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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103위 성인들

성 베르뇌 시메온(Berneux Simeon)

by 파스칼바이런 2012. 9. 28.

성 베르뇌 시메온(Berneux Simeon)

축일 9월 20일

 

 

 한국의 성 베르뇌 시메온(Simeon Francois Berneux)

 

 

신      분: 주교, 순교자

활동지역: 한국(Korea)

활동연도: 1814-1866년

같은이름: 시므온, 장경일

 

성 시메온 프랑수아 베르뇌(Simeon Francois Berneux) 주교의 한국명은 장경일(張敬一)이다. 그는 1814년 5월 14일 프랑스 르망(Le Mans) 교구의 샤토 뒤 루아르(Chaeau-du-Loir)에서 평범한 부모의 아들로 태어났다. 대장간 일을 하던 부친의 신앙은 그리 대단하지 않았으나, 모친은 신앙심이 깊은 부인으로서 모든 사랑을 쏟아 아들을 가르쳤다. 어릴 때부터 총명했고 또 신심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본당 신부가 학교에 보내어 공부하던 중, 1831년에 르망 교구의 대신학교에 입학하여 1837년 5월 30일 사제로 서품되었다.

 

이어 그는 신학교에서 교수생활과 지도신부의 역할을 담당하던 중 외국 선교사의 길을 택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1837년 7월 15일에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였다. 이어서 그는 두 명의 젊은 사제와 함께 1840년 6월 26일 필리핀의 ‘마닐라’에 도착하였다. 그는 1841년 1월 16일 ‘통킹’(Ton King, 현 북베트남)에 도착했다. 여기서 그는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2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으나, 1843년 3월 프랑스 함대 사령관의 도움으로 석방되어 같은 해 8월 23일에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그 해 10월경에 그가 만주 주교로 물망에 오르게 되자, 그는 중국어 공부를 하면서 그 후 10여 년간 모든 열성을 다해 전교 임무를 완수하면서 현명하게 교구를 이끌어 갔다. 그러나 1849년에 요동 지역에 박해가 일어나자 상해로 피신했다가 만주로 다시 돌아왔다. 1854년 8월 5일 교황 비오 9세(Pius IX)는 그를 조선 교구 제3대 교구장인 페레올(Ferreol, 高) 주교의 후임으로 제4대 조선 교구장에 임명함과 동시에 조선 입국을 명령하였다. 이에 그는 두 신부와 함께 두 달 동안 숨어서 조선 입국을 준비하던 중, 다행히 조선의 교우 홍봉주의 안내로 상복을 입고 미투리를 신은 후 중국을 출발하여 4일 만에 서울에 당도하였다.

 

그는 입국하자마자 상복을 입고 경기도 지방의 60여 개 공소를 돌아보았다. 1년 후인 1857년 한국 최조의 성직자 회의를 열어서 기도서의 개편과 직무를 분담하였으며, 11년 간 한국에서 선교하였던 다블뤼(Daveluy, 安敦伊) 신부의 부주교 축성식을 거행하였다. 이 성직자 회의의 결과로 그는 1857년 8월에 "장 주교 윤시 제우서"(張 主敎 輪示 諸友書)라는 사목 서한을 발표하면서, 그 당시 한국 교회가 내외적으로 직면했던 여러 가지 법규와 제도 등의 문제들을 규명하면서 한국 교회의 입장을 과시했다. 또한 배론에 신학생을 양성하기 위한 신학당을 세웠으며, 교회서적이나 출판물을 저술, 정리하여 대량으로 출판하였다. 그래서 교세가 날로 확장되었고 교우 수도 증가하였다.

 

1864년 국경 북쪽에 러시아 상선이 나타나서 통상을 요구하자 대원군은 베르뇌 주교에게 프랑스의 힘을 빌려 러시아를 물리치겠다는 제의를 해왔다. 그러나 러시아가 스스로 물러남으로써 이 사건이 해결되자, 대원군은 태도를 바꾸어 쇄국정책을 강행하면서 1866년 초에 병인년 대박해를 일으켜 그동안 활약했던 성직자들과 신자들 수천 명을 한꺼번에 학살하였다.

 

한국의 파리 외방전교회 12명의 순교자들

이 작품은 한국에서 순교한 파리 외방전교회 출신 12명의 순교자들을 그린 작품이다. 이 중에서 10명이 1984년 5월 6일 여의도 광장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한국의 103위 순교성인의 일원으로 시성되었다.

 

1866년 2월 23일 다섯 명의 포졸들이 주교 댁을 급습하여 베르뇌 주교를 체포한 후 포도청으로 끌고 갔다. 같은 달 27일 대원군과 형조 재판관들은 베르뇌 주교를 끌어내어 갖은 신문을 다하면서 발목과 무릎을 조여 주리를 틀고, 나무걸상 형틀 뒤로 두 팔을 제쳐 매어 놓고서는 큰 곤장대로 매질을 가했다. 이즈음에 도리(Dorie, 金) 신부와 볼리외(Beaulieu, 徐沒禮) 신부, 그리고 브르트니에르(Bretenieres, 白) 신부도 체포되어 의금부에 갇히게 되었다.

 

이윽고 1866년 3월 6일 베르뇌 주교 일행은 참수형을 선고받고, 다음날 서로 머리를 맞대고 묶인 채 감옥에서 끌려나와 수레에 실려 형장으로 향하였다. 이때 장 주교는 "우리가 한국에서 죽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고!" 하면서 기뻐하였다고 한다. 참으로 이들 얼굴에는 희색이 넘쳐흘렀다. 사형장은 한강의 새남터 강변이었는데, 이미 3천 명의 군졸들이 천막을 쳐놓고 죄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선교사들이 도착하자 둘씩 무릎을 꿇게 하고 양쪽 귀를 화살로 내리 꿴 다음, 이들 얼굴에 백회를 뿌림으로써 모든 처형 준비를 다 갖추었다.

 

사형집행 선언문의 낭독이 끝나자 여섯 명의 희광이가 날뛰고 소리를 지르며 돌다가 베르뇌 주교의 목을 칼로 내리쳤다. 베르뇌 주교의 목이 두 번째로 내려친 칼날에 땅에 떨어지니, 한 병졸이 그 머리를 포도대장 앞에 갖다 보인 다음 높이 군문효수로 매달았다. 이때 순교한 선교사들의 시체는 3일 후 교우들이 와서 그곳 부근인 왜고개에 정성껏 장례를 지내고 모셨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수원교구 미리내 성지의 103위 시성 기념성당 옆벽에 설치된 한국 순교성인화

성 도리 헨리코, 성 브르트니에르 유스토, 성 베르뇌 시메온, 성 볼리외 루도비코

 

 

[서울대교구 설정 180주년 기념 지상전] 그리스도의 일꾼, 서울대교구장

제4대 조선 대목구장 시메온 베르뇌 주교

주님께서 계시니, 불가능한 것은 없습니다

 

서울 말고도 나는 60개 마을의 성사집행을 맡았습니다. 산골에서는 포교하는 것이 신자들에게는 덜 어렵고 선교사에게는 덜 고단합니다. 어느 때는 해면처럼 물을 빨아들이는 버선과 짚신 차림으로 비와 눈을 무릎 쓰고 길을 가야 합니다. 이렇게 8개월 동안 일을 하고 나면 우리는 지칠 대로 지치지만 우리 성직에 주께서 내려주신 축복을 듬뿍 안은 채 숙소로 돌아옵니다. -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 중에서

 

성 베르뇌 주교 이야기

 

나, 시메온 프랑수아 베르뇌(Simeon Francois Berneux, 1814-1866)는 1814년 5월 14일 프랑스 르망(Le Mans) 교구의 샤토 뒤 루아르(Chateau-du-Loir)에서 태어나 프레시네(Precignee)의 소신학교와 교구 대신학교를 졸업하고 1837년 5월 20일 사제 서품을 받았습니다. 1839년 7월 15일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여 1844년부터는 만주에서 사목을 하던 중 갑사(Capsa) 명의 제4대 주선 교구장으로 임명받음과 동시에 조선으로 부임할 것을 명받았습니다. 나는 조선 대목구장이 되기 전에 마카오의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에 머무르는 몇 주 동안 한국의 김대건,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신학생에게 신학을 가르치기도 하였기에 나의 앞길이 그렇게 낯설게 느껴지지는 않았습니다.

 

나는 상해로 가서 푸르티에 신부와 프티니콜라 신부와 함께 1856년 1월 17일 상해를 떠나 요동, 장연, 해주(海州)를 거쳐 3월 29일 서울에 도착하였습니다. 전동(典洞)에 있는 이군심(李君心)의 집에 머무르면서 한국말을 배우는 등 활동 준비를 갖추었으나 위장결석(胃腸結石)이 재발되어 고생하다가, 3개월 후 어느 정도 병세가 호전되자 서울 및 인근 60개의 마을을 중심으로 신자들을 방문하였고 입국 이듬해인 1857년 3월 다블뤼 주교를 보좌 주교로 임명하고, 주교 성성식 다음 날인 3월 26일부터 3일 동안에는 조선교구 최초의 성직자 회의를 개최하였지요. 그리고 이 회의에서 결의된 사항을 '장주교윤시제우서'(張主敎輪示諸友書)란 사목 서한으로 같은 해 8월 2일 일반 신자들에게 반포하였고, 성직자들에게는 1858년 4월에 라틴어로 발표하였습니다. 나는 늘어나는 신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교리서적의 간행을 서둘러야 했습니다. 그래서 1861년에는 목판 인쇄소를 서울에 설립하여 최 베드로에게 운영을 맡겼습니다. 그리고 한글로 된 교리서, 기도서, 신심서를 간행하여 신자들이 쉽게 교리를 배우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하였지요.

 

 

이러한 가운데 다행스럽게도 1861년 3월 랑드르, 조안노, 리델, 칼레 신부가 조선에 부임하면서 나는 새로운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해 10월 조선 대목구를 동정 성모에게 봉헌하면서 대목구 전체를 8개 구역으로 나누는 동시에 성 요셉 신학교를 제외한 7개 지역을 성모 축일들 가운데 하나로 명명하여 선교사들에게 맡겼고 그중에서 나는 성모 무염시태 지역인 서울 · 경기 지방을 맡았습니다.

 

이 와중에서도 조선의 상황은 시시각각으로 변했는데 러시아가 1860년 북경조약으로 연해주 일대를 차지한 뒤 조선 국경을 넘어와 통상을 강요하였습니다. 그러자 몇몇 신자들이 이때를 이용해 신앙의 자유를 얻고자 하였지요. 그러면서 흥선대원군에게 프랑스 선교사를 통해 서양 제국과 동맹을 맺음으로써 러시아의 남진을 막자는 방아책(防俄策)을 건의하고 대원군과 나의 면담을 주선하였습니다. 이러한 자리가 몇 번 어긋나다가 나는 한 대 신자였으나 배교한 이선이의 밀고로 1866년 2월 23일 체포되었지요.

 

체포된 후 먼저 우포도청으로 끌려가 2차례 문초를 받았습니다. 추관(推官)은 본국으로 돌려보내 주겠다고 제의하였으나 나는 조선 땅과 신자들을 두고 떠날 수 없었습니다. 나는 3월 2일 의금부로 이송되어 사형 선고를 받고, 3월 7일 새남터에서 브르트니에르, 도리, 볼리외 신부 등과 함께 군문 효수형을 당했습니다.

 

1861년에 나는 교황 성하께 이런 편지를 쓴 적이 있습니다. "작년에 일어났던 박해는 완전히 끝났고 저희가 가꾸어야 할 밭에는 다시 꽃이 피어 올해에는 근 8백 명이나 되는 성인들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선교사로서 느낄 수 있는 충만함에 더하여 선교지의 백성들을 위해 순교할 수 있는 은총까지 주셨으니 천국으로 들어가는 그 순간 내가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교회와 역사, 2011년 7월호]

 


 

 

성 시메온 프랑수아 베르뇌 주교(Simeon Francois Berneux, 탁희성 비오 작)

 

성 장 시므온 베르뇌(Berneux) 주교(1814-1866)

조선교구 제 4대 교구장

 

한국 이름은 장경일(張敬一), 조선교구 제 4대 교구장이다. 성 장 시므온 베르뇌 주교는 이 땅에서의 10년 간 사목활동 중 배론에 한국 최초의 신학교를 설립하고 서울에 두 개의 인쇄소를 설치하는 등 훌륭한 업적을 남겼으며 역사상 가장 혹독했던 1866년의 병인 대박해로 순교하여 주님의 품에 안겼다. 프랑스의 '르망' 교구 출신인 장 주교는 1837년 사제로 서품되어 동양 포교지의 하나인 월남으로 건너갔다. 그는 그곳에서 체포되어 2년간의 감옥생활을 치르고 사형선고까지 받았으나 다행히 석방되어 만주 요동 지방에서 10여 년 간 활동하였으며, 그곳에서 조선교구 제 4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1856년 3월 서울에 도착하였다.

 

천사적인 신심과 깊은 신학 지식을 겸비한 드문 능력가였던 그는 엄한 극기 생활과 당뇨병에서 오는 심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쉴 새 없이 사목에 주력했으며 바쁜 주교직을 수행하면서도 신부 3, 4인이 맡아 볼 그런 넓은 지역을 직접 도맡아 보았다. 과연 한국교회는 그의 밑에서 놀라운 발전을 보았으며 교우들은 더 잘 교육되고 신자 수는 배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그는 1866년 2월 뜻밖에도 모진 박해가 일어나 2월 23일에 체포되었다. 장 주교는 신문을 받을 때 자기가 이 땅에 온 것은 오로지 한국인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라고 밝히고 따라서 강제로 끌려가기 전에는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을 뜻을 밝혔다. 그는 감옥에서 앞 무릎에 곤장 열 대를 맞았으나 얼굴에 고통의 빛을 조금도 보이지 않았으며 3월 7일 백, 서, 김 세 신부와 함께 새남터 형장으로 향하였다.

 

당시 군인으로서 장 주교의 순교 장면을 목격한 박 베드로는 그의 순교 사실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형장에 이르자 주교와 세 신부의 옷을 벗겼다. 이어 사형 선고문의 낭독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들은 형벌을 받는 동안 즐거워 보였다. 마침내 망나니의 두 번째 칼날에 당년 52세인 장 주교의 목은 땅에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