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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103위 성인들

성 유정률 베드로(劉正律 Peter)

by 파스칼바이런 2012. 10. 1.

성 유정률 베드로(劉正律 Peter)

축일 9월 20일

 

성 유정률 베드로(劉正律 Petrus, 탁희성 비오 작)

 

 

신      분: 회장, 순교자

활동지역: 한국(Korea)

활동연도: 1837-1866년

같은이름: 베드루스, 유 베드로, 유베드로, 페드로, 페트로, 페트루스, 피터

 

성 유정률 베드로(Petrus)는 평안도 윤리면 논재골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 부모를 잃어 고아가 되었는데, 호구지책으로 짚신을 삼아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또 어쩌다가 돈이 조금 생기면 노름판에 뛰어가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는 이덕표라는 친척의 권유로 천주교를 알게 되었고, 그 후 교리를 배워 서울에 있던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로부터 1864년경에 영세 입교하였다.

 

그는 순교할 때까지 극히 짧은 신앙생활을 했지만 그 열심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그는 세례를 받은 후에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발견하였노라" 하며 자신의 기쁨을 큰소리로 표현했다. 그러나 원래 성격이 급했던 그는 자기 아내가 고집을 부리고 대들면 참지 못하여 부부 싸움을 하고 또 다투다가 아내를 때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그가 영세한 뒤로는 아내 때리는 버릇을 고치기 위해 짚신처럼 생긴 나무토막을 가지고 자기 몸을 사정없이 때리고 때로는 피를 흘려가면서 자문자답하기를 "너 아프지? 제가 아프면 또한 네가 때리는 남도 아플 것이 아니겠느냐?"고 하였다. 그러므로 옆에 있는 부인도 크게 달라진 남편을 보고 감화를 받아 마침내 착하고 상냥한 아내가 되었다.

 

이렇게 신앙생활을 시작한 유 베드로의 마음속에 점차 신앙의 열이 더해감에 따라 많은 이들을 교회로 이끌어 영세 입교시켰다. 1866년 초 그는 친척집을 찾아다니면서 "평안히 계십시오. … 오늘 가면 언제 다시 뵐지 모르겠습니다. …" 하는 밑도 끝도 없는 고별인사를 하여 듣는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바로 그날 저녁 무렵에 그는 공소가 있는 고둔리라는 마을로 가서 신자들이 함께 기도하고 새해 인사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날 밤에는 유달리 교우들이 많이 모였기 때문에 회장이 복음을 읽고 강론을 하려고 할 때 갑자기 포졸들이 들이닥쳤다. 교우들은 당연한 듯 조용히 체포되었으나, 마침 그날이 설날이었으므로 포졸들에게 술을 대접하는 틈을 이용하여 많은 신자가 피신하고 유 베드로와 몇 명의 신자들만 남아 포졸들에게 잡혔다. 포졸들과 먼 길을 가는 동안 유 베드로는 "오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주 예수께서 우리를 불러 주셨도다." 하며 마냥 즐거워하면서 평양 감영으로 끌려갔다.

 

이윽고 문초가 시작되자 신자들은 한결같이 신앙을 고백하였으나, 심한 곤장을 맞고는 4명이 배교하고 유 베드로와 정 회장만이 남았다. 또 그 얼마 후 정 회장도 친구들과 배교자들을 따라 가니 결국 유 베드로 혼자 남게 되었다. 그러자 화가 치민 감사는 배교자들을 불러 들여 곤장을 주면서 유 베드로를 쳐 죽이라고 명을 내리니, 배교자들은 제 목숨을 건지기 위해 유 베드로를 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유 베드로는 자기를 때리는 동료들에게 "살이 살을 잡아먹는구나." 하면서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그 후 배교자들은 감사의 명에 따라 그의 시신을 대동강에 버렸는데, 얼마 후 붉은 피가 물 위로 번져 나갔고, 신기하게도 그의 시체는 가라앉지 않고 언제까지나 둥둥 떠 있었으며, 매 맞은 자리는 이상한 광채가 나며 빛났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때가 1866년 2월 17일이며, 그의 나이는 30세였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엄마가 들려주는 성인이야기

유정률 베드로 성인

김혜영(율리엣다)|동화구연가, 대잠성당

 

유정률 베드로 성인은 1837년 평안도 율리면 논재골에서 태어났어요. 그는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고아가 되어, 짚신을 삼아 생계를 이었어요. 그는 성격이 불같이 급했어요. 아내가 자기에게 고집을 부리고 대들면 이를 참지 못해 자주 부부 싸움을 했으며, 다투다가 아내를 때리기도 했어요. 또 어쩌다가 돈이 조금 생기기라도 하면 곧장 노름판으로 뛰어가곤 했지요. 그러나 한편으로는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늘 약자의 편에 서는 정의로움도 있었어요. 한번은 이웃집에서 불이 났는데, 위험을 무릅쓰고 용감히 불 속으로 뛰어들어 어린아이를 구해내기도 했어요. 이 일로 인해 그는 마을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게 되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이덕표라는 친척의 소개로 천주교를 알게 되었어요. 그 후, 그는 이웃에 사는 정태현 빈첸시오와 함께 천주교 교리공부를 시작했어요. 그리고 1864년, 서울로 올라와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베르뇌 주교에게 세례를 받았어요.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발견했다!" 세례를 받고 그는 무척 기뻐하며 큰 소리로 이렇게 말했어요.

 

그날부터 유정률은 완전 딴사람이 되었어요.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우선 노름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지난날의 방탕했던 생활을 반성했어요. 그는 아내에게도 지난 일들을 속죄하는 뜻에서 더욱 따스한 사랑으로 대했고, 가난한 살림으로 고생시킨 것에 대해 늘 마음 아프게 생각했어요. 그는 아내를 때리는 버릇을 고치기 위해 짚신골로 자기 몸을 채찍질하며 때로는 피를 흘리기까지 했어요.

 

"너 아프지? 네가 아프면 네가 때린 남도 아플 것이 아니냐! 내가 아내에게 준 고통을 생각한다면 이까짓 내 몸의 괴로움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다."그는 이렇게 스스로를 자책하며 극기와 인내로 새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어요. 그의 아내는 남편의 달라진 모습에 크게 감동을 받았어요. 그래서 그녀 또한 자신의 고집을 누그러뜨리려고 애쓰며, 남편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어요. 유정률은 믿음으로 충만해져서 주위의 사람들에게 천주교를 알리며 많은 사람들을 입교시키게 되었어요.

 

1866년 초 천주교인들에 대한 박해가 시작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어요. 그 또한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예감했지만 사람들 앞에서 내색하지는 않았어요. "우리의 믿음의 앞길에 어떠한 먹구름이 뒤덮혀도 그 신심을 굽히지 말 것이며. 하느님께 부끄럽지 않도록 떳떳한 죽음으로써 영생의 복을 찾아야 하오." 그는 아내에게 이렇게 일러두며 아내와 함께 더욱 진실한 마음으로 기도했어요. 음력 정초가 되어 그는 친척집을 찾아다니며 새해 인사와 함께 뜬금없는 인사말을 전했어요. "평안히들 계십시오. 우리는 서로가 언제 떨어지게 될지 모르지만 다시 만날 날이 있을 것이며, 똑같이 주님 곁에서 뵈올 것을 간절히 바랍니다." 사람들은 그의 이 말에 모두 어리둥절해 했어요. 그는 인사를 끝내고 정태현 빈첸시오가 회장으로 있는 고둔리 마을로 향했어요.

 

고둔리의 공소 강당에는 새해를 맞아 평소보다 많은 교우들이 모여 있었어요. 정 회장이 복음말씀을 읽고 강론을 하려는 즈음, 마을 어귀에서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어요. 잠시 후, 교우 하나가 밖에 나갔다가 되돌아와 낯선 사람들이 집 주인을 찾는다고 말했어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몇 명의 포졸들이 험악한 얼굴을 하고 강당 안으로 들어서며 소리쳤어요. "감사님이 너희들을 보고자 하신다!" 교우들은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터라 갑작스레 들이닥친 포졸들을 보고도 그리 당황하지는 않았어요. 정 회장은 때가 마침 정초였기 때문에 설날을 위해 준비했던 음식을 포졸들에게 차려 주고 술을 따라 주었어요. 이들이 술에 취하고 기분이 좋아지자, 정 회장은 이 틈을 타 많은 신자들을 피신시켰어요. 그리하여 강당 안에는 정 회장과 그의 조카 그리고 유정률, 우세영과 다른 4명의 교우만이 남게 되었어요.

 

다음 날 아침, 포졸들은 후한 대접을 받은 대가로 이들만을 잡아 결박하지도 않은 채로 길을 떠났어요. 먼 길을 가는 동안 유정률은 마냥 기뻐하며 말했어요. "오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주 예수께서 우리를 불러 주셨도다." 평양 감영으로 끌려온 이들은 다음 날, 이미 체포된 100여 명의 교우들과 함께 평양감사 정지용 앞에 끌려 나갔어요. 그들 주위에는 200여 명의 군졸들이 버티고 서 있었어요. 문초가 시작되자 신자들은 한결같이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키겠노라 고백했어요. 그러나 심한 곤장이 수차례 계속되자 대부분의 교우들은 이를 이기지 못해 배교하여 풀려나가고 유 베드로와 정 회장만이 남았어요. 그러나 오래지 않아 정 회장마저 친구들과 배교자들을 따라 풀려나니 결국 유정률 혼자만 남게 되었지요. 감사는 그가 꿈쩍도 하지 않자 엄청나게 화가 났어요.

 

"이런 지독한 놈을 봤나. 오냐, 그래, 어디 네가 얼마나 견디나 두고 보자. 여봐라, 지금 배교하여 풀려난 자들을 다시 불러들여라!" 100여 명의 교우들이 다시 감사 앞으로 끌려왔어요. "자, 너희들은 이 몽둥이로 한 사람이 세 대씩 저놈에게 곤장을 쳐라!" 군졸들이 마구 때리며 다그쳐도 누구 하나 감사의 명을 따르려 하지 않았어요. 감사는 다시 벼락같이 소리쳤어요. "배교자들의 입에서 저자를 때리겠다는 말이 나올 때까지 저들에게 계속 곤장을 쳐라!" 혹독한 매질에 못 이겨 배교자들은 하나둘씩 몽둥이를 들고는 유정률에게 곤장을 치기 시작했어요.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한 사람이 세 대씩 말이에요.

 

"살이 살을 잡아먹는구나!" 유정률은 동료들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하고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어요. 감사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우세영과 조카에게 다시 매질을 시켰어요. 두 사람은 이 잔인한 형벌에 거의 정신이 나간 듯 매질을 해댔고, 유정률은 동료들의 손에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어요. "코에 심지를 박고 불을 켜서 대어 보아라." 불이 타들어가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자 그제야 감사는 고문을 멈추었어요. "너희들은 오륙노리로 가서 이놈의 시체를 대동강에 던져버려라." 감사는 5명의 배교자들에게 이렇게 명했어요.

 

유정률의 시신을 메고 대동강으로 향하는 이들의 마음은 끝없는 후회와 죄책감으로 처참하게 찢어졌어요. 오륙노리에 도착한 이들은 유정률의 시신을 조심스레 대동강에 던졌어요. 얼마 후 붉은 피가 물 위로 번져 나갔어요. 그러나 신기하게도 그의 몸이 가라앉지 않고 둥둥 뜨더니, 매 맞은 자리에서 이상한 광채가 났어요. 때는 1866년 2월 17일로, 유정률 베드로 성인의 나이는 30세였지요. 며칠 후 성인의 아내가 남편의 시신을 거두어 노재골 선산에 고이 묻어주었답니다.

 

[월간 빛, 2009년 11월호]

 


 

 

 

성 유정률 베드로(1837-1866, 회장, 병인박해 때 장살)

 

성 유정률(劉正律) 베드로는 평남 대동군 율리면 답현리(畓峴里. 일명 논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일찍 부모를 여읜 후로 짚신을 엮어 팔아 어렵게 생활했다. 1864년경 천주교를 알게 되자 교리를 배운 후 곧 상경하여 장 시므온 베르뇌 주교에게 성세성사를 받았다. 그는 세례를 받고서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발견하였노라" 하고 자신의 기쁨을 큰 소리로 표현하였다. 그 후 고향으로 돌아온 성인은 지난날의 방탕했던 생활과 아내를 난폭하게 학대한 죄를 속죄하기 위해 신 꼬리로 자신의 몸을 매질하며 오직 극기와 인내로 생활했다. 그의 아내도 이렇게 변화된 모습에 감동하여 남편의 모범을 따라 입교하게 되었다.

 

1866년 초 천주교 박해에 대한 소문을 듣고 유정률은 친척들에게 세배하면서 자신의 순교를 예감이나 한 듯 "안녕히들 계십시오. 지금 헤어지면 언제 다시 뵐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하고 하직인사를 했는데, 과연 그 날 저녁 이웃마을인 고둔리 공소에서 교우들과 모여 성서를 읽고 있던 중 들이닥친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이어 같이 체포된 집주인 정 빈첸시오 회장, 우세영 알렉시오 등 5명의 교우와 함께 평양 감영으로 끌려갔다.

 

평양 감영에서 그는 이미 체포된 100여 명의 교우와 할께 문초를 받았고 혹형과 고문으로 대부분의 교우들이 배교했으나 홀로 신앙을 지켰다. 이에 노한 감사 정지용(鄭芝溶)은 배교 한 교우 100여 명으로 하여금 한 사람이 세 대씩 때리게 했다. 결국 유정률은 체포된 다음날인 2월 17일 300여 대의 매를 맞고 30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이른바 장하치명(杖下致命)을 한 것이다. 유해는 대동강에 던져졌으나 그의 아내가 거두어 논재에 안장했다.

 

이러한 성 유정률 베드로의 순교 사실은 1876년 평양감사 이재청(李在淸)이 전임 감사 정지용의 천주교 탄압을 치하하기 위해 부벽루 영명사에 세운 척사기적비(斥邪紀蹟碑)에 잘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