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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103위 성인들

성 민극가 스테파노(閔克可 Stephen)

by 파스칼바이런 2012. 9. 28.

 

성 민극가 스테파노(閔克可 Stephen)

 축일 9월 20일

 

성 민극가 스테파노(閔克可 Stephanus, 탁희성 비오 작)

 

 

신      분: 회장, 순교자

활동지역: 한국(Korea)

활동연도: 1787-1840년

같은이름: 민 스테파노, 민스테파노, 스더, 스테파누스, 스테판

 

성 민극가 스테파누스(Stephanus, 또는 스테파노)는 인천의 어느 외교인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굳고도 온화한 성격과 바르고도 냉정한 판단력을 소유했던 그는 아주 어릴 때에 어머니를 여의었고, 그 뒤 아버지와 형들과 함께 천주교에 들어와서 계명을 철저히 지켰다. 20세에 이르러 어느 교우 여자와 결혼하였으나 곧 상처하였다. 재혼하기를 원하지 않았으나 부모 형제들의 강요에 못 이겨 재혼하였지만, 딸 하나를 두고 아내가 세상을 떴으며 그 딸 역시 얼마 되지 않아 죽고 말았다.

 

그때부터 스테파누스는 이리저리 신자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을 격려하거나 가르치는 한편, 비신자들에게 전교하여 많은 사람을 입교시켰다. 또한 그는 종교서적을 베껴주고 받은 돈을 자기 생활비와 남을 돕는 일에 사용하니, 신부들은 그의 열성과 박애심을 높이 평가하여 회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이 직책을 훌륭히 수행하였으며 또 말과 모범으로 신자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1839년의 기해박해가 거의 끝날 무렵에 민 회장은 어느 배교자의 밀고에 따라 체포되었다. 포장이 "이 교를 버리겠다고 하면 즉시 놓아주마." 하자 그는 "만약에 나를 놓아주면 다시 내 종교를 준행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전교하여 회두시키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포장은 성이 나서 치도곤을 매우 치게 하면서 "이 놈은 죽어 마땅한 놈이니 사정없이 쳐라"고 소리질렀다. 이리하여 그는 치도곤 40대를 맞았다.

 

옥중에서도 스테파누스는 형벌로 인한 상처를 못 이겨 신음하면서도 배교자를 꾸짖고, 목숨을 아까워하여 가족을 걱정하는 신자들을 격려하며 그 결심이 흔들리지 않게 권면하였는데, 그의 노력이 눈에 띄게 효과를 내어 약한 신자 여러 사람이 배교를 철회하고 통회하였다고 한다. 이 이튿날도 그는 곤장 40대를 맞았지만 처음과 같이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결국 민 스테파누스는 옥에 갇힌 지 5, 6일 후인 1840년 1월 30일에 교수형을 받음으로써 순교하니, 이때 그의 나이는 53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수원교구 성지에서 만나는 103위 성인]

요당리성지 성 민극가(스테파노)

전교 · 자선활동에 모든 노력 기울여

 

- 성인 민극가 스테파노가 성경을 필사하고 있는 모습.

 

포장이 말했다.

"배교하라. 그러면 석방된다"

민극가는 끝없는 고문에도 지치지 않았다.

 

"만약에 나를 놓아주면 다시 내 종교를 준행(遵行, 전례나 명령 따위를 그대로 좇아서 행함)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전교를 하겠습니다."

 

성 민극가(스테파노, 1787-1840)는 기해박해 순교성인이다. 그는 양반의 후예로 굳고도 온화한 성격과 냉정한 판단력의 소유자였다. 인천에서 태어나 아주 어릴 적 어머니를 여의고 그 뒤 아버지와 형들과 함께 천주교에 입교했다. 교우를 아내로 맞이하였지만 결혼한 지 얼마 안되어 그의 나이 20세가 조금 넘었을 때 아내가 세상을 떠났다.

 

교우들이 재혼하라고 권했지만 그는 혼자 살기로 결심하고 그렇게 여러 해를 지냈다. 그러다 수원 갓등이에서 한 과부와 결혼해 딸 하나를 낳았다. 6~7년 후 새 아내도 세상을 떠나고 외동딸마저 얼마 안가서 죽고 말았다.

 

이때부터 그는 일정한 주소 없이 부평, 인천, 수원 지방을 다니며 책 베끼는 일로 생계를 이어나갔다. 성인은 교리에 관한 지식이 깊어서 가는 곳마다 사람들에게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며 많은 이들을 입교시켰다.

 

자선 사업에 많은 관심을 보였고 전교 활동에 힘쓴 성실함으로 1836년경 유방제 신부에 의해 전교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또 앵베르 주교로부터 수원 양간 송교(현 화성시 서신면 송교리) 전답의 경작권을 위임받기도 했다.

 

1839년 기해박해로 많은 성직자들이 체포되자 그는 더욱 열심히 전교를 하였으나 그가 경작하는 전답을 빼앗으려고 포졸들과 공모한 배교자 오치서의 밀고로 이듬해 1월 25일, 은신해 있던 서울 근교의 교우 집에서 체포되었다.

 

체포된 이후 성인은 여러 차례의 고문과 혹형을 받으며 배교를 강요당하였으나, 신앙을 굽히지 않았다. 오히려 옥중에서 김절벽(도미니코), 이사영(고스마) 등을 포함한 많은 배교자들을 회개시켰다.

 

성인은 그 후에도 여러 차례 형벌 끝에 1840년 1월 30일 53세를 일기로 교수형을 받고 옥중에서 순교했다. 성인은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복자위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됐다.

 

천주가사 '삼세대의(三世大義)'는 민극가 스테파노 성인이 지은 것이다. 신자들이 삼세(천당, 지옥, 십계(현세))의 의미를 잘 새겨 현세에서 교리를 실천해 내세에 천당에 갈 수 있도록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고 가르치기 위해 저술했다.

 

'삼세대의'는 죽음 앞에 선 인간의 무력한 모습을 시작으로 천주의 천지창조 내용, 아담과 이브의 창조와 추방, 노아의 홍수, 아브라함,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는 내용,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과 전교, 예수의 기적, 그리스도의 수난과 십자가에서의 죽음, 예수 부활과 승천, 성령강림 등 모든 교리가 제시된다. 마지막 부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에 대한 내용과 천주께 의지하여 정신적 구원을 얻도록 기원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성인이 '삼세대의'를 창작한 것은 회장에 임명돼 전교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신자들의 신심 함양을 위한 쉬운 우리말 가사가 필요했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성인이 활동한 교우촌 양간공소 자리인 교구 요당리성지(www.yodangshrine.kr) 순교자묘역에는 성인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09년 10월 4일, 이승환 기자]

 


 

 

성 민극가 스테파노(1787-1840)

 

민극가 스테파노는 인천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가족이 모두 외교인이었으나 어머니가 사망한 후 아버지가 중년에 이르렀을 때 온 가족과 함께 입교했다. 20세 때 아내를 잃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 재혼하여 딸 하나를 두었으나 6, 7년 후 재혼한 아내와 딸마저 잃게 되자 집을 나와 서울, 인천, 부평, 수원 등지를 전전하며 교리서적을 팔아 생활해 나갔다. 또 어디서나 냉담자를 권면하고 외교인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입교시키고 또 자선사업에도 많은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 회장에 임명되었다.

 

1839년 기해박해로 주교와 신부들이 체포되자 민극가는 서울과 지방의 교우들을 찾아 위로하고 격려하며 회장의 직무를 열심히 이행하던 중 그 해 12월 서울 근교에서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온갖 수단으로 배교를 강요당했으나 민극가는 모든 위협과 유혹을 물리쳤다. 또 옥에서 배교했거나 마음이 약한 교우들을 권면함으로써 배교자 중 여럿이 다시 신앙을 찾게 되었다. 이렇게 옥중 생활에서도 회장의 본분을 다하던 민극가는 1840년 1월 30일 포청에서 교수형을 밭고 53세의 나이로 순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