상호이해를 위한 좋은 예가 되었다. 그녀의 모국에 대한 강한 사랑은 다양성 안에서 다른 나라에 대한 관용과 다르지 않았다. 한번은 그녀의 정치적 성향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그녀는 즉시 ‘나의 정책은 사랑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1920년 마리아 우르술라 수녀는 자신의 사명과 뜻을 같이하는 40여 명의 수녀들과 많은 이민자 가정의 고아들과 함께 폴란드로 돌아왔다. 그리고 교황청의 승인을 받아 사도직 본부를 통고의 예수 성심의 우르술라회(Ursulines of the Sacred Agonising Heart of Jesus)라는 자치 수도회 성격으로 변경하여 설립하였다. 새 수도회의 영성은 그리스도의 구속적 사랑에 대한 관상과 교육 사업을 통한 사명 수행 그리고 인생의 의미를 찾는 고통 받고 외롭고 소외된 이들을 위해 특별히 봉사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모든 것 위에 하느님을 두고 사랑하며 모든 사람과 피조물 안에서 하느님을 찾도록 수녀들을 교육하였다. 또한 그녀는 자신의 미소와 영혼의 감수성을 통해 그리스도와의 개인적 유대를 이루었고, 복음화와 교육 활동의 효과적인 도구가 될 수 있는 듬직한 증거로서 자신을 제시하였다. 그녀의 겸손과 수용력은 평범한 매일의 일상을 성덕을 향한 특별한 길로 살아갈 수 있는 분명한 모범이 되었다.

 

그녀의 수도회는 빠르게 발전하였다. 폴란드와 가난하고 다국적이며 다종교적인 동쪽 국경 지역에 우르술라회 공동체들이 설립하였다. 1928년에는 로마(Roma)로 진출하여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한 소녀들을 위한 기숙학교를 포함한 수도회 센터를 설립하였다. 이를 통해 가난한 소녀들에게 교회와 유럽 문명의 중심에서 영성적 · 종교적 풍요로움과 접촉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수녀들은 또한 로마 외곽의 가난한 지역에서도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1930년에는 30여 명의 수녀들을 프랑스로 파견하여 소녀들을 위한 일을 찾고 수녀원을 설립하도록 하였다. 그녀는 가난한 지역의 마을에 교리교육과 활동을 위한 수녀들을 파견했고, 어린이와 젊은이들을 위한 책과 논문도 작성했다. 그러면서 어린이들과 젊은이들과 여성들을 위한 교회 조직을 설립하고 유지해 나갔다.

 

교회와 국가의 생활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교회와 국가 모두로부터 큰 인정과 훈장을 받았던 마리아 우르술라 수녀는 1939년 5월 29일 로마의 수녀원에서 그녀의 고되고 싶지 않았던 삶을 마감하였다. 그녀가 선종하자 많은 사람들은 그녀가 성인으로서 죽었다며 애도의 뜻을 표했다. 그녀는 1983년 6월 20일 폴란드 서부의 포즈나뉴(Poznan)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9년 5월 29일에는 그녀의 유해를 폴란드의 수녀회 본원으로 옮겨 모셨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2003년 5월 18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그녀를 성인품에 올렸다. 그녀는 마리아 우르슐라 레도호프스카(Maria Urszula Ledochowska), 마리아 오르솔라 레도호프스카(Maria Orsola Ledochowska), 우르술라 율리아 레도호프스카(Ursula Julia Ledochowska) 등으로도 불리며, 5월 26일에 축일을 기념하기도 한다.

 


 

 

"교황님 생신 축하합니다"

18일로 83살...1년 전보다 휠씬 건강, 복자 4위 시성식 주재

 

[바티칸시티=CNS]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83세 생일인 18일 교황청 성 베드로 대광장에서 그리스도의 성혈흠숭수녀회 창설자 마리아 데 마티아스 수녀를 비롯한 복자 4위를 성인품에 올리는 시성식을 주재했다.

 

교회 역사상 네번째로 오랜 재임기간을 기록하고 있는 교황은 이날 5만여명이 운집한 가운데 시성식을 주재한 후 "하느님께서 내게 맡기신 사명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고 요청했다.시성식에 앞서 추기경단 수석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이 대표로 교황의 83세 생일을 축하하는 메시지를 낭독했으며, 시성식에 참석한 수많은 인파가 '생신을 축하드립니다"를 외쳤다. 특히 교황의 이메일(John_Paul_II@vatican.va)로 개설 이래 가장 많은 수천명의 사람들이 축하메시지를 보내왔다. 교황은 이에 앞서 17일 로마의 라 사피엔자 대학으로부터 명예박사학위를 수여받았다.

 

파킨슨씨병을 앓고 있는 교황은 1년 전보다 훨씬 건강한 모습으로 특수 제작된 휠체어에 앉아 2시간이 넘는 시성식을 집전했으며, 4위의 시성을 선포할 때의 목소리도 또렷했다. 이날 시성된 성인은 17세기 이탈리아 출신의 비르지니아 첸투리오네 브라첼리 수녀, 19세기 이탈리아 출신으로 그리스도 성혈흠숭수녀회 창립자 마리아 데 마티아스 수녀, 19세기 폴란드 출신의 요제프 세바스티안 펠차르 주교, 20세기 초의 폴란드 출신의 우르술라 레도호브스카 수녀다.  [평화신문, 2003년 5월 25일]

 


 

 

 

교황 83번째 생일에 4명 성인품, 10월 16일 재위 25주년 은경축

 

[바티칸=외신종합]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83번째 생일을 맞은 5월 18일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시성식을 거행하고 4명을 새로 성인품에 올렸다. 교황은 5만여명의 순례자와 신자들이 운집한 가운데 거행된 이날 시성식에 휠체어를 타고 입장해 2시간 반에 걸친 시성식 내내 건강한 모습을 보였다. 교황은 특히 깃발을 흔들며 교황의 생일을 축하하는 노래와 환호를 보내는 신자들을 향해 자신을 위해 기도해 줄 것을 요청했으며 교황청 신앙교리성 장관인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은 라틴어로 교황의 생일을 축하하는 간단한 메시지를 낭독했다.

 

교황청 주교성 장관 조반니 바티스타 레 추기경은 교황이 파킨슨병에도 불구하고 왕성한 활동을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기도의 힘이라고 말했다. 지난 4월 24일로 역사상 네 번째로 오랫 동안 교황직에 머무는 기록을 남긴 요한 바오로 2세는 6월 크로아티아 방문으로 100번째 해외 순방을 기록하고 10월 16일에는 재위 25주년 은경축을 기념한다.

 

교황은 이미 470명의 성인을 탄생시켜 역사상 가장 많은 성인을 배출했으며 1316명의 복자를 탄생시켰다. 이날 탄생한 새 성인은 19세기 그리스도의 성혈흠숭수녀회 설립자 마리아 마틸다 데 마티아스를 비롯해 비르지니아 첸투리오네 브라첼리, 요제프 세바스티안 펠차르 주교, 우르술라 레도호프스카 등 4명이다. [가톨릭신문, 2003년 5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