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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103위 성인들

성 위앵 마르티노 루카(Huin Martin Luke)

by 파스칼바이런 2012. 10. 1.

성 위앵 마르티노 루카(Huin Martin Luke)

축일 9월 20일

 

성 위앵 마르티노 루카 신부(Martin Luke Huin)

 

 

신      분: 신부, 순교자

활동지역: 한국(Korea)

활동연도: 1836-1866년

같은이름: 누가, 루가, 루까, 루카스, 루크, 마르띠노, 마르띠누스, 마르티누스, 마틴, 말딩

 

성 마르티노 루카 위앵(Martin Luc Huin) 신부의 세례명은 마르티누스 루카(Martinus Lucas)이며, 한국 성은 민(閔)이다. 그는 1836년 프랑스 랑그르(Langres) 교구의 기용벨(Guyonvelle)에서 태어났다. 포도밭을 경작하던 그의 부친은 항상 그의 가문에서는 성직자와 수도자가 많이 배출되었음을 자랑하면서 9남매가 모두 훌륭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교육시켰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막내로 태어난 위앵은 1851년에 랑그르 소신학교에 입학하였고, 1856년 10월에 랑그르 대신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861년 6월 29일 사제로 서품되어 랑그르 교구의 사제가 되었다.

 

그 후 그는 믈레(Melay)와 부아제(Voisey) 본당에서 보좌신부로 활동하면서도 선교사제의 꿈을 키우다가 마침내 1863년 8월 20일 교구장 주교의 허락을 받고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였다. 그리고 1864년 6월 13일에 자신이 전교해야 될 지방이 조선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는 기뻐하며 부모님에게는 물론 옛날 본당 신부님에게도 편지를 썼다고 한다.

 

1864년 7월 15일 위앵 신부는 브르트니에르(Bretenieres, 白) 신부, 볼리외(Beaulieu, 徐沒禮) 신부, 도리(Dorie, 金) 신부와 함께 전교지인 조선을 향해 파리(Paris)를 떠나 홍콩, 상해를 거쳐 1864년 11월 만주의 차쿠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조선과의 연락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아 한문과 조선어 공부를 하며 그 해 겨울을 지냈다. 그 이듬해인 1865년 5월 27일에 비로소 위앵 신부는 일행과 함께 충청도 내포 지방에 상륙하여 다블뤼(Daveluy, 安敦伊) 주교의 환영을 받으면서 조선에 입국하였다.

 

도착 후 위앵 신부는 6월 18일까지 다블뤼 주교와 함께 내포 지방에서 조선어 공부를 하며 지내다가, 그 후에는 내포 지방에서 20리쯤 떨어진 당진 합덕 지방의 세거리 공소로 떠났다. 위앵 신부는 1866년 2월에 벌써 교우들의 고해성사를 듣고 신자들을 가르칠 수가 있었다. 위앵 신부는 박해 직전까지 5백여 명에게 고해성사를 주었고, 15명 내지 20명에게 병자성사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몇몇 교우들에게 혼인성사도 집전해 주었다.

 

1866년 3월 12일 그는 다블뤼 주교의 편지를 받고 순순히 체포되어 다블뤼 주교, 오메트르(Aumaitre, 吳) 신부와 함께 3월 19일 서울로 압송되어 의금부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1866년 3월 30일 보령 수영 갈매못에서 순교의 월계관을 쓰게 되었다. 이때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내 마음에 아픈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이토록 젊은 나이에 죽는다는 것도 아니요, 이곳과 같은 처절한 장소에서 죽게 된 때문만도 아니라, 이 나라 불쌍한 백성들의 구령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죽게 되니 그것만이 마음 아플 뿐이오." 그의 유해는 현재 절두산 순교 기념관 지하성당에 모셔져 있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위앵 마르티노 루카 신부(Martin Luke Huin, 탁희성 비오 작)

 

성 민 루카 위앵(Huin) 신부(1836-1866)

 

한국 성은 민(閔),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한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 프랑스 '랑그르' 교구 출신인 민 신부는 1861년 사제가 된 후 1865년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로 백, 김, 서 신부와 함께 조선에 파견되었다. 그는 도착지인 충청도 내포에 머물면서 안 주교로부터 한국말을 배운 후 홍주 황무실에 부임하여 전교하였다.

 

1866년 3월 11일 안 주교가 체포되자 안 주교의 지시로 자수하여 안 주교, 오 신부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어 갖은 악형을 겪은 후 사형이 선고되었다. 그는 형장이 충청도 수영으로 결정되어 안 주교, 오 신부와 함께 3월 30일 수영에 도착, 그곳 '갈매못'에서 당일로 군문효수되었다. 그는 30세의 나이로 이 땅에 신앙의 씨앗을 뿌리고 주님 품에 안겼다.

 


 

 

대전교구 신리 성지 성 다블뤼 안토니오, 성 손자선 토마스 기념성당 성체조배실의 성인 이콘 모습입니다. 성당 뒷편 2층에 있습니다. 2010년 11월에 찍은 사진입니다.

신리 성지는 박해시대의 교우촌으로 손자선 토마스 성인의 생가이자 조선교구 제5대 교구장인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가 머물며 내포지방의 선교활동을 지휘하던 주교관이자 교구청으로 사용된 초가집이 복원되어 있는 유서 깊은 사적지입니다. 이곳에서 다블뤼 주교는 초기 순교자들의 행적과 교회사를 정리하여 "비망기"(備忘記)를 작성해 파리로 보냄으로써 한국 교회사의 귀중한 사료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각종 교회서적을 집필하고 출판함으로써 근대적 출판 인쇄를 시작하였습니다. 또한 다블뤼 주교는 동료 선교사와 함께 주교관 인근 거더리에서 체포되어 갖은 고문 끝에 보령 갈매못에서 성 금요일에 순교하셨습니다.

 

 

 

 

  

 성금요일의 순교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