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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103위 성인들

성 오메트르 베드로(Aumaitre Peter)

by 파스칼바이런 2012. 9. 30.

성 오메트르 베드로(Aumaitre Peter)

축일 9월 20일

 

성 오메트르 베드로(Pierre Aumaitre) 신부

 

신      분: 신부, 순교자

활동지역: 한국(Korea)

활동연도: 1837-1866년

같은이름: 베드루스, 오매트르, 오메뜨르, 페드로, 페트로, 페트루스, 피에르, 피터

 

성 피에르 오메트르(Pierre Aumaitre) 신부의 세례명은 베드로(Petrus)이고 한국 성은 오(吳)이다. 그는 1837년 4월 8일 프랑스 앙굴렘(Angouleme) 교구 뤼페크(Ruffec) 본당의 에제크(Aizecq) 마을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조그만 농지를 경작하며 신을 만들어 팔아 생계를 꾸려갔는데, 모두 5남매를 키우고 있었다. 오메트르가 성실은 하였지만 학업 성적이 뛰어나지는 못하여 그가 신학교에 입학할 때 어려움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문에 그가 사제가 되고자 했을 때 본당신부는 그의 성품에는 감동했지만 성적을 보고는 반대했었다. 이런 어려운 과정을 거쳐 그는 소신학교에 입학하였는데, 공부의 부족함을 극복했을 뿐만 아니라 우등생이 되기까지 하였다. 그는 1857년 10월에 앙굴렘 대신학교에 진학했고, 1859년 8월 18일에 소품자(小品者)로 파리 외방전교회의 신학교에 입학했다.

 

그 후 1862년 6월 14일에 사제로 서품되었으며, 자신의 전교지가 조선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박해로 인해 조선 입국은 그리 쉽지 않았다. 그는 중국 어선으로 연평 바다를 거쳐 비교적 무사히 조선 땅을 밟게 되었는데, 이때가 1863년 6월 말이었다. 조선에 입국한 오메트르 신부는 우선 1개월 동안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와 함께 서울에서 지낸 후, 용인의 손골(경기도 용인군 수지면 동천리)로 내려가 조선말을 익혔다. 그 후 1864년 9월에는 경기도의 한 구역을 맡아 사목하였다.

 

입국한 지 2년 남짓 지났을 때 박해의 소문이 나돌았고, 베르뇌 주교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접할 때인 1866년 당시에 그는 수원의 샘골(泉谷里)에 있었다. 여기서 오메트르 신부는 다블뤼(Daveluy, 安敦伊) 주교를 만나기 위해 일단 교우들을 진정시키고 격려하면서, 미사 예절용 물건들을 모두 감추고 다블뤼 주교가 있는 신리 마을로 갔다. 이것은 오메트르 신부가 교우들에게 더 큰 피해가 없도록 하기 위해 자수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해서 다블뤼 주교의 집에 있던 포졸들은 다블뤼 주교뿐만 아니라 다른 신부들도 체포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포졸들은 주교를 위시하여 위앵(Huin, 閔) 신부와 오메트르 신부를 홍주 옥으로 일단 끌고 갔다가 다시 서울로 압송하여 투옥시켰다. 문초를 받는 동안 주리 틀림 등 온갖 고문을 당하면서도 신앙을 고백하였기에, 결국 오메트르 신부를 포함한 세 선교사들은 모두 사형선고를 받고 2백 50리나 떨어진 충청도 보령 수영(水營)의 갈매못 사형장으로 끌려가 1866년 3월 30일 참수 치명하였다. 바로 그 날이 성 금요일 주님의 수난일로 그들이 처형된 시간이 예수께서 운명하신 시간이었다고 전해온다. 그때 그의 나이는 29세였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피에르 오메트르 신부(Pierre Aumaitre, 탁희성 비오 작)

 

성 오 베드로 오매트르(Aumaitre) 신부(1837-1866)

 

한국성은 오(吳),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으로 1866년 병인년에 순교한 프랑스인 선교사. 프랑스 '앙굴램' 교구 출신인 성 오 베드로 오매트르 신부는 1862년 사제로 서품되어 이듬해인 1863년 6월 임지인 조선 땅을 밟았다. 그는 경기도 수원 근방 샘골에서 한국말을 익히고 곧 충청도 홍주의 '거더리'에서 전교에 종사했다.

 

그러나 1866년 박해가 일어나고 동년 3월 안 주교가 체포되자 한때 피신코자 배를 탔으나 거센 역풍으로 뜻을 못 이루고 다시 '거더리'로 돌아와 즉시 체포되는 몸이 되었다. 그는 동반 순교자인 안 주교, 민 신부 등과 함께 일단 서울로 압송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충청도 수영 '갈매못'에서 3월 30일 처형되었다. 오 신부는 안 주교 다음 두 번째 칼날에 29세의 젊은 나이로 자신을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하였다.

 


 

 

 

 

 

 성금요일의 순교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