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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103위 성인들

성녀 김효임 골룸바(金孝任 Columba)

by 파스칼바이런 2012. 9. 27.

성녀 김효임 골룸바(金孝任 Columba)

축일 9월 20일

 

 

 

신      분: 동정 순교자

활동지역: 한국(Korea)

활동연도: 1814-183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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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김효임 콜룸바(또는 골룸바)는 서울 가까운 밤섬이라는 마을에 사는 부유한 어느 외인 부모한테서 태어났다. 효임은 6남매 중 둘째이었던 갔고, 넷째가 효주 아녜스, 다섯째가 클라라이다. 이 셋은 동정을 지키었다. 효임은 부친을 사별한 뒤 어머니와 같은 때에 입교하였고, 이때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을 하였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들에게 결혼을 권해 마지않았고 그때마다 그들은 거절하였으며, 마침내 결혼한 여자로 보이기 위하여 그들의 머리를 말아 올려 쪽지게 하였다.

 

동정을 허원한 두 자매는 서울에서 30리가량 떨어진 오빠 김 안토니우스(Antonius)의 집에서 살았다. 이때 그녀는 계명을 충실히 지키고, 일주일에 두 번 대재를 지키며 남을 권면하는 애긍도 많이 하였다. 그래서 당시의 모든 교우들이 그들을 칭찬하며 그들의 덕행과 아름다운 표양에 경외를 표하였다.

 

기해년 5월 3일에 김사문이란 자가 효임의 집을 돈 많은 교우집이라고 고발하였다. 이때 가족들은 모두 피신해버리고, 콜룸바 자매와 어린아이 한 명이 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좌포청에 갇혔다. 효임은 보통 여자보다 겁이 많아 어떤 교우가 체포되었다는 소문을 들으면 얼굴이 창백해졌으나, 자신이 체포되어 끌려 갈 때에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효임이 동생 효주와 함께 포장 앞에 끌려 나가자 포장은 물었다.

 

"너희는 어찌하여 혼인을 아니 하였느냐?" "우리의 마음과 몸을 정결하게 보존하고 천지, 신인, 만물을 창조하신 천주님을 섬기고 흠숭하여 우리의 영혼을 구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동정의 신분과 의미를 명백히 밝힌 것은 효임이 처음이라고 한다. 이때까지는 모두 이 대답을 피하거나 다른 구실을 대었었다. "너희들은 인륜을 파괴하는 일이요, 나라에서 엄금하는 일을 감히 한단 말이냐? 천주를 배반하고 너희 책이 어디 있는지 말하고, 동교인을 대라. 그리고 너희 오라비가 어디로 갔는지도 말해라."

 

"만 번 죽어도 천주를 배반할 수는 없고 우리 오라비로 말씀하면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합니다." 효임은 배교할 수 없고 또 교우들을 고발하지 못하며, 교리책을 바치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하였다. 효임이 주리를 틀리고 뾰족한 몽둥이로 찔렸으나 조금도 굴하는 빛이 없는 것을 보고 포장은 "더 세게 찔러라." 하고 형리들을 다그쳤다. 그러나 효임은 태연자약하게 "매를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제는 더 아뢸 말씀이 없습니다." 하고 대답할 뿐이었다.

 

다시 옥으로 끌려들어간 효임 자매는 옷을 벗기고 매를 몹시 맞는 등 모욕을 당하였다. 효임은 붉게 단 숯불로 열 두 번이나 지지는 형벌을 당하였으나 4, 5일이 지나자 효임은 기운을 다시 차리고 덴 자리도 씻은 듯이 가시었다. 이를 지켜 본 형리들은 이상히 여기며 효임에게 귀신이 접한 줄로 생각하여 부적을 써서 그녀의 어깨에 붙이기도 하였다. 이윽고 형리들은 자매의 옷을 벗겨 도둑감방으로 몰아넣고 모욕을 당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 영혼들의 천상정배가 오시어 그들에게 초인적인 힘을 내려 주셔서 한 사람이 능히 열 남자를 당해낼 만큼 힘을 주시어 이 역경을 이기게 하셨다.

 

"너희는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고 하니 그것이 참말이냐?" 하고 묻는 포장에게 효임은 답하였다. "관장께서 말씀하시는 제사는 헛된 일입니다. 이 세상에서 옥에 갇혀있는 사람을 보십시오. 그들은 생일이나 무슨 명절을 당하여 아무리 자식들이 맛있는 음식을 차려놓고 청한다 할지라도 자기들 마음대로 옥에서 나가 그 잔치에 참여할 수 있습니까? 하물며 지옥에 있는 자들이 어떻게 거기서 나와 제사에 참례할 수가 있겠습니까? 예, 그것은 헛되고 거짓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일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처럼 효임은 조심성 있고 재간 있는 말로 재판관들을 놀라게 하였다.

 

문초가 끝날 무렵에 효임은 자기와 동생이 당한 모욕의 사실을 간단하게 이야기하고 나서 아래와 같이 덧붙여 말하였다. "서민의 딸이건 양반의 딸이건 우리는 존중함을 받을 권리가 있지 않사옵니까? 나라 법에 의해 우리를 죽이신다면 즐겨 죽겠사옵니다. 그러나 법에도 없는 그런 모욕을 당한다는 것은 너무나 마음 아픈 일이옵니다." 이러한 내용의 진상을 듣자 재판장은 그녀의 언변에 감동하여, 법 이외의 형벌을 가한 자들을 꾸짖고 그들 중에서 두 사람은 귀양을 보냈다.

 

그 후 효임은 다시 법정에 끌려 나가 세 차례나 곤장을 맞았으나, 흔들리거나 용기가 줄어드는 일이 없었다. 그녀는 1839년 9월 26일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칼을 받고 동정으로 순교하니 그녀의 나이는 26세였다. 그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화 '두 동정 순교자' 로마 한인 신학원 이양

 

고 장발 선생 1949년 작품

50년 로마 전교지방 미술 전람회 이후 로마 베드로신학원 지하 경당에 전시돼

  

우리나라 서양화단의 개척자이자 가톨릭 미술의 선구자인 고 장발(루도비코) 선생의 성화 작품 '두 동정 순교자'(Duae Virgines Martyres <사진>)가 50여년 만에 로마 한인 신학원(원장 전달수 신부)으로 옮겨져 다시 빛을 보게 됐다.

 

'두 동정 순교자'는 장발 선생이 1949년 기해박해 순교자들인 성 김효임(골롬바)과 성 김효주(아녜스) 자매(당시에는 복자)를 그린 성화로, 200×100㎝ 크기의 이 유화 작품은 1950년 로마에서 열린 '전교 지방 미술 전람회'에 월전 장우성 화백의 '조선 순교자의 모후' 3연작과 함께 출품됐었다.

 

'두 동정 순교자'는 전람회 이후 전교지역에서 유학온 사제들과 신학생들의 숙소인 로마 베드로신학원 지하 경당에 전시돼 왔으나 지난 50년 간 이 작품을 찾는 한인 신자가 거의 없을 만큼 잊혀져 왔다.

 

그러던 중 지난해 신유박해 200주년 특별전을 위해 로마를 수차례방문한 한국교회사연구소 고문서 담당 최승룡 신부가 베드로 신학원에 이 작품이 있는 것을 알아내고 한국 주교회의를 통해 이 성화의 로마 한인신학원 이양 작업을 추진해 왔다.

 

특히 지난 7월 교황청 인류복음화성 장관 크레센치오 세페 추기경이 방한했을 때 당시 주교회의 의장 박정일 주교는 '두 동정 순교자' 성화를 로마 한인신학원에 넘겨 줄 것을 공식 요청했고, 세페 추기경의 흔쾌한 수락으로 지난 11월 정식 이양됐다.

 

최승룡 신부는 "1925년 전교지방 박람회 때 한국 교회가 출품한 80여점의 작품 목록이 지금까지 남아있는 반면, 1950년 미술 전시회 관련 자료는 남아있지 않아 각종 귀중한 작품과 사료들이 로마 어딘가에서 썩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애석하기 짝이 없다"며 "한국교회가 로마에 산재한 한국 관련 사료와 미술 작품을 발굴하는 데 큰 관심을 기울여 줄 것"을 고대했다.

 

장발 선생의 '두 동정 순교자' 는 한강이 멀지 않은 서소문 밖 순교지를 배경으로 두 성인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지평선 위에 우뚝서 있는 두 성인의 모습은 그들의 믿음이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크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언니 김효임은 순교자의 영광과 승리를 상징하는 종려나무가지를 들고 있고, 동생 효주는 언니의 어깨에 한 손을 얹고 깊은 명상에 빠져 있는 모습으로 서 있다.

 

두 자매의 머리에 있는 미사 수건은 바람에 날려 커다란 하나의 수건을 함께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는 하나의 신앙, 즉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같은 믿음 때문에 순교했다는 것을 상징해 주고 있다. 또 한복과 옷고름이 바람에 따라 강하게 휘날리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이들의 믿음이 얼마나 열렬했는지를 말해 주고 있다.

 

한편 두 동정 순교자와 함께 출품됐던 장우성 화백의 '조선 순교자의 모후' 3연작은 현재 교황청 인류복음화성에 소장돼 있다.

 


 

 

 

성녀 김효임(金孝任) 골룸바(1814-1839)

 

동정녀인 동시에 순교자. 김효임 골룸바는 서울 근교 밤섬이란 곳의 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를 여읜 후 전가족이 다 함께 입교하고 유방제 신부에게 성세성사를 받았다. 두 여동생 김 효주(아녜스), 김 글라라와 함께 수정을 결심하고 독실한 신앙생활을 했다. 매주 두 차례의 재(齋)를 지키고, 가난한 이들을 도우니 그 덕행과 아름다운 모범에 감탄하지 않는 교우들이 없었다. 그러던 중 1839년 4월 김효임은 그간 이사한 경기도 고양군 용머리에서 동생 김효주와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김효임은 남동생 김 안토니오의 피신처와 교회서적을 감춘 곳을 대라는 관헌에 의해 동생과 함께 매우 혹독한 형벌을 받았다.

 

두 자매는 소위 학춤이라는 혹형 외에도 달군 쇠붙이로 몸의 열 세 군데나 지져대는 혹형을 받았고, 또 옷을 벗긴 채 남자 죄수의 방에 넣어졌다. 그러나 갑자기 두 자매의 몸에 신비스런 힘이 생겨 흉악한 죄수들이 두 자매를 범할 수 없었다. 이렇게 포청에서의 혹형과 고문을 이겨낸 김효임은 형조로 이송되어 형조판서의 신문에 영리하고 겸손하게 대답하여 형조판서를 감동시켰다. 신문이 끝나자 효임은 포청에서 겪은 법외의 고문과 능욕에 항의했다. 이 때문에 포청에서 능욕을 가한 포졸들은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 후 5개월 동안 옥에서 병과 고통과 싸우며 지내던 김효임은 9월 26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26세의 꽃다운 나이로 자신보다 20여 일 먼저 순교한 동생의 뒤를 따라갔다.

 

성녀 김효주(金孝珠) 아녜스는 동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