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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103위 성인들

성녀 김 루치아(金 Lucy)

by 파스칼바이런 2012. 9. 27.

 성녀 김 루치아(Lucia)

 축일 9월 20일

 

 성녀 김 루치아(Lucia, 탁희성 비오 작)

 

 

신      분: 과부, 순교자

활동지역: 한국(Korea)

활동연도: 1769-1839년

같은이름: 김 루시아, 김루시아, 김루치아, 루시아, 루치아, 루키아

 

성녀 김 루치아(Lucia)는 교우들 사이에 꼽추 루치아로 통하였다. 아마도 그녀는 어릴 때부터 불구였을 것이다. 또 그녀는 태중 교우라고 하지만 장성한 뒤에는 외교인에게 출가하였다. 그런데 그 외교인 남편은 다른 교우와의 상종을 막고, 또 교우의 본분을 지키는 것을 방해하였다. 이 때문에 루치아는 오랫동안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다가 더 이상 견딜 수가 없게 되자, 그녀는 남편을 버리고 여러 교우 집으로 피해 다녔다. 교우들은 루치아를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루치아는 집안일을 도와주고 아이들과 병자와 허약자를 돌보며 그 은혜에 보답하고 자기의 열성으로 사람들을 감화시켜 모든 사람들의 모범이 되었다.

 

그녀는 비록 무식한 부인이었지만 천주를 전심으로 사랑하고 영혼 구하기에 열중하여 여러 외교인을 입교시키기도 하였다. 그녀가 갖고 있는 신앙의 논리와 대답은 상식이 풍부하고 독특한 것이었는데, 한 번은 어떤 양반 외교인이 "지옥이 그렇게 좁다고 하니 어떻게 사람을 그리 많이 집어넣을 수 있을꼬?" 하며 빈정댔던 것이다. 그러자 루치아는 "당신의 그 작은 마음이 비록 만권 서적을 품고 있어도 그것 때문에 좁다고 생각하신 적은 한 번도 없지요"라고 대답하였다. 이 말을 들은 그 양반은 대답할 말이 없어, "천주교인들은 무식한 사람도 모두 조리 있는 말을 한단 말이야" 하며 크게 감탄했다.

 

김 루치아는 71세 되던 기해년 4월 중순에 잡혀 옥으로 끌려갔다. 옥중에서도 그녀는 병자를 도와주며, 얼마 안 되는 자기 돈을 그들에게 나누어 주며 애덕을 실천했다. 포장이 교우들의 이름과 주소를 대라고 하자, 그녀는 아무 말도 할 마음이 없고 죽기로 작정하였노라고 말할 따름이었다. 얼마 후 루치아는 태형 30도를 맞았는데, 매가 그녀의 마른 몸에 닿자 마치 뼈를 때리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고 한다. 이 형벌을 받은 후 옥에 들어오자마자 기진하여 쓰러져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였다. 그리고 며칠 후 함께 갇혀 있던 여교우들의 간호를 받으면서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71세의 고령으로 운명하였다. 그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녀 김 루치아(1818-1839)

  

동정녀인 동시에 순교자인 김 루치아는 강원도 강촌(江村)에서 태어나 9세 때 어머니로부터 천주교를 배워 입교하였다. 14세 때 수정(守貞)을 결심했고, 부모를 여읜 후로는 자신을 받아주는 교우들의 집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살았다. 1839년 기해박해 때에는 서울의 이매임의 집에서 이매임, 이정희와 영희 자매, 김성임 등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 이때 남명혁과 이광헌의 어린 자녀들이 고문과 혹형을 이겨내고 신앙을 지켰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함께 살고 있는 여인들과 함께 순교를 결심하고 4월 11일 남명혁의 집을 파수하던 포졸들에게 묵주를 내보이며 자헌했다.

 

포청과 형조에서 김 루치아는 천진한 태도와 한결같은 신앙으로 모든 형벌과 고문과 유혹을 참아냈고, 교리에 대한 심문 중에도 기막힌 비유와 논리정연한 대답으로 형관을 감동시켰다. 드디어 7월 20일 7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22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성녀 김성임(金成任) 마르타, 성녀 이매임(李梅任) 데레사, 성녀 이영희(李英喜) 막달레나, 성녀 이정희(李貞喜) 바르바라, 성녀 허계임(許季任) 막달레나와 함께 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