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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103위 성인들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Imbert Lawrence)

by 파스칼바이런 2012. 9. 30.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Imbert Lawrence)

축일 9월 20일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Laurent Imbert) 주교

 

신      분: 주교, 순교자

활동지역: 한국(Korea)

활동연도: 1796-1839년

같은이름: 라우렌시우스, 라우렌티오, 라우렌티우스, 로렌스, 로렌조, 범세형

 

성 로랑 조제프 마리위스 앵베르(Laurent Joseph Marius Imbert) 주교의 세례명은 라우렌티우스(Laurentius, 또는 라우렌시오)이며, 한국 이름은 범세형(范世亨)이다. 그는 1796년 3월 23일 프랑스 남부 엑스(Aix) 교구의 마리냔(Marignane) 본당 관할 브리카르(Bricart)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앵베르가 태어난 지 몇 달 후에 카브리에(Cabries)의 라보리(Labori)로 이사하였고, 앵베르는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의 집안은 가난하였지만 그 자신은 총명할뿐더러 기도나 공부에도 열심이었다. 어려서부터 스스로 묵주 만드는 법을 배워 공부를 하는 한편, 나이 많은 부친의 생활에도 보탬을 주었다고 한다.

 

그가 마음속에 동방의 포교지방에 대한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은 엑스의 대신학교를 다니면서부터였다. 그래서 그는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로 옮겨가 공부한 후, 1819년 12월 18일에 성품성사를 받고 곧 중국의 사천(四川)으로 파견되었다. 앵베르 신부는 12년 이상 사천에 머물렀다. 그는 중국의 언어와 풍습을 익혔으며, 모든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하던 중 1836년에 조선의 제1대 교구장 브뤼기에르(Bruguiere, 蘇) 주교의 보좌 주교로 임명되었으며, 이듬해 주교가 사망하자 곧 주교품을 받고 조선의 제2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그 해 12월 17일 중국 대륙을 건너 몽고의 서만자(西灣子)에 머물고 있던 그는 마침 조선 사신의 수행원으로 동행한 교우 조신철, 정하상 등의 협력을 얻어 조선 입국에 성공하였다. 이렇게 하여 조선의 교우들은 처음으로 주교를 맞이하게 되었으니, 실로 조선 교회가 설립된 지 53년만의 일이었다.

 

3개월 동안 조선말을 배운 앵베르 주교는 고백을 듣고서 성사를 줄 수가 있었다. 그는 이미 조선에 와 있던 모방(Manbant, 羅) 신부와 샤스탕(Chastan, 鄭) 신부와 함께 지방을 순회하기도 하고, 죽을 위험에 처해 있는 외교인 어린이에게 세례를 주는 운동도 전개하였다. 이때부터 조선 교회는 오랜 재난을 겪은 후 주교를 맞으면서 재생하기 시작하였다. 앵베르 주교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성스러운 직무를 수행하였다. 그는 항상 허약하고 병든 몸으로 매우 바쁜 생활을 하였지만, 한편으로 그것을 최대의 행복으로 삼고 있었다. 다만 그에게 무한히 괴로운 것은 박해로 말미암아 신입교우들의 신앙이 끊임없이 위협을 당한다는 사실이었다.

 

드디어 1839년 기해박해가 시작되었다. 곳곳에서 교우들이 체포되자 앵베르 주교는 박해가 퍼지기 전보다 더 많은 교우에게 성사를 주어야겠다고 생각하여, 교우들이 모여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리지 않고 모습을 나타내었다. 그러는 동안 사태는 점점 위태롭게 되어갔고, 배교자들의 자백으로 3명의 선교사들이 조선에 있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배교자 김여상은 관헌들과 짜고 주교를 유인하려고 하였으며, 주교는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스스로 자수의 길을 택하고, 다른 두 신부들도 주교의 권고를 받아들여 즉시 관청에 자수하도록 하였다. 포청의 옥중에서 세 선교사는 서로 만날 수 있었다. 주교는 여러 번 형벌과 고문을 당하였으며 두 신부들과 함께 옥중의 고초를 이겨냈다. 조선 정부는 그들이 절대로 배교하지 않을 것이라 믿고, 마침내 대역 죄인이라는 죄목으로 군문효수에 처하도록 판결을 내리고, 처형 장소는 한강변의 새남터로 결정하였다.

 

사형을 집행하는 날이 되자 세 선교사들은 팔을 뒤로 결박당한 채 가마를 타고 형장으로 끌려갔다. 형장에 이르자 군사들은 선교사들의 옷을 벗긴 다음 손을 앞가슴으로 결박하고, 겨드랑이에 긴 몽둥이를 꿰고, 화살로 귀를 뚫고, 얼굴에 회를 뿌린 다음 군중의 조롱과 욕설을 듣게 하였다. 그런 다음에 한 군사가 장대 위에 기를 올리고 또 다른 군사는 사형 선고문을 읽고 나서 수형자들을 무릎 꿇린 다음 열 명 가량의 병정이 달려들어 칼질을 했다. 그래서 한국 교회는 천신만고 끝에 얻은 성직자들을 3년 만에 잃게 되었다. 앵베르 주교는 1839년 9월 21일에 순교하였으며, 그의 나이는 43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서울대교구 설정 180주년 기념 지상전] 그리스도의 일꾼, 서울대교구장

제2대 조선 대목구장 로랑 조제프 마리위스 앵베르 주교

조선 땅을 밟은 최초의 주교 성인이 되다

 

 

천주는 찬미를 받으실지어다. 찬미를 받으실지어다. 내 피로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이제 내 자녀들 가운데 있습니다. 그들을 보는 것에서 느끼는 행복은 그들 있는 데로 오기 위하여 당해야 했던 고생을 잊게 합니다. 참말로 천주의 의도는 사람의 의도와 같지 않고 그분의의 길은 우리의 길과 다릅니다. - 앵베르 주교의 서한 중에서(1838. 11. 24일자)

  

앵베르 주교 이야기

 

나, 로랑 조제프 마리위스 앵베르(Imbert, Laurent-Joseph-Marius, 1796-1839)는 1796년 3월 23일 프랑스 남부 액스(Aix) 교구의 마리냔(Marignane) 본당 관할 브리카르(Bricart)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태어난 지 몇 달 후에 카브리에(Cabrie)의 라보리(Labori)로 이사하였고,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지요. 집이 가난하여 학교에 갈 수 없었기에 이웃 할머니의 도움으로 읽고 쓰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러다가 1807년경 그리스도교 은수회에서 운영하는 성 요아킴 기숙 학교에 들어갔고, 1812년에는 액스의 대신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어려 신학 공부를 마치고 나서 차부제품을 받지 못하였지요. 2년 동안 가정 교사로 시간을 보내다가, 1818년 10월 8일 에그벨(Aiguebelle) 트라피스트 수도원 원장의 배려로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연령 제한에 대한 특별 관면을 받은 뒤, 그해 12월 18일 사제로 서품되었습니다.

 

사제 서품 후 중국의 사천(四川) 선교사로 임명된 나는 12년 동안 중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였습니다. 나는 사천에서 조선 대목구의 설정 소식을 듣고, 1831년 파리 본부에 조선 선교를 자원하였습니다. 나의 지원은 즉시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브뤼기에르 주교가 선종하자 포교성성에서는 1836년 4월 26일에 나를 브뤼기에르 주교의 부주교로 임명하였고, 브뤼기에르 주교의 사망이 확인되자 나는 제2대 조선 대목구장이 되었지요.

 

1837년 12월 16일, 혹독한 추위와 긴장감에 떨던 나는 봉황성 변문에서 정하상, 조신철 등 조선 교회의 신자들을 만났습니다. 이들과 함께 길을 재촉하여 12월 31일 조선의 서울에 도착했지요. 조선 천주교회가 설립된 지 53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나는 서울 후동(后洞)의 정하상 집에 머무르며 한국어를 배웠는데 나름 열심한 덕분인지 3개월 후에는 한국말로 고해성사를 줄 수 있게 되었고, 5월부터는 본격적인 사목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우선적으로 신자들의 신심을 함양하고 방인 사제를 양성하는 등 조선 교회의 안정과 발전을 위해 내 노력의 전부를 다하였습니다. 먼저 한국어로 된 기도서가 없는 것을 알고 한국어 기도서의 편찬을 계획하였고, 마침내 '텬주 셩교 공과'와 '텬주 성교 십이단'을 완성하였지요. 또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와 함께 매괴회, 그리고 성의회 등 신심 단체를 설립하여 운영하였습니다. 또한 주을 위험에 처해 있는 외교인 아들에게 세례(洗禮)를 주는 일 등 일종의 성영회 활동에 신자들이 열심히 참여할 수 있도록 하였지요.

 

박해의 조짐이 보이던 1838년 말부터 나는 <1839년 조선 서울에서 일어난 박해에 관한 보고>라는 박해 일기를 작성하여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이 일기는 내가 체포된 뒤, 정하상, 현경련, 이문우를 거쳐, 최영수, 현석문, 이재의 등에 의해 '기해일기'로 완성되었지요. 사실 박해의 그림자는 1838년 말부터 서서히 나타나더니 다음 해인 1839년 초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6월 3일 손경서와 정화경이 마련한 수원 근교의 상귀로 피신하였습니다.

 

박해가 진행되는 동안 신자들은 무수히 잡혀들어갔고 나를 포함한 3명의 서양인 신부가 나라 안에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지요. 나는 곧 샤스탕 신부에게 "모든 것이 끝장났고 잔치를 끝내는 데에 빠진 사람이라고는 우리뿐입니다. 적어도 우리들 중의 한 사람은 자수해서 몸으로 값을 치르고 나머지 두 사람은 나라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러니 빨리 내게로 오시오" 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나는 샤스탕과 모방, 두 신부를 어떻게 해서든지 나라 밖으로 내보내고 나 혼자 박해의 칼날을 받을 생각이었지요. 그러나 천주의 의도는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체포된 우리 셋은 서울로 압송되어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839년 9월 21일 나는 두 신부와 함께 새남터에서 순교하여 천상의 기쁨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 가톨릭 성가 284번 악보(1932년 판)

 

뮈텔 주교가 감준한 “조선어성가”에 실려 있다. 구노가 한때 꿈꾸었던 선교와 순교의 꿈을 이룬 이들을 기리는 송가. 구노는 로마대상을 수상하고 로마로 공부하러 갔을 때인 1939년에 앵베르 주교, 모방 · 샤스탕 신부의 순교 소식을 듣고 이 곡을 작곡하여 천상의 월계관을 얻었음을 축하했다고 한다.

 

* 샤를 프랑스와 구노(Charles Francois Gounod, 1818-1893)

 

프랑스 작곡가이자 파리 외방전교회 오르간 주자로 활동하였다. 구노는 1846-1848년까지 생 쉴피스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여 사제가 되려는 꿈을 꾸기도 하였다. 일설에는 앵베르 주교와 구노가 친구이며 구노가 앵베르 주교의 순교 소식을 듣고 유명한 구노의 ‘아베 마리아’를 작곡했다고 하나 구노가 신학교를 다닐 때 앵베르 주교는 이미 순교하였기에 이는 별개의 사실들이 혼합되어 와전된 것으로 보여진다.

 

[교회와역사, 2011년 6월호]

 


 

 

성 로랑 조제프 마리위스 앵베르 주교(Laurent Joseph Marius Imbert, 탁희성 비오 작)

 

성 범 라우렌시오 앵베르(Imbert) 주교(1796-1839)

 

한국명은 범세형(范世亨), 조선교구 제 2대 교구장. 주교로서는 처음 한국 땅을 밟은 그는 같이 선교에 종사하던 나(모방), 정(샤스탕) 두 신부와 함께 1839년 기해박해 때 한강변 새남터에서 목을 잘려 순교하였다. 그는 조정에 의해 대박해가 일어나 더 이상 전교할 수 없게 되자 자신은 물론 나중에는 두 동료 신부들에게까지 "착한 목자는 자기 양을 위해 목숨을 바칩니다"라는 말로 자헌을 권유하였다.

 

범 라우렌시오 주교는 조선교구 초대 교구장인 소(브뤼기에르) 주교가 입국도 못한 채 병사하자 교황청에 의해 제2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1837년 5월, 주교로 성성되었으며 그 해 말 조선 입국에 성공하였다.

 

그의 입국으로 조선교구는 그보다 앞서 입국한 나, 정 두 신부와 더불어 교구 설정 6년만에, 그리고 교회 창설 53년만에 비로소 전교 체제를 갖추었으며 모든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복음전파에 힘쓴 결과 신자수는 1839년 초 9천 명을 넘게 되었다. 그는 또 한국인 성직자의 양성에도 뜻을 두어 정하상 등 네 명의 열심한 신자들을 뽑아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쳐 신부로 키우고자 하였으나 때마침 불어닥친 박해로 말미암아 성공하지 는 못하였다.

 

범 주교는 1796년 3월 프랑스에서 태어나 1819년 12월 파리 외방전교회의 신부가 되었으며 다음 해 3월 파리를 떠나 조선에 입국하기까지 중국 사천(四川) 교구에서 10여년 간 사목활동에 종사하였다. 1839년 대 박해가 일어났을 때 지방을 돌아보고 있던 범 주교는 조정에 의해 외국 선교사들의 입국 사실이 알려져 포졸들의 추적이 심해지고 교우들에 대한 박해가 가열되자 하는 수 없이 수원에서 가까운 바닷가 어느 교우집에 몸을 숨기었다. 여기서 그는 나, 정 양 신부를 불러 두 사람에게는 중국으로 피신할 것을 권하였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단념하고, 몸조심을 당부하며 두 사람을 각기 소임지로 돌려보냈다. 바로 이즈음 한 배교자의 책략으로 그의 거처가 알려지게 되자 그는 화가 여러 교우들에게 미칠 것을 염려하여 스스로 나아가 포졸들에게 잡히는 몸이 되었으며 나 신부와 정 신부에게도 인편으로 자수할 것을 권유하여 다같이 1839년 9월 21일 군문효수형에 처해졌다 이때 그의 나이는 43세, 조선에 입국한 지 불과 2년만이었다.

 


 

 

 

서울대교구 노고산 사적지(서강대학교 뒷산)를 기념해 서강대학교 교정에 마련된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순교 현양비 중 앵베르 주교 현양비 모습입니다. 2010년 11월에 찍은 사진입니다.

노고산은 천주교 박해 때 여러 처형장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이유로 많은 순교자들의 시신이 매장되었던 유서 깊은 사적지입니다. 현재 노고산 일대에는 예수회에서 운영하는 서강대학교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순교자들의 땅 위에 학교 부지를 마련한 서강대학교는 2009년 6월 15일 기해박해 당시 새남터에서 순교한 후 노고산에 4년 동안 매장되었던 앵베르 주교와 모방 · 샤스탕 신부를 기리기 위해 정문에서 가까운 가브리엘관 앞 소나무밭에 세 성인의 순교 현양비를 세우고 정진석 추기경의 주례로 축복식을 거행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