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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103위 성인들

성 볼리외 베르나르도 루도비코(Beaulieu Bernard Louis)

by 파스칼바이런 2012. 9. 29.

성 볼리외 베르나르도 루도비코(Beaulieu Bernard Louis)

축일 9월 20일

 

 

성 볼리외 베르나르도 루도비코 신부(Bernard Louis Beaulieu)

 

 

신      분: 신부, 순교자

활동지역: 한국(Korea)

활동연도: 1840-1866년

같은이름: 누수, 루도비꼬, 루도비꾸스, 루도비쿠스, 루수, 루이, 루이스, 버나드, 베르나르두스

 

성 베르나르 루이 볼리외(Bernard Louis Beaulieu) 신부의 세례명은 베르나르두스(Bernardus, 또는 베르나르도)이고, 한국명은 서몰례(徐沒禮)이다. 그는 1840년 10월 8일 프랑스 보르도(Bordeaux) 교구의 랑공(Langon)에서 베르나르와 마리 데지레(Marie Desiree)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부친은 결혼 5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모친은 아들을 낳자 성모님께 봉헌하였다. 그는 여섯 살 되던 해에 공민학교에 들어갔고, 일곱 살부터 복사를 하였으며, 아홉 살이 되던 1849년 10월에 고향의 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해에 그는 중국 사천(四川)에서 전교한 경험이 있는 한 선교사 신부로부터 중국의 사정을 듣고는 동양 전교에 대한 열망을 품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1857년에 보르도 대신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이듬해에 모친을 여읜 후 전교를 향한 그의 마음은 더욱 열렬해졌다. 그러나 그는 교회법상의 연령 미달로 사제 서품을 받지 못하였으며, 보르도 교구의 교구장인 대주교는 누구든지 교구를 떠나지 않도록 종용하고 있다가 뜻밖으로 그에게 전교를 위한 출국의 허락해 주었다. 그래서 그는 곧 파리 외방전교회의 신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는 1864년 5월 21일에는 사제 서품을 받았으며, 같은 해 6월 15일에 조선의 전교 신부로 임명되었다. 1864년 7월 15일에 프랑스 파리(Paris)를 출발한 볼리외 신부는 도리(Dorie, 金) 신부, 브르트니에르(Bretenieres, 白) 신부, 위앵(Huin, 閔) 신부와 함께 1865년 5월 27일 조선의 내포 지방에 도착하였다. 그는 이미 조선에 입국하여 있던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와 조전 교우들의 환영을 받았다.

 

같은 해 6월 그는 경기도 광주 지방에 있는 뫼논리(현 경기도 성남시 운중동의 山畓里)라는 교우촌에서 본격적인 사목활동을 하기 위한 준비를 하였다. 그는 입교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장제철이라는 교우 집에서 조선말을 열심히 공부했다. "이토록 잘 전교할 수 있는 지방에 오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라고 행복하게 말했으며, 고해성사를 들을 정도로 한국말에도 능숙해졌다. 이때 배교자인 이선이가 뫼논리에 볼리외 신부가 살고 있다고 실토하였기 때문에 그는 장제철의 집을 떠나 광주 산답리 이 요셉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그 후 베르뇌 주교가 볼리외 신부의 조선말 실력과 열심함을 감안하여 충청도 지방으로 그의 임지를 정해 주려고 하던 참에, 그는 임지에 가보기도 전에 처음에 기거했던 집 주인 장제철과 이선이의 밀고로 포졸들에게 발각되어 마침내 1866년 2월 27일에 도리 신부와 함께 체포되었다. 그 다음날 서울로 압송되어 의금부에 바로 연행된 후 곧바로 심문을 받았다. 이리하여 볼리외 신부는 마침내 베르뇌 주교와 도리 신부 그리고 브르트니에르 신부 등 동료들과 함께 새남터의 형장에서 희광이의 세 번째의 칼을 맞고 순교의 월계관을 썼다. 이때가 1866년 3월 7일이었고, 그의 나이는 27세였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서 루도비코 볼리외 (Beaulieu) 신부(1840-1866)

 

한국 이름은 서몰례(徐沒禮),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한 프랑스 선교사. 서 신부는 1840년 프랑스 '보르도' 교구에서 태어나 1864년 파리 외방전교회 사제로 서품되어 이듬해에 백, 김, 민 세 신부와 함께 충청도 내포에 도착 입국하였다. 그는 고백을 들을 만큼 한국말을 배운 후 공주 지방 전교를 맡게 되었으나 임지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펴볼 겨를도 없이 박해를 맞았다.

 

서 신부는 장 주교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경기도 광주 근처 교우집에 피해 있었으나 2월 27일 포졸에게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는 모진 고문에도 고통을 감수하였고 한국말이 서툴다는 핑계로 여러 질문에 일절 대답을 회피하였다. 마침내 3월 7일 서 신부는 장 주교를 선두로 동료인 백, 김 신부와 함께 새남터에서 참수되니 그 때 나이 26세였다.

 


 

 

 

           

수원교구 하우현 성당 사제관 앞에 있는 성 서 루도비코 볼리외 신부상과 기념비 모습

하우현 성당은 이미 1800년대 초반부터 박해를 피해온 신앙인들에 의해 교우촌이 형성되었고, 1888년 갓등이 본당 설립과 함께 갓등이 본당 관할 공소가 되었습니다. 갓등이 본당 2대 주임인 알릭스 신부님은 교우들이 공소 강당도 없이 교우집에서 공소예절을 하는 것을 보고 강당 신축을 추진하여 1894년 초가목조강당 10칸을 건립했습니다.1900년 본당으로 승격된 후 1954년 다시 안양 본당 공소로 전환되었고, 1965년 은퇴 후 하우현에서 휴양하던 김영근 베드로 신부님이 성당의 붕괴 위험을 알고 미군 부대로부터 건축 자재를 원조받아 현재의 성당을 신축하였습니다. 1975년 군포(현 호계동) 본당 관할공소로 변경되었다가 1978년 하우현 공소가 본당으로 부활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1993년 하우현 공소 건립 100주년 기념식을 거행하였고, 2001년 1월에는 초대주임인 샤플랭 신부가 세운 사제관이 경기도 기념물 제176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이어 2004년 7월과 2005년 6월에 사제관 보수 공사와 조경 공사를 실시하였습니다. 1906년에 건립된 사제관은 몸체는 서양식 석조 양식으로 되어 있고 지붕은 골기와를 이은 전통 한국식으로 20세기 초반에 한국식과 서양식 건축기법이 혼용된 드문 경우로 건축사적 가치가 높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제관 앞에는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한 서 루도비코 볼리외 성인의 기념비와 동상이 있습니다. 성인께서 주로 하우현 인근에서 사목하시다가 인근 둔토리 동굴에서 체포되어 순교하셨기 때문입니다.

 


 

 

 

 

 


 

병인년의 선교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