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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103위 성인들

성 손자선 토마스(孫-- Thomas)

by 파스칼바이런 2012. 9. 30.

성 손자선 토마스(孫-- Thomas)

축일 9월 20일

 

 

 

신      분: 농부, 순교자

활동지역: 한국(Korea)

활동연도: ?-1866년

같은이름: 도마, 손 토마스, 손토마스, 토마스, 토머스

 

성 손자선 토마스는 충청도 덕산군 홍주면 신리 마을 거더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3대째 천주교를 믿는 열심한 신앙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형과 아버지는 1868년에 순교하였고, 그의 당숙 손 니콜라우스(Nicolaus)도 순교하였다. 본래 부지런하면서도 성품이 침착한 그는 나무랄 데 없이 신심이 두텁고 명성이 높았으며, 자기 부인과 함께 아침기도와 저녁기도를 한 번도 거르는 일이 없을 만큼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는 오랫동안 내포 지방을 중심으로 전교했고, 순교 자료를 모아 성직자들에게 전하였으며, 그의 집에서 모든 공소 예절을 하였다.

 

1866년 드디어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포졸들이 손 토마스가 살고 있는 거더리 마을에 들어와 신자 집을 샅샅이 뒤져 많은 물건을 빼앗아 가면서, "손씨 집안에서 누구든 사람을 보내 몰수된 물건을 찾아가라"는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를 받고 용감한 손 토마스가 자진하여 덕산 관가에 나가서 찾아온 사유를 밝혔다. 이 때 원님이 그에게 천주교인인지 묻자, 그는 자기가 천주교 신자임을 밝혀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관가에서 갖은 고문으로 그의 의지를 꺾으려고 애썼으나 모두 허사였고, 곤장을 치다 못해 다리를 묶어 거꾸로 매달았다. 그리고는 토마스의 입에 여러 가지 쓰레기를 쏟아 부으면서 그때마다 "야, 좋지" 하고 놀려댔다. 손 토마스가 "좋습니다."라고 응수하자 “그래 무엇이 좋단 말이냐?” 하고 되물었다. 이때 손 토마스는 "나는 오늘까지 며칠을 두고 세수를 못했었는데 여러분들이 내 얼굴을 씻어 주고 있으니 어찌 좋은 일이 아니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피를 흘리게 한 죄인에게는 이같이 좋은 일이 없으며, 또한 목이 몹시 탔었는데 쓸개와 식초 대신 이런 것들을 내 입에 넣어주니 나는 마치 내가 범한 죄들을 마셔버리는 듯해서 무척 즐겁소." 하고 대답하였다.

 

그 후 덕산 원님은 손 토마스를 해미로 압송하였고 해미에서는 더 심한 형벌이 가해졌다. 두 무릎 사이에 몽둥이를 끼워 양쪽에서 틀자 살이 터지고 뼈가 부러졌다. 이 참혹한 형벌에도 태연히 버티는 그의 모습이 더욱 가증스러워 더 고생을 시키기 위해서 공주로 압송하였다. 공주에서 원님은 특수한 수단을 생각하여 "네가 배교하지 않는다는 증표로써 이빨로 너의 손 살점을 물어뜯어 보아라."고 하자,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자기 이빨로 손등을 물어뜯어 피가 흐르게 하였다. 관헌은 배교한다는 고백을 받기 위해 세 번씩이나 곤장을 쳤으나 그는 변함이 없었다. 결국 성 손자선은 1866년 부활 전날인 3월 31일 공주 감영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손자선 토마스(?-1866, 농부, 병인박해  때 교수)

 

성 손자선 토마스는 충청도 홍주 거더리 마을의 3대째 천주교를 믿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1866년 3월 거더리에서 안 안토니오 다블뤼 주교가 체포된 후 덕산 관아로부터 안 주교를 체포할 때 압수한 돈과 물건을 찾아가라고 기별을 받았으나 아무도 나서는 이가 없어서 그는 혼자서 그 물건들을 찾으러 덕산 관아로 갔다가 체포되었다. 덕산 관장은 손자선이 천주교인임을 알고 옥에 가두어 고문하며 배교를 강요했으나 굴하지 않자 해미로 보냈고, 해미에서 손자선은 두 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심한 고문과 심문을 받았으나 배교하지 않았다. 결국 공주 감영으로 이송된 손자선은 5월 18일 공주옥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성 손자선 토마스(孫-- Thomas, 탁희성 비오 작)

 

성 손자선 토마스(孫-- Thomas)

 

손자선은 충청도 홍주 거더리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3대째 내려오는 교우집안으로, 아버지와 형은 1868년 무진년 박해 때 순교하였고, 그의 당숙 손 니콜라오도 순교하였다. 부인과 함께 아침기도와 저녁기도를 중심으로 전교했으며 순교 자료를 모아 성직자들에게 전하였다.

 

1866년 3월 거더리에서 안 다블뤼 주교가 체포된 후 덕산관아로부터 압수한 물건을 찾아가라는 기별을 받았으나 아무도 나서는 이가 없었다. 그래서 손 토마스는 혼자 덕산관아로 가서 찾아온 사유를 밝혔다. 이때 원님이 천주교 신자냐고 묻자, 그는 신자임을 밝히면서 자신은 사실 죽음도 두렵지만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은 배교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토마스는 그 자리에서 즉각 체포되었고, 원님은 갖은 고문으로 그의 의지를 꺾으려고 애를 썼으나 모두 수포로 돌아가자 다리를 묶어 거꾸로 매달게 하였다. 그리고는 포졸들이 토마스의 입에 온갖 쓰레기를 쏟아 부으며 "야, 좋지!" 하고 놀려댔다. 토마스가 "좋습니다" 하고 응수하자, 포졸들은 "그래, 무엇이 좋단 말이냐?" 하고 되물었다. "나는 며칠동안 세수를 못했는데 여러분들이 내 얼굴을 씻어주고 있으니 어찌 좋은 일이 아니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피를 흘리게 한 죄인에게는 이같이 좋은 일이 없으며 또한 목이 몹시 탔는데 쓸개와 식초 대신 이런 것들을 내 입에 넣어주니 나는 마치 내가 범한 죄들을 마셔버리는 듯하여 무척 즐겁소" 하고 대답하였다.

 

그후 토마스는 여러 곳으로 옮겨다니며 더욱 참혹한 형벌을 받았고, 마침내 공주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손자선은 그곳 원님이 "네가 끝까지 배교하지 않는다는 증표로 네 손으로 네 살점을 떼내든지 아니면 피를 보이든지 하여라" 하고 말하자 즉시 자기 이빨로 손등을 물어 뜯었다. 원님도 어쩔 도리가 없어 "이젠 너는 살 길이 없구나" 하자 "죽어도 좋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결국 1866년 3월 30일 공주 옥에서 목을 졸려 순교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는 스물세 살이었다.

 

[경향잡지, 1996년 3월호]

 


 

 

 

 

 

대전교구 신리 성지의 다블뤼 주교관 모습입니다. 원래 손자선 토마스 성인의 생가였으나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의 주교관으로 사용되었던 집으로 2004년에 원형대로 초가집으로 복원되었습니다.

 

대전교구 신리 성지 야외성당 벽면의 대형 부조상 모습입니다. 2010년 7월 성 다블뤼 안토니오 · 성 손자선 토마스 기념성당 옆에 조성된 야외성당은 정면에 ‘순교자들의 부활’을 주제로 한 대형 부조상을 설치했습니다. 조각가 김종필(라파엘) 형제의 작품으로 중앙 조형물은 예수 그리스도가 강복하는 모습, 왼쪽에는 무명 순교자들의 무덤 앞에서 성 오메트르 신부와 황석두 성인이 하늘을 향해 팔을 들고 기도하는 모습, 오른쪽 조형물은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와 성 위앵 신부, 손자선 성인이 기도하는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