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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103위 성인들

성 손선지 베드로(孫-- Peter)

by 파스칼바이런 2012. 9. 29.

성 손선지 베드로(孫-- Peter)

축일 9월 20일

 

성 손선지 베드로(Petrus)

 

신      분: 회장, 순교자

활동지역: 한국(Korea)

활동연도: 1820-1866년

같은이름: 베드로, 베드루스, 손 베드로, 손베드로, 페드로, 페트로, 페트루스, 피터

 

성 손선지 베드로(Petrus)는 충청도 임천 지방의 고인돌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모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으며, 어릴 때부터 남달리 신앙과 품행이 뛰어났다. 어른이 되자 샤스탕(Chastan, 鄭) 신부는 그를 전교회장으로 임명하였다. 결혼하여 슬하에 두 자녀를 두었던 그는 인자한 가장으로서 자녀 교육에 힘쓰며 사소한 일이라도 소홀히 하지 않아 모범적인 신자 가정을 이루었다. 그가 거처하던 집은 마을의 공소였기 때문에 더욱 세심한 주의와 노력으로 언제나 신자들을 위하여 봉사하며 살았다.

 

그가 47세가 되던 1866년 추수기에 접어들자 신자들에 대한 박해가 좀 완화되는 듯 하다가 얼마 후 더욱 혹심한 박해로 변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의 공소 예절에서 그는 신자들을 보고 "곡식이 익으면 바람결에 날리어 땅에 떨어지는 법입니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다가올 박해에 나 같은 사람도 당신 곳간에 가두시려는 모양이군요." 하며 자기는 순교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무사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피신하라고 당부하였다.

 

그해 12월 3일 저녁 그는 가족과 함께 기도를 하고 있는데 집 밖에서 부르는 소리를 듣자, 즉시 상황을 알아차리고서 재빨리 가족들에게 피하라고 말한 뒤에 자신이 교우임을 자백하여 순순히 체포되었다. 포졸들은 그를 구진포리 주막까지 데리고 가 먼저 이곳에 붙잡아 온 다른 신자들과 함께 밤을 지내게 하였다. 그 사이 손 베드로의 어머니는 마을 원님을 찾아가 아들을 좀 구해달라고 애걸하였다. 또 손 베드로의 아들이 감영에 수시로 드나들며 아버지의 구명운동을 한다는 소식을 듣자, 그는 아들의 효심에는 감동하였으나 크게 꾸짖고는 "나에게는 큰 유혹이 된다. 내 말을 듣는 순간부터 그런 짓을 다시는 하지 말고,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감영에 오지 말라"고 하면서 일을 중지시켰다.

 

다음날 그는 전주 감사 앞으로 압송되었다. 그가 전교회장이라는 것을 알고 고문과 주리를 잔인하게 가하다 못해 그의 팔까지 부러뜨렸다. 그가 처형장으로 나설 때 남아서 기다리는 다른 신자에게 자기 옷을 주면서 "나는 이제 죽으러 가오. 이 옷은 더 이상 내게 소용이 없으니 이 옷을 입으시오"라고 말하였다.

 

이윽고 사형장에 도착한 그는 하늘을 향해 '예수 마리아'를 부르고 기도했는데, 희광이가 칼로 그의 어깨를 내려치자 그는 머리를 쳐들고 "장난하지 마시오."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고 한다. 이리하여 그는 전주 숲정이에서 1866년 12월 13일에 순교하였고, 이때 그의 나이는 47세였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손선지 베드로(孫-- Petrus, 탁희성 비오 작)

 

[한국교회 선교의 뿌리를 찾아서] 평신도 - 성 손선지 베드로

16세 어린 나이에 전교회장 직분 수행

 

힘든 생활에도 신앙 지키며 교우들 도와

1866년 병인박해 때 참수형 받고 순교

 

남다른 신앙심이 눈에 띄어 전교회장으로 임명된 여러 평신도들 가운데 손선지(베드로) 성인이 있다. 1866년 병인박해 당시 순교한 손 성인은 16세의 어린 나이로 샤스탕 신부에 의해 전교회장에 임명됐다.

 

어린 나이에도 회장의 직분을 충실히 수행하며 신앙의 명맥을 이어왔던 그는 순교할 때도 끝까지 신앙을 잃지 않았을 뿐 아니라 함께 갇힌 교우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회장의 모범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1820년 충청도 임천군 팔충면에서 손달원(이냐시오)과 임 체칠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손선지 성인은 부모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신앙에 입문해 성실한 신앙생활을 해왔다. 그러던 가운데 전교회장으로 임명, 김 루치아와 혼인한 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충청도 진잠 장안리로 피신해 장남 손순화를 낳았다.

 

이후 전라도 고산 다리실로 이사해 지내다가 다시 소양면 대성동 신리골로 옮겨 다니며 담배농사를 주업으로 생계를 꾸리는 등 갖은 고생을 하면서도 신앙을 지켰으며, 힘든 생활에도 불구하고 공소회장 일을 계속하며 교우들의 신앙을 도왔다고 전해진다.

 

지난해 서울 절두산성지에서 공개된 손선지 성인의 '베네딕도회 메달'은 그가 가진 신앙심과 회장으로서의 역할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손 성인이 가지고 있던 성인 검지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메달이 어떻게 한국에 들어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전교회장으로서 선교사에게 건네받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1866년 12월 5일, 병인박해가 시작되면서 포졸들에게 붙잡혀 정문호(바르톨로메오), 한재권과 함께 전주감영으로 끌려갔으며, 신문을 받던 중 회장임이 탄로나 공소를 거쳐 간 서양신부와 교회서적의 출처를 알아내려는 관헌들로부터 가혹한 형벌과 고문을 당했다.

 

같은 해 12월 13일, 북문 밖 진터 숲정이에서 대성동과 성지동 일대에서 체포된 5명의 신자들과 함께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당시 손 성인의 나이 47세였다. 1968년 복자품에 올랐으며,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됐다.

 

[가톨릭신문, 2011년 9월 25일, 오혜민 기자]

 


 

 

손선지 성인 후손들 성인화 기증

 

 

한국 순교자 103위 시성 25주년을 맞아 손선지 성인의 자손이 손 순교자의 성인화를 서울대교구에 기증했다.

 

손선지 성인의 6대손 손기영(안드레아·66·서울 수궁동본당) 전옥희(막달레나·63) 부부는 4월 29일 염수정 주교(서울대교구 총대리)에게 성인화를 전달했다. 성인화는 손선지 성인의 5대손 손수득(바오로·83) 화백이 성인의 두개골과 후손들의 생김새를 참조해 그린 것이다.

 

손기영씨는 "25년 전 시성식 때 성인화를 준비해 참가했고 지금까지 집에서 보관해왔다"며 "이번 시성 25주년을 맞아 기증을 결심하게 됐다"고 말했다.

 

손선지 성인은 한국 순교자 103위 중 한 명으로 16세의 어린 나이로 전교회장에 임명됐으며 병인박해 당시 전주 숲정이에서 순교한 인물이다. 서울대교구는 손선지 성인의 성인화를 절두산 순교성지 박물관에 보관하기로 했다.

 

[가톨릭신문, 2009년 5월 10일, 오혜민 기자]

 


 

 

 

성 손선지 베드로(1820-1866)

 

일명 '승운'으로도 불리는 성 손선지 베드로는 충청도 임천의 '괴인돌'이라는 곳에서 태어나 어려서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성격이 온순하고 착해 16세 때 정 야고보 샤스탕 신부에 의해 회장으로 임명되어 순교할 때까지 회장의 직무를 충실히 이행했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손선지는 전주 지방의 교우촌인 대성동 신리에 살며 자신의 집을 공소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12월 5일 전라 감사의 체포령으로 대성동과 성지동을 급습한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정문호, 한재권 등과 함께 전주 감영 후면옥에 갇히게 되었다.

 

신문 중 회장의 신분이 탄로나 공소를 거쳐간 서양 신부와 교회서적의 출처를 대라는 관장에게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손선지는 회장답게 혹형과 고문을 이겨내며 함께 체포된 교우들을 위로하고 권면했다. 드디어 12월 13일 예수, 마리아를 부르면서 대성동과 성지동에서 체포된 5명의 교우와 함께 전주 서문 밖 '숲정이'에서 참수되어 47세로 순교했다.

 

- 성 정문호 바르톨로메오, 성 한재권 요셉과 함께 체포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