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가톨릭 관련>/◆ 103위 성인들

성녀 김 데레사(金 Teresa)

by 파스칼바이런 2012. 9. 27.

성녀 김 데레사(金 Teresa)

 축일 9월 20일

 

성녀 김 데레사(Teresia, 탁희성 비오 작)

 

신      분: 과부, 순교자

활동지역: 한국(Korea)

활동연도: 1797-1840년

같은이름: 김 테레사, 김데레사, 김테레사, 데레사, 테레사 

 

성녀 김 테레사(Teresia, 또는 데레사)는 충청도 면천 고을에 살던 김대건 신부의 당고모이다. 그녀의 조부 김진후 비오(Pius)는 1814년에 해미에서 순교했고, 부친인 김종한 안드레아(Andreas, 또는 김한현 안드레아)는 1816년에 대구에서 순교했던 순교자의 후손이다. 그러므로 박해를 피하여 이리저리 피해 다녔기에 그녀가 어디서 태어났는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고 한다. 어쨌든 그녀는 단아하고 자선심이 많은 처녀였다. 열일곱 살이 되어서 손연욱 요셉에게 출가하였는데, 단란한 생활 가운데서 여러 자녀를 낳아 모두 하느님을 경외하도록 교육을 시켰다.

 

그러던 중 1824년에 남편이 체포되어 해미 감옥에서 순교하자, 계속해서 정절을 지킴으로 모범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가난으로 인하여 당하는 고통으로 만족하지 않고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에 단식을 할 정도로 고행에 전심하였다. 당시 유방제(劉方濟, 파치피코)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게 되자 신부의 처소를 보살필 사람을 구하였는데 김 테레사가 적임자로 뽑혀 정정혜 엘리사벳과 함께 이를 기쁘게 받아들여 열심히 일하였다.

 

유 신부가 조선을 떠난 후 김 테레사는 앵베르 주교의 처소를 보살피는 사람으로 일하던 중 박해가 일어났다. 그녀는 위험이 닥쳐왔을 때에도 피신하지 않고 있다가, 여러 신자들과 함께 7월 19일에 붙잡혀 오라로 결박을 당한 채 옥에 갇혔다. 김 테레사는 옥에서 고문과 갖가지 괴로움을 당하였지만, 배교하거나 신자들을 고발하거나 선교사들의 피난처를 말하지 않았으며, 더욱이 태형 300대의 고통을 꿋꿋한 자세로 참아 받았다.

 

김 테레사는 여섯 달 동안이나 옥중에서 고초를 겪은 후, 마침내 교수형의 선고를 받았다.

형리들은 그녀의 목에 끈을 감고 양쪽에서 오랫동안 잡아 당겨 끈의 양쪽 끝을 말뚝에 단단히 감아놓았다. 이리하여 김 테레사는 44세를 일기로 순교의 영광을 차지하였으니, 때는 1840년 1월 9일이었다. 그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녀 김 데레사(1797-1840, 과부, 기해박해 때 교수)

 

김 데레사는 1816년 대구에서 순교한 김종한(金宗漢)의 딸로 충청도 솔뫼에서 태어났으며 김대건의 당고모가 된다. 17세 때 교우인 손연욱(요셉)과 결혼했으나, 1824년 남편이 해미(海美)에서 순교하자 혼자 살면서 가난한 생활에서 오는 고통 중에서도 매주 두 차례의 대재를 지키는 등 신앙생활에 전념했다.

 

정정혜 엘리사벳과 함께 유방제 신부와 범 라우렌시오 주교의 살림을 돌보던 중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김 데레사는 7월 11일 범 주교의 집에서 정하상 바오로 일가와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주교의 은신처를 알아내려는 형리들에게 여러 차례의 혹형과 고문을 받았으나 김 데레사는 순교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신앙을 본받아 꿋꿋이 참아내고, 포청옥에서 만난 이광헌(아우구스티노)의 딸 이 아가타와 함께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신앙을 굳게 지켰다. 6개월 동안 6차례의 신문을 받고, 태장 280도를 맞은 김 데레사는 드디어 1840년 1월 9일 포청에서 이 아가타와 함께 44세의 나이로 교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성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부의 당고모

성 정하상(丁夏祥) 바오로, 성녀 유소사(柳召史) 체칠리아, 성녀 정정혜(丁情惠) 엘리사벳과 함께 체포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