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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103위 성인들

성 브르트니에르 유스토(Bretenieres Justus)

by 파스칼바이런 2012. 9. 29.

성 브르트니에르 유스토(Bretenieres Justus)

축일 9월 20일

 

 

 

신    분: 신부, 순교자

활동지역: 한국(Korea)

활동연도: 1838-1866년

같은이름: 브르뜨니에르, 유스또, 유스뚜스, 유스투스 

 

성 시몽 마리 앙트완 쥐스트 랑페르 드 브르트니에르(Simon Marie Antoine Just Ranfer de Bretenieres) 신부의 세례명은 유스투스(또는 유스토)요, 한국 성은 백(白)이다. 그는 1838년 2월 28일 프랑스 디종(Dijon) 교구 관할인 샬롱쉬르손(Chalon-sur-Saone)에서 브르트니에르 남작과 안나(Anna de Montcoy)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나, 형이 이미 8년 반 전에 사망한 터였으므로 태어나자마자 장남이 되었다. 그의 부모는 매우 신심 깊은 어른이었기에 자녀들의 신앙생활을 늘 뒷바라지하였다.

 

그러던 중 1859년에 브르트니에르는 파리(Paris)에 있는 성 쉴피스(Sulpice)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 후 1861년 7월 25일 파리 외방전교회의 신학교로 편입하였다. 그는 1864년 5월 21일 성품성사를 받았고, 첫 미사를 지낼 때에 순교의 특은을 기도하였다고 한다. 1864년 장상이 조선 선교를 명하자 그는 "이 나라가 바로 내가 그토록 가고 싶었던 곳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는 볼리외(Beaulieu, 徐沒禮) 신부, 위앵(Huin, 閔) 신부, 도리(Dorie, 金) 신부 등과 함께 본국을 떠나 홍콩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조선 입국을 위해 상해, 요동 등을 거쳐 많은 고난을 겪은 끝에 충청도 내포 지방에 상륙하여 마침내 1865년 5월 27일 조선 땅을 밟았다. 그들이 서울에 있는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와 연락할 방도를 찾던 중, 마침 다블뤼(Daveluy, 安敦伊) 부주교의 집에 화재가 나서 바로 그곳 내포 지방에 피신해 있었기 때문에, 다블뤼 부주교의 안내로 브르트니에르 신부는 베르뇌 주교를 대면한 후 정의배 회장 집에 거처를 정하였다. 그는 한국말을 배우며 베르뇌 주교를 도와서 밤을 이용하여 전교활동을 막 시작하여 80명에게 고해성사를 주고, 40여 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런데 1866년 2월경 뜻하지 않은 대박해가 일어났다. 2월 23일에 베르뇌 주교가 체포되자 브르트니에르 신부는 곧 지방에 있는 모든 동료 성직자들에게 이 놀라운 박해 소식을 인편을 통해 알리고, 24일에는 그도 체포될 각오를 하고 신발을 신은 채로 마지막 미사를 올렸으며, 25일에는 정의배 회장이 체포되었고, 27일에는 이선이의 고발과 안내로 브르트니에르 신부도 체포되고 말았다. 그는 결박을 당하지 않은 채 순순히 포도청으로 끌려가서 그곳에서 하룻밤을 지낸 후, 옥사장에게 "나는 조선 사람인 여러분들의 영혼을 구해주려고 나왔으므로 주님을 위해 기꺼이 죽겠소."라고 하여 베르뇌 주교가 갇힌 의금부로 이송되었다.

 

대원군은 브르트니에르 신부에게 별로 문초나 심문을 하지 않은 채 그냥 형벌을 가하게 하였다. 3월 5일 문초에서 관리들은 그에게 "차마 죽일 수 없어 본국에 돌려보내 주려는데 어떠한가?"라고 하자 그는 "이 나라에 와서 해를 넘겼습니다. 이 나라 풍습에 익어 이곳에서 여생을 즐기려 하는데 어찌 돌아갈 마음이 있겠습니까? 생사에 구애를 받아 변심하지 않으렵니다."라고 당당하게 대답하였다.

 

드디어 그는 베르뇌 주교와 같은 날인 1866년 3월 6일 사형선고를 받고, 이튿날 7일에 사형 집행 장소인 새남터로 향하였다. 그리고 새남터에 도착하여 귀에 화살을 꽂고, 조리 돌리는 등의 형벌을 받으면서 사형절차를 기다리는 중 브르트니에르 신부가 심한 갈증 때문에 물을 청하니 동정심 많은 한 병졸이 물을 주려고 하였다. 그때 다른 병졸 하나가 "곧 죽여야 할 죄인에게 물을 주어서 무엇 하겠는가?" 하면서 그 물을 땅바닥에 쏟아버렸다.

 

끝으로 그는 베르뇌 주교와 마지막 대화를 나눈 다음 베르뇌 주교의 참수 광경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그런 후 드디어 그의 차례가 되어 네다섯 번 내리친 칼날에 참수되어, 그가 어릴 때부터 갈망해오던 순교자들의 대열에 끼게 되었다. 이때가 1866년 3월 7일이고, 그의 나이는 28세였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수원교구 미리내 성지의 103위 시성 기념성당 옆벽에 설치된 한국 순교성인화

성 도리 헨리코, 성 브르트니에르 유스토, 성 베르뇌 시메온, 성 볼리외 루도비코

 

성 시몽 마리 앙트완 쥐스트 랑페르 드 브르트니에르 신부

(Simon Marie Antoine Just Ranfer de Bretenieres, 탁희성 비오 작)

 

한국의 파리 외방전교회 12명의 순교자들

이 작품은 한국에서 순교한 파리 외방전교회 출신 12명의 순교자들을 그린 작품이다. 이 중에서 10명이 1984년 5월 6일 여의도 광장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한국의 103위 순교성인의 일원으로 시성되었다.

 

 

성 시몽 마리 앙트완 쥐스트 랑페르 드 브르트니에르

(Simon Marie Antoine Just Ranfer de Bretenieres)

 


 

병인년의 선교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