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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103위 성인들

성녀 박희순 루치아(朴喜順 Lucy)

by 파스칼바이런 2012. 9. 28.

성녀 박희순 루치아(朴喜順 Lucy)

축일 9월 20일

 

 

 

 

신      분: 동정 궁녀, 순교자

활동지역: 한국(Korea)

활동연도: 1801-1839년

같은이름: 루시아, 루치아, 박 루시아, 박 루치아, 박루시아, 박루치아

 

성녀 박희순 루치아(Lucia)는 부유한 어느 외교인 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타고난 육체의 아름다움과 총명하고 순진하며 솔직하고 상냥하여 누구에게나 칭찬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궁중에 불려 들어가 왕후의 시녀가 되었다. 15세가 채 못 되었을 때 어린 순조 임금이 그의 매력에 몹시 끌려 유혹하려고 별별 수단을 다 썼으나 이 어린 처녀는 비록 외교인이었지만 비상한 지혜와 용기로 그 유혹을 물리 쳤는데, 이 소문은 궁중에 널리 퍼져 있었다고 한다. 또한 그녀는 한문과 국문이 능하여 순조의 차녀인 복온 공주에게 글을 가르쳤다고 한다.

 

루치아는 30세쯤 되었을 때에 처음으로 천주교 이야기를 듣고 곧 믿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궁중에 매인 몸일 뿐 아니라, 김 대비의 총애를 받고 다른 궁녀들을 보살피는 상궁의 자리에 있었고, 더욱이 선왕의 위패를 지키는 소임을 맡았기에 궁궐을 빠져 나오기가 매우 힘들었다. 그러나 신앙 때문에 병을 빙자하여 궁중에서 나왔으나, 자기 아버지가 천주교를 대단히 싫어하였기 때문에 남대문 밖의 조카 집에 가서 살았다. 그때부터 사치와 환락 속에서 허송한 세월이 얼마나 허무한지를 후회하여 교리를 더욱 열심히 배우고 본분을 철저히 지키는 데 열심을 배로 하였으며, 특별히 옷과 음식에 있어서 많은 극기를 행하였다. 이리하여 그녀는 오래지 않아 조카의 가족을 입교시켰다.

 

1839년에 박해가 일어나자 그녀는 서울의 큰살리뭇골이라는 동네에 집을 한 채 장만하여 전 아가타(Agatha)와 몇몇 여신자와 함께 살았다. 4월 15일 그들이 박해를 피할 방도를 의논하고 있을 즈음에 포졸들이 급습하자, 루치아는 태연히 "이는 천주의 성의이다." 하고 말한 후 집안에 있는 식구들에게 모두 떠날 준비를 하라고 이르고 술과 안주를 내다 포졸들을 대접하고 옥으로 끌려갔다. "너희들은 궁인으로 다른 여자들보다 높은 교육을 받았는데 그 사학을 믿을 수가 있단 말이냐?" "저희들은 사학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피조물의 창조주이시며 아버지이신 천주를 공경하고 섬기는 것은 모든 사람의 의무입니다." 며칠 동안은 모두가 혹독한 고문을 용감하게 참아 받았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다른 사람들은 배교하였으나, 박 루치아와 전 아가타만이 꿋꿋하게 견디다가 형조로 이송되었다. 여기서 세 번 출두하여 그 때마다 곤장 30대씩을 맞았지만 , "이제야 오주 예수와 성모 마리아의 괴로움이 어떠하였는지 조금 깨닫게 되었다"고 말하며 태연하니, 그것을 본 사람들은 모두 이상히 여기고 형관은 또한 그것을 마술로 돌렸다고 한다.

 

5월 12일 "박녀(朴女) 희순은 신자들과 긴밀히 결합하여 밤낮으로 사도에 빠져 있으며, 그의 행동과 언어와 침묵까지도 요술과 마술뿐이요, 입으로 외는 것이나 손으로 표시하는 것이 하나도 사특한 저주 아님이 없는지라, 이에 확증을 얻어 사형을 선고하였으니 재가하심을 청하나이다." 하는 주청을 형조에서 보냈고, 재가가 있었다. 박 루치아는 서소문 밖에서 다른 8명의 신자와 함께 순교하였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39세였다. 그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녀 박희순 루치아(1801-1839, 동정 궁녀, 기해박해 때 참수)

 

동정녀인 동시에 순교자인 박희순(朴喜順) 루치아는 뛰어난 미모와 재주로 인해 어려서 궁녀로 뽑혀 궁궐에 들어갔다. 15세 경 어린 순조(純祖)의 유혹을 용기와 덕으로 물리쳐 그 명성이 세간에 널리 퍼졌었다. 30세 경 천주교를 알게 되어 입교한 후 궁녀의 신분으로는 천주교 봉행이 어렵게 되자 병을 핑계로 궁궐을 나와 조카의 집에 살면서 언니 박큰아기와 조카의 식구들을 권면하여 입교시켰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고 3월 말 박희순은 조카의 가족들과 함께 천주교인으로 밀고되자 전경협(아가타)의 집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4월 15일 전경협의 집을 습격한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포청과 형조에서 혹형과 고문으로 함께 체포된 많은 사람들은 배교했으나 박희순만은 언니, 전경협과 함께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또한 다리가 부러지고 골수가 흐르는 만신창이의 몸으로 교우들에게 권면의 편지를 써 보내 교우들을 감동시키기도 하였다. 이러한 열정적인 신앙으로 모든 고통을 이겨낸 박희순은 '드디어 5월 24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39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 성녀 박큰아기 마리아는 언니.

- 성녀 박큰아기 마리아, 성녀 전경협(全敬俠) 아가타와 함께 체포됨.

 


 

 

성녀 박희순 루치아(朴喜順 Lucia, 탁희성 비오 작)

 

천주교를 배반하고 같은 교인들을 대라는 포장의 명령에 "천주는 저의 창조주이시며 아버지이십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천주를 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분은 또한 사람을 해하는 것을 금하시니 교우는 고발할 수 없습니다"고 대답하고 순교한 박희순은 어려서부터 뛰어난 아름다움과 총명함이 널리 퍼져 궁(宮)으로 불려 들어갔다. 그녀는 재주와 슬기가 뛰어나 차츰 높은 지위에 올랐고, 한문과 국문에도 능해 궁녀들을 가르쳤다. 당시 궁녀들에게는 왕의 관심을 얻는다는 것은 대단히 큰 영광이었다. 그러나 궁녀 박씨는, 그의 매력에 끌려 유혹하는 순조를 비상한 지혜와 용기로 물리쳤다. 박씨는 서른 세 살쯤 되었을 때 처음으로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입교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박 루치아는 조카의 식구들과 함께 같은 궁녀였던 전경협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그해 4월 15일 그들이 박해를 피할 방도를 의논하고 있을 즈음에 포졸들이 급습하자 루치아는 태연히 "이는 천주의 성의(聖意)이다" 하고 말한 후 옥으로 끌려갔다. 포장이 "너희는 궁인으로 다른 여자들보다 높은 교육을 받았는데 사학을 믿을 수가 있단 말이냐?"고 하자, 루치아는 "저희들은 사학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피조물의 창조주이시며 아버지이신 천주를 공경하고 섬기는 것이 모든 사람의 의무입니다"고 말하였다.

 

며칠동안 계속된 혹독한 고문을 모두가 용감히 참았지만 오래지 않아 다른 사람들은 배교하고 박 루치아와 그의 언니 그리고 전 아가타만이 꿋꿋하게 견디다가 형조로 이송되었다. 그곳에서 모진 혹형과 고문으로 다리가 부러지고 골수가 흐르는 만신창이 몸이 되었지만 교우들에게 권면의 편지를 써보내 교우들을 감동시키기도 하였다. 이러한 믿음으로 모든 고통을 이겨낸 박 루치아는 5월 24일 서른 아홉 살의 나이로 서소문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경향잡지, 1996년 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