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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축일 & 성인

축일 6월 22일 성 요한 피셔(John Fisher) / 로체스터(Rochester)

by 파스칼바이런 2012. 9. 15.

축일 6월 22일 성 요한 피셔(John Fisher)

ST. JOHN FISHER

St. Joannes Fisher. E. M

San Giovanni Fisher Vescovo e martire

신분: 추기경, 순교자 / 활동지역: 로체스터(Rochester)

활동연도: 1469-1535년

같은이름: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이반,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지오반니, 한스, 후안

 

 

로체스터의 성 요한 피셔(Joannes Fisher)

 

1469년 영국 요크셔(Yorkshire)의 베벌리(Beverly)에서 어느 포목상의 아들로 태어난 성 요한 피셔(Joannes Fisher)는 1483년 케임브리지의 성 미카엘 신학교에 입학하였는데, 그의 재능이 매우 뛰어나서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고 자랐다. 그래서 그는 1491년 불과 22세의 나이로 특별 관면을 받은 후 사제로 서품되었다. 1497년 그는 국왕의 모친인 마가렛 보퍼드(Margaret Beaufort)의 고해신부로 활약하는 한편, 그녀를 설득하여 케임브리지에 그리스도 신학교를 설립하고 1505년 학장으로 임명되었다. 1504년 케임브리지 성 미카엘 신학교의 총장이 된 그는 같은 해에 로체스터의 주교가 되었다.

 

그런데 헨리 7세와 헨리 8세의 혼란한 정치 풍토 속에서 헨리 8세 왕이 교황으로부터 영국 교회를 분리하고 수장령을 반포했을 때 그는 용감하게 이런 말을 하였다. "나는 그리스도의 법을 계속하여 따르겠습니다." 친구와 적들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양심을 끝까지 지켰다. 토마스 크롬웰(Thomas Cromwell)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글도 남아 있다. "나는 다른 어떤 사람의 양심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결국 그는 1534년 4월 고령에도 불구하고 수장령에 대한 서약을 거부하고 성 토마스 모어(Thomas More, 6월 22일)와 함께 반역 죄인으로 런던 탑에 감금되었다.

 

한편 교황 바오로 3세(Paulus III)가 성 요한 피셔 주교를 구하기 위해 그를 추기경으로 임명하였으나, 오히려 헨리 8세의 분노를 사 반역죄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결국 그는 1535년 6월 22일 마지막으로 '테 데움'(Te Deum)을 노래하고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는 1886년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35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요한 피셔 주교 순교자

 

요한 피셔는 보통 에라스무스, 토마스 모어, 그리고 다른 문예 부흥기의 인문주의자들과 함께 언급된다. 따라서 그의 생애는 일부 성인들의 생애와 마찬가지로 겉보기에도 그리 단순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 당시의 지성인들이나 정치가들과 교제한 학자였다. 그는 당시의 문화에 관심을 가졌으며 나중에는 케임브리지 대학의 총장이 되었다.

 

그는 35세에 로체스터의 주교가 되었으며 그의 특별한 관심 중의 하나는 영국의 설교 수준을 높이는 것이었다. 피셔 자신은 완벽한 설교가였고 저술가였다. 참회 시편에 관한 그의 설교는 그가 죽기 전에 일곱 번이나 재판에 회부되었다. 루터파의 등장과 더불어 그는 이단과의 논쟁에 휩싸였다.

 

그가  이단을 반박하기 위해 쓴 8권의 책은 그로 하여금 유럽 신학자들 사이에서 지도적인 위치를 갖게 해주었다. 1527년에 그는 헨리 8세와의 이혼과 재혼을 반대하고 그리고 후에는 헨리 8세가 영국 교회의 최고 책임자라는 주장을 거부함으로써 헨리8세의 분노를 샀다.

 

그를 제거하기 위한 첫 시도로 헨리 8세는 켄트의 수녀인 엘리사벳 바튼의 "계시"를 모두 보고하지 않았다고 그를 고발하였다. 몹시 허약해진 그는 새로운 계승 문서에 서약하도록 소환되었다. 그와 토마스 모어는, 이 문서와 다른 내용들이 헨리 8세의 이혼이 합법적이라는 것과 헨리 8세가 영국 교회의 우두머리라는 주장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이 서약을 거부했다.

 

그들은 런던탑으로 보내졌고 피셔는 그곳에서 재판도 받지 않고 14개월 동안 감금되어 있었다.  그들은 결국 종신형을 언도받고 재산을 몰수당했다. 이 두 사람은 더 많은 심문에 소환되었으나 계속 침묵을 지켰다. 피셔는 한 사람의 사제로서 사적인 이야기를 해야 하는 계교에 직면하기도 했으나 왕은 영국 교회의 최고 책임자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교황이 옥중의 피셔를 추기경으로 임명하자 더욱 화가 난 왕은 그를 반역죄로 재판에 부쳤다. 그는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되었으며 그의 몸은 하루 종일 처형대에 뉘어 있었고 그의 머리는 런던 다리에 매달려 있었다. 토마스 모어는 그로부터 2주일 후에 처형되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과 사제들이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요한 피셔는 주교로서 자기 소명에 충실했으며 교회의 가르침을 철저하게 고수하였다. 그가 순교한 이유는 바로 로마 교황청에 대한 그의 충성심 때문이었다. 그는 그 시대의 문화적 계몽 단체나 정치적 갈등을 일으키는 문제에 모두 참여하였다. 이러한 참여는 그로 하여금 그 나라 지도자의 윤리적 행동에 의문을 제기하게 했다.

 

"인간의 기본 권리나 인류의 구원 그 자체에 필요하다면 교회가 사회적, 국가적, 국제적 차원에서 정의를 선포하고 불의한 일들을 고발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며 또한 의무이기도 하다," (1971년 세계 주교 대의원회의 "세상에서의 정의")

 

에라스무스는 요한 피셔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그는 정직한 생활, 뛰어난 학문, 위대한 영혼에 관한 한 이 시대의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인물이다."

(성바오로수도회 홈에서)

 


 

 

 

로체스터의 성 요한 피셔(Joannes Fisher)

 

성인도 다수 배출하고 원래는 가톨릭 국가 중에서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영국이 16세기에 이르러 한 국왕의 실수로 이단의 도가니로 휩쓸려 들어가게 된 것은 참으로 유감스럽지만, 그때 그리스도교의 주교, 사제, 수도자 평신도 모든 계급에서 왕의 무지한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훌륭히 신앙을 관철해 용감한 순교자를 많이 나게 한 것은 매우 기쁜 일이라 하겠다. 성 요한 피셔도 역시 그러한 사람 중의 한 분이었다.

 

그는 1469년 요크샤 주의 베라리이 마을에서 태어나 유명한 케임브리지 대학에 입학해 신학을 배워 1501년 박사 학위를 획득하고 그 즉시 그 대학 주사(主事)로 뽑혔다. 그는 한편 사제가 되어 많은 사람들과 특히 상류의 인사들에게 사랑을 받았으며 헨리 7세 왕의 고문으로 취임해 달라는 요청을 받을 정도로 신임을 받고 있었다. 그의 직무에 대한 열의에는 황태후도 매우 감동되어 이에 보답하는 뜻으로 케임브리지 대학에 2학부를 증설할 비용과 수많은 학생에 대한 보조비 등을 하사할 정도였다.

 

그리고 국왕은 또한 그의 공로를 생각해 1504년 로체스터의 주교좌를 그에게 주셨던 것이다.  헨리 8세가 즉위했는데, 그도 자녀가 부모를 따르듯이 피셔를 경애하며 "유럽이 넓다 해도 우리 로체스터 주교처럼 학덕 겸비한 위대한 인물은 다른 데에는 없다"고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있었다고 한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이라 부르며 가톨릭 전래의 교회와 성사 등을 다수 폐지하자, 헨리 8세는 호교의 펜을 들어 "일곱의 거룩한 성사"라는 서적을 저술했는데, 이에도 주로 피셔 주교의 권고와 조력이 큰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처럼 교회를 위해 진력한 헨리 8세가 돌연 마음이 변해 교회를 배반하게 된 이유는 누구나가 다 아는 바와 같이 안나 보레인이라 하는 궁녀에 대한 사욕(邪慾)에서 발단한 것이었다.  왕은 그 여자와 결혼하기 위해 왕후 가타리나와의 결혼이 무효였다는 것을 피셔 주교나 토마스 모어 재상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했으나 이 두 사람은 모두 정의에 강한 분이었으므로 왕의 부정한 요구를 거절하고 성심성의로 그에게 간(諫)했다.

 

그러나 사욕에 눈이 어두워진 왕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두 사람을 미워하며 드디어 그들을 런던탑의 감옥에 가두고 말았던 것이다. 그때 이미 67세의 고령에 달했던 피셔는 옥중의 고통을 인내하기를 1년, 체력이 몹시 쇠약해져 재판 받으러 나갈 때에도 걸을 수가 없어 테임즈 강 위를 배로 운반하지 않으면 안 될 처지였다. 그러나 정신은 조금도 쇠퇴하지 않고 고난이 심하면 심할수록 그만큼 마음에는 열렬한 신앙의 뜨거운 불이 타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죄목은 국왕에 대한 배반이란 것이었다. 재판관이 "그대는 그 죄를 인정하는가?"하고 물으니 피셔는 정색을 하고 나서서 "나는 반성을 해 보아도 국왕에게 대해 불경한 행동을 한 기억은 없습니다"하고 명백히 단언하며 일일이 논고를 변박했다. 그런데 그를 사형에 처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결정되어 있었다. 재판은 다만 형식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피셔의 변론이 모두 정당함에도 불구하고 무서운 사형의 선고는 드디어 그에게 내려진 것이다.

 

사형 집행의 명령은 1535년 6월 21일이 밤에 내렸으나 다음 날 아침 5시에야 비로소 그 뜻을 전하였던바 피셔는 태연한 태도로 "그렇소, 고맙구려"하고 대답하고는 집행의 시간이 오전 9시라는 것을 듣자 "그러면 아직 두 시간 가량 더 쉬게 해 주시오"하고 말하면서 다시 침상에 누웠다.

 

일곱 시에 눈을 뜨자 주교는 몸에 걸치고 있던 고복을 호화스러운 의복으로 갈아입고 형리가 오기를 기다리다가 관리들이 모시러 오자, 그는 성호를 긋고, 복음 성서를 들고 서서히 감옥을 나왔다.

 

사형장에 가는 도중 그 성서를 펼쳐 보니, 눈에 띈 것은 "영원한 생명은 곧 참되시고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요한 17, 3)라는 한 구절이었다. 그는 그것이 얼마나 자기의 현 처지에 적합한 말씀인가 생각하며 무척 기뻐했다고 한다.

 

노(老)주교께서 사형대에 서게 되자 형 집행인은 옆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청했다. 이에 대해 그는 온순한 말로 대답하는 것이었다. "형제여, 나는 진심으로 당신을 용서합니다. 나는 죽음을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으니 결코 근심을 말아주시오"라고.

 

그리고 나서 피셔는 단(壇)위에서 그의 덕을 사모하는 모든 사람들을 향해 최후의 설교를 하려고 했다. 그러나 국왕이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 함을 듣고 나서는 다만 자기가 신심을 위하여 죽는다는 취지만을 간단히 말하고 조국과 국왕을 위해 기도를 바치고 군중에게 고별인사를 하고 나서 소리높이 떼 데움을 읊고 "주여, 우리는 당신을 신뢰하오니 영원히 멸망치 말게 하소서" 하고 기도를 마치자 하늘을 우러러보며 팔을 벌리고 이어 참수 순교했다. 때는 1535년 6월 22일 이었다.

 

피셔 주교는 감옥에 감금되어 있는 동안 바오로 3세에 의해 로마 교회의 추기경으로 임명되었다. 그 후 요한 피셔는 토마스 모어와 함께 1886년 12월 20일 시복되고, 1934년의 성령 강림 축일에 시성되어 영원한 영광을 획득하게 되었다.

(대구대교구 홈에서)

 


 

 

 

[성인들의 발자취] 성 요한 피셔

 헨리 8세의 이혼에 극구 반대하고 나서

성 토마스 모어와 함께 순교 - 축일은 6월 22일

 

성 요한 피셔는 1469년 영국 요크셔州 '베벌리'에서 한 직물상의 아들로 태어났다. 명문 캠브리지 대학교에 입학하여 박사 학위를 획득한 요한 피셔는 1504년 '로체스터'의 주교로 임명됐다. 같은 해 캠브리지 대학교 명예 총장에 선출된 요한 피셔는 헨리 8세의 총애를 받던 중 왕비 까타리나와 이혼문제가 발생하자 왕비의 입장을 옹호하고 나서 이혼의 부당함을 강력히 주장했다.

 

토마스 모어 재상과 함께 헨리 8세의 눈밖에 난 요한 피셔는 법정에서조차 결혼은 절대로 풀 수 없다고 주장하며 세례자 요한처럼 기꺼이 죽을 용의가 있다고 선언해 재판에 참석했던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런던탑에서 1년 간의 옥고를 치른 후 1535년 6월 17일 교회의 수장이 되려는 국왕에 대한 반역죄를 선고받은 요한 피셔는 마침내 참수형을 당했다. 런던 브리지에 내걸린 요한 피셔의 머리가 생전의 모습과 같이 살아 있는 듯 하여 사람들의 주목을 끌자 왕은 그의 머리를 템즈 강물에 던져버렸다.

 

한편 성 토마스 모어도 요한 피셔가 순교한 지 몇 주일 후 역시 순교하였는데 두 사람의 시신은 런던탑 근처에 있는 성 베드로 아드 빈쿨라 성당 안에 나란히 안장되었다. 성 요한 피셔는 성 토마스 모어와 함께 1882년 12월 20일 시복된 후 1935년 시성되었다. 영국 교회가 로마 교회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저지하려다 순교한 성 요한 피셔의 축일은 6월 22일이다. 

[가톨릭신문, 1982년 6월 27일]

 


 

 

 

[금주의 성인] 성 요한 피셔(St. John Fisher)

가톨릭 교회 정통 지킨 수호자...영국 국교회 세운 헨리 8세에 맞서, 학문 발전에도 기여

 

 

1469~1535. 영국 요크셔 출생. 추기경. 순교자.

 

성 요한 피셔는 영국 교회가 가톨릭 교회와 분리되면서 희생된 인물입니다. 영국왕 헨리 8세는 아내인 캐서린과 이혼하고 궁녀 앤 불린과 결혼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로마 교황은 가톨릭 교회법에 따라 헨리 8세의 이혼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헨리 8세는 가톨릭 교회에 결별을 선언하고 스스로 영국 교회를 설립해 자신이 수장에 오릅니다.

 

성인은 헨리 8세의 이혼과 영국교회 설립에 적극 반대했습니다. 그는 왕비 캐서린에게 신임받는 성직자로서 캐서린의 지지자였습니다. 그는 헨리 8세가 반포한 수장령을 따르지 않아 반역죄인으로 런던탑에 감금됩니다.

 

성인은 이같은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리기 전 로체스터교구 주교로서 헌신적으로 양떼를 돌보는 사목자였고 또 켐브리지대 신학대와 퀸즈대 총장을 역임했던 뛰어난 학자였습니다. 성인은 주교 시절 사제들에게 강론과 설교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사제들이 유럽에 불어닥친 종교개혁 바람에 맞서 명쾌한 논리를 갖출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 역시 루터파의 종교개혁 주장을 반박하며 가톨릭 교회의 위상을 지키는 데 힘을 쏟았습니다.

 

또 학자로서 인문학에 심취했던 그는 총장시절 대학에 그리스어과를 신설하고 당대 최고 인문학자인 에라스무스를 교수로 영입하는 등 학문발전에도 큰 기여를 했습니다. 그는 교회 안팎에서 존경받는 어른으로 헨리 8세에게도 큰 신임을 얻었지만 이혼 사건을 계기로 적대적 관계가 됐습니다.

 

그가 런던탑에 감금됐을 때는 67살이었습니다. 14개월 간 옥살이로 몸은 쇠약해졌지만 가톨릭 교회 정통을 고수하는 고집만큼은 더욱 강건해졌습니다. 로마 교황은 성인을 구하기 위해 옥중에 있는 성인을 추기경으로 임명합니다. 그러나 이런 조치는 오히려 헨리 8세의 분노를 사는 역효과를 낳았고 추기경으로 임명된 지 한달도 채 못돼 사형되고 맙니다. 그날 성인과 함께 단두대에 오른 이는 영국 재상이자 훗날 성인품에 오른 토머스 모어입니다.

 

그는 1935년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성됐습니다. 영국 성공회도 그를 성인으로 추대하고 있는데 축일은 7월 6일입니다.

 

[평화신문, 2010년 6월 20일, 박수정 기자]

 


 

 

성 토마스 모어(Thomas More)와 로체스터의 성 요한 피셔(Joannes Fisher, 우)

 

성 요한 피셔 주교와 성 토마스 모어 순교자

  

요한 피셔는 1469년에 태어났다. 영국의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사제로 서품되었다. 로체스터의 주교로 임명되어 엄격한 생활을 했고 탁월한 사목자가 되어 신자들을 자주 방문했다. 그 시대의 오류를 반대하는 저서를 남겼다.

 

토마스 모어는 1477년에 태어났다. 옥스포드 대학에서 수학한 후 결혼하여 아들 하나와 딸 셋을 두었다. 영국의 재상으로서 현실 정치와 신앙 옹호에 관한 훌륭한 저술들을 남겼다.

 

이 두 분은 헨리 8세의 이혼을 반대하다가 왕의 명령으로 1535년 참수형에 처해졌다. 요한 피셔 주교는 6월 22일, 그리고 토마스 모어는 7월 6일에 참수형을 받았다. 피셔 주교는 감옥에 감금되어 있는 동안 바오로 3세에 의해 로마 교회의 추기경으로 임명되었다.

 


 

 

 

 

 

 


 

성화속의 성 요한 피셔(John Fish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