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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103위 성인들

성녀 박아기 안나(朴阿只 Anne)

by 파스칼바이런 2012. 9. 28.

성녀 박아기 안나(朴阿只 Anne)

 축일 9월 20일

 

성녀 박아기 안나(朴阿只 Anna, 탁희성 비오 작)

 

 

신      분: 부인, 순교자

활동지역: 한국(Korea)

활동연도: 1783-1839년

같은이름: 낸시, 니나, 박 안나, 박안나, 애나, 애니, 앤

  

성녀 박아기 안나(Anna)는 한강 기슭의 한 작은 촌락에 살던 어느 교우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천성적으로 기억력이 둔하여 교리문답과 기도문 배우기가 매우 힘들어서 "나는 천주를 내가 원하는 대로 알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마음껏 사랑하기로 힘을 쓰겠다."고 말하며 스스로를 위로했다고 한다. 18세에 태 프란치스코와 결혼하여 2남 3녀를 낳고 자녀들을 매우 열심히 양육하였다.

 

안나는 예수님의 수난에 대하여 특별한 신심을 가지고 구세주의 오상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고, 박해가 일어났다는 말을 들고는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자녀들에게 들려주고 자신도 순교를 열망하고 있던 중, 1839년 2월경에 남편과 맏아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남편과 장남은 곧 배교하여 풀려났지만, 박 안나는 다리뼈가 허옇게 들어나고 몸에 쇠눈 만큼씩이나 구멍이 나도록 혹독히 맞았지만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그러나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고통은 남편 프란치스코가 배교하여 아들과 함께 매일 같이 찾아와서는 집안의 참혹한 형편과 죽어가는 늙은 어머니의 고통이며 엄마를 찾는 어린 것들의 가련한 정경을 말하면서 배교하라고 애걸복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안나는 이 무서운 유혹을 용감히 물리쳤다. "아니, 며칠 더 살아 보려고 영원한 죽음을 당할 위험을 무릅쓴단 말이오? 나보고 배교하라고 원하기는커녕 끝까지 항구하라고 격려해야 되지 않겠소? 당신들이야 말로 어서 천주께 회두하시오, 그리고 내 행복을 부러워하시오." "네 남편과 아들은 옥에서 풀려나가 집으로 돌아갔다. 너도 한 마디만 하면 이런 은전은 입을 수 있다. 그런데 집안 식구들이 그렇게 조르는데도 너는 도무지 마음을 굽히지 않으니 네 마음은 쇳덩어리 같이 인정이 도무지 없구나. 그래 삶이란 것이 그다지도 나쁜 것이란 말이냐?" 하며 포장이 달래니, "제 남편과 아들이 배교한 것이 제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는 신앙을 보존하고 신앙을 위하여 죽기로 작정하였습니다." 하고 안나는 말하였다.

 

1839년 5월 10일 형조에서는 다음과 같이 주청을 올렸다. "마님이라고 불리는 朴女 아기는 사서 읽는 것으로 집안일을 삼고 추한 그림을 훌륭한 신(神)같이 공경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죽음을 향하여 나아가 뒤로 물러나지 않으리라고 맹세하였나이다. … 사형을 선고하였으니 재가하심을 청하나이다." 이리하여 그녀는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였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57세였다. 그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녀 박아기 안나(1783-1839, 부인, 기해박해 때 참수)

 

강원도 강촌(江村) 출신의 박 안나는 서울의 한강변에 살면서 어머니와 함께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머리가 둔해 교리를 명확하게 알지는 못했으나 진심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게 해 달라고 매일 기도했다. 18세 때 비교적 부유한 교우 태문행(太文行)과 결혼하여 2남 3녀를 두었고 또 정성껏 그들을 교육시켰다. 기해박해 초인 1839년 4월 박 안나는 남편, 큰아들 응천(應天)과 함께 체포되었는데 포청에서의 고문으로 남편과 큰아들은 배교하고 석방되었으나 박 안나만은 배교를 거부하고 혹형과 고문을 이겨냈다. 연일 계속되는 혹형으로 살이 터지고 뼈가 튀어 나왔으나 언제나 평온하였고 때때로 위문 오는 가족들에게도 권면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형조로 이송되어서도 형관이 배교하고 석방되어 가족들에게 돌아가라고 유혹하며 혹은 위협하고 고문하였으나 박 아기는 끝까지 신앙을 지켜 1839년 5월 24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그때 나이는 57세였다.

 


 

 

마님성녀 박아기 안나

 

"마님이라고 불리우는 박녀(朴女) 아기는 사서(邪書) 읽는 것으로 집안일을 삼고 추한 그림을 훌륭한 신(神)같이 공경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죽음을 향하여 나아가 뒤로 물러나지 않으리라고 맹세하였나이다. … 사형을 선고하였으니 재가하심을 청하나이다." 이러한 형조의 주청으로 순교한 박 안나는 강원도 강촌에서 태어나 서울 한강변에 살면서 어머니와 함께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천성적으로 머리가 둔해 교리를 명확하게 깨닫지 못했으나 진심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게 해달라고 날마다 기도했다. 그녀는 열여덟 살에 태문행과 결혼하여 2남 3녀를 낳아 열심히 교육시켰다.

 

예수님의 수난에 대하여 특별한 신심을 가진 박 안나는 구세주의 오상을 생각하며 눈물을 자주 흘리기도 했다. 박해가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자녀들에게 들려주던 그녀는 자신도 순교를 열망하고 있던 중 1839년 2월경에 남편과 맏아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남편과 아들은 배교하여 풀려났으나 안나는 배교를 거부하여 다리뼈가 허옇게 드러나고 몸에 큰 구멍이 나도록 혹독히 맞았지만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그러나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고통은 매일 찾아오는 남편과 아들에게 집안의 참혹한 형편과 늙으신 어머니의 고통 그리고 엄마를 찾는 어린것들의 소식을 전해 듣는 것이었다.

 

포장이 배교시키기 위해 "집안 식구들이 그렇게 조르는데 너는 한마디만 하면 석방될 수 있다. 그런데 도무지 마음을 굽히지 않으니 네 마음은 쉿덩어리와 같이 인정이 없구나. 그래 삶이란 것이 그다지도 나쁜 것이란 말이냐?"하며 달래자, 안나는 "제 남편과 아들이 배교한 것이 저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는 신앙을 보존하고 신앙을 위하여 죽기로 작정하였습니다" 하고 대꾸하였다. 이렇게 그녀는 끝까지 신앙을 지켜 1839년 5월 24일 서소문 밖에서 쉰일곱의 나이로 참수형을 당했다.

 

[경향잡지, 1996년 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