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가톨릭 관련>/◆ 103위 성인들

성녀 김누시아 루치아(金累時阿 Lucy)

by 파스칼바이런 2012. 9. 27.

성녀 김누시아 루치아(金累時阿 Lucy)

 축일 9월 20일

 

성녀 김 누시아 루치아(金累時阿 Lucia, 탁희성 비오 작)

 

 

신      분: 동정 순교자

활동지역: 한국(Korea)

활동연도: 1818-1839년

같은이름: 김 누시아, 김 루시아, 김 루치아, 김루시아, 김루치아, 루시아, 루치아

 

성녀 김 누시아 루치아(Lucia)는 한강 근처에 살던 어느 양반 집에서 태어났다. 원래 교우였으므로 교리를 익혔고 수계생활도 하였는데, 재주와 용모가 뛰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일찍이 부친이 돌아가시고 성교회를 가르치신 어머니마저 잃고 나자, 얼마 아니 되는 가산을 팔아 장례를 치르고, 함께 자수하고 순교한 이 테레사(Teresia)의 집에 모두 6명의 여인들이 머물면서 덕을 쌓았다고 한다. 여기서 루치아는 동정을 지킬 결심을 아주 굳히게 되었다.

 

1839년 4월 11일 루치아는 이 테레사, 이 막달레나(Magdalena), 김 마르타(Martha)와 함께 자수했다. 아직 나이 어린 김 루치아는 천진한 태도와 고문을 받는 중에도 한결같은 마음을 보임으로써 6명의 여인 중에 특히 포장의 마음을 끌었다. 판관과 루치아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대화가 있었다.

 

"너는 훌륭한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참으로 그 교를 믿을 수 있느냐?" "예, 저는 진정으로 이 교를 믿습니다." "교를 버려라. 그러면 네 목숨을 살려주마." "저희들이 믿는 천주는 세상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는 분이시니 모든 피조물의 큰 임금이시고 아버지이신 분을 어찌 배반하겠습니까? 만 번 죽어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누구에게서 교를 배웠고 몇 살부터 믿었으며 공범은 몇이나 되느냐? 어째서 시집을 안 갔느냐? 영혼은 무엇이냐? 죽기가 무섭지 않으냐?"

 

"아홉 살 적부터 어머니 곁에서 천주교를 배웠습니다. 그러나 천주교에서는 어떤 사람을 막론하고 남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엄금하기 때문에 저와 같이 천주교를 믿는 사람은 하나도 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제 겨우 20세밖에 안되었으니 시집을 아직 가지 않은 것이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처녀의 몸으로 혼인 문제에 대하여 대답한다는 것은 온당치 못하니 여기에 대해서는 더 이상 묻지 말아주십시오. 또 영혼은 육체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신령한 실체입니다. 저도 죽기는 무섭습니다. 그러나 제가 살려면 천주를 배반하라고 하시니 죽음을 두려워하면서도 죽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네가 말하는 영혼은 어디에 있단 말이냐?" "영혼은 육체 안에 있습니다." "너는 천주를 보았느냐?" "시골에 사는 백성들이 임금님을 뵈옵지 않고서는 임금님이 계신 것을 믿을 수 없습니까? 하늘과 땅과 모든 피조물을 보고 저는 그것들을 창조하신 대왕과 가장 높으신 아버지를 믿는 것입니다." "오, 네 말이 옳기는 하다. 그러나 네가 상감과 대신들보다 많이 안단 말이냐?" "저희들의 종교는 하도 아름답고 참된 것이어서 상감과 대신들이 연구하려 하신다면 기꺼이 믿게 되실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포장이 처음에 부드러운 말로, 다음에는 위협하는 자세로그녀의 신앙심을 꺾어 보려고 오랫동안 노력하였으나, 창피만 당하였으므로 다시 모든 온갖 고문을 시켰다고 한다. 이윽고 그녀는 사형선고를 받자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지금까지 천주의 은혜로 형벌과 고통 가운데서도 굴하지 아니하고 결국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천주께서 언제 나를 부르실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를 위하여 천주께 기도하고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나의 뒤를 따르시오. 나는 다만 천주의 부르심을 기다릴 뿐입니다."

 

1839년 7월 20일 루치아는 다른 교우들과 함께 서소문 밖에 끌려 나가 참수당하여 순교하니, 이때 그녀의 나이는 22세였다. 그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녀 김 루치아(1769-1839, 과부, 기해박해 때 옥사)

 

김 루치아는 서울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태어날 때부터 몸이 불구였다. 그래서 '꼽추 루치아'로 불렸다. 1801년의 신유박해 이전부터 천주교를 믿었으나 남편과 가족들이 모두 외교인이라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지 못했다. 결국 집을 나와 교우들의 집에 얹혀 살면서 병자들을 돌보며 어떠한 천한 일이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1839년 기해박해로 체포되어 포청으로 끌려갔다. 71세의 고령이라 형벌은 받지 않았으나 온갖 교활한 신문을 받았다. 그러나 김 루치아는 한결같이 배교를 거부하고, 마침내 7월 어느 날 포청에서 기력이 쇠하여 숨을 거둠으로써 옥사, 순교하였다.

  


 

 

꼽추 루치아

 

교우들 사이에서 '꼽추 루치아'로 불리던 김 루치아는 서울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1801년 신유박해 이전부터 천주교를 믿었으나 외교인에게 출가한 뒤로는 신앙생활을 재대로 할 수 없었다. 그녀의 남편이 신자의 본분을 지키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교우들을 만나는 것도 몹시 싫어했기 때문이다. 결국 루치아는 집을 나오 교우들의 집으로 전전하며 집안일을 도와주고 아이들과 병자들을 돌보며 지냈다. 교우들은 이러한 루치아를 기쁜 마음으로 반겼다.

 

비록 루치아는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는 비천한 사람이었지만, 지혜로웠고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자신의 영신생활에 열중하였다. 한번은 어떤 외교인 양반이 "지옥이 그렇게 좁다고 하니 어떻게 사람을 그리 많이 집어넣을 수 있을꼬?" 하고 빈정대자, 루치아는 "당신의 그 작은 마음이 비록 만 권 서적을 품고 있어도 그것 때문에 좁다고 생각하신 적은 한번도 없지요"라고 대답하였다. 이 말을 들은 그 양반은 "천주교인들은 무식한 사람이라도 모두들 조리있는 말만 한다"며 크게 감탄했다.

 

김 루치아는 일흔 한 살이 되던 기해년에 체포되어 포청으로 끌려갔다. 옥에 갇혀있을 대 이미 몸이 매우 쇠약해졌음에도 병자를 도와주고 얼마 안되는 돈까지도 나누어주며 애덕을 실천하였다. 포장이 교우들의 이름과 주소를 대라는 심문에 그녀는 "이미 죽기로 작정했으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고 대답하였다. 얼마 후 그녀는 기력이 쇠한데다 태형 삼십 도를 맞아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고 옥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