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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103위 성인들

성 임치백 요셉(林致百 Joseph)

by 파스칼바이런 2012. 10. 2.

성 임치백 요셉(林致百 Joseph)

축일 9월 20일

 

 

 

신      분: 포졸, 순교자

활동지역: 한국(Korea)

활동연도: 1803-1846년

같은이름: 요세푸스, 요제프, 임 요셉, 임요셉, 조세푸스, 조세프, 조셉, 조제프, 주세페, 쥬세페, 호세

 

성 임치백 요셉(Josephus)은 서울서 멀지 않은 한강변의 어느 외교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 모친을 잃고 홀아버지의 극진한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그는 10여년 동안을 글방에 다녔고, 무술과 예도를 배워 향락을 즐기는 친구들과 상종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성품은 유순하고 효심이 지극한 까닭에 덕을 거슬린 적은 없었다고 한다. 가정을 이룬 후 1830년경에 아내와 아들을 먼저 입교하여 그에게도 세례받기를 권하였으나 그는 항상 "뒷날에 입교하겠다."고 말하며 미뤘지만, 신자들을 깊이 신뢰하여 그들을 형제와 같이 사랑하고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을 무엇보다도 즐겁게 여겨 몸 둘 곳이 없는 신자 4, 5명을 그의 집에서 살게 하였다.

 

1835년에 박해가 일어나 마을에서 가까운 몇몇 신자가 잡히자 그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하였고, 자진해서 포졸이 됨으로써 더욱 열심히 그들을 도와주었다. 1846년 6월 선주였던 아들 임성룡이 김대건 신부를 따라 연평도로 나갔다가 함께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이 갇힌 해주까지 달려가 아들의 석방을 청하였다. 이때 황해도 감사는 그의 요구를 묵살하고 도리어 그를 옥에 가두었다가 서울로 압송하였다.

 

서울로 잡혀온 그는 포청의 옥에서 김대건 신부를 만나 불타는 신부의 말을 듣고 크게 감동하여 어느 날 갇힌 신자들에게 "나도 오늘부터는 성교회를 믿겠소. 너무 오랫동안 끌어왔었소."라고 말하였다. 김 신부는 그날부터 기도문을 가르쳐 요셉이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주었다. 전에 임 요셉과 친하게 지내던 포졸들은 그의 목숨을 구하려고 배교하기를 권하였으나 그는 "천주는 나의 임금이시며 아버지시다. 나는 천주를 위하여 죽을 결심을 하고 있고, 이미 죽은 사람이니 다시는 그러한 말을 하지 말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며칠 후 형리들은 그의 아들과 며느리를 데리고 와서 자식들의 처지를 보아서 배교하라고 말했지만, 인정에 끌려 천주를 버릴 수 없다고 하자 형리들은 노하여 그를 거꾸로 매달고 물매질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형리들에게 “당신들은 죽은 사람을 때리니 헛수고만 하는 것 아니오”라고 태연히 말하였다.

 

그 후 3개월이 지나 그는 곧 사형선고를 받으리라는 소문이 들리자 즐거운 마음으로 신자들에게 "나는 본래 아무런 공적도 없었는데 천주의 특별한 은혜로 여러분보다 앞서서 천국에 가게 되면 반드시 천국에서 내려와 여러분의 손을 붙잡고 아버지이신 천주의 나라로 안내할 터이니 여러분도 용기를 내시오" 라고 말했다.

 

그 후 포장 앞에 끌려가 다음과 같은 말을 주고받았다. "네가 천주교를 믿는다니 사실이냐?" "그렇습니다. 옥에 온 뒤로부터 경문을 배우고 있습니다." "십계명을 외워보아라." "아직 모두 외우지 못합니다." "십계명도 모르면서 어떻게 천국에 갈 수 있느냐? 천국에 가려면 여기 있는 이 마티아처럼 유식해야 한다." 하고 말하자, 요셉은 머리를 흔들며 큰 소리로 대답하였다. "자녀가 무식하면 효도할 수 없습니까? 아닙니다. 무식한 자녀들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부모께 대한 책임을 다 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저는 배운 것은 없으나 천주께서 저의 아버지이신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이에 포장은 그를 고문하라고 명하여 대꼬챙이로 요셉의 살을 찌르게 하고 세 번이나 주리를 틀게 하였다. 이 때 요셉이 신음소리를 내자 포장은 "만일 네가 그러한 소리를 내면 그것으로써 배교행위라고 보겠다."라고 소리치자, 요셉은 굳게 입을 다물고 잔악한 고문을 받아 결국 정신을 잃고 밖으로 끌려나왔다. 그 후에도 요셉은 거듭 고문을 받았으나 변함이 없자, 때려죽이라는 명령이 내려져 정오부터 해질 때까지 물매질을 가하였으나 목숨이 끊어지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그를 옥안으로 끌고 가서 목을 졸라 죽였다. 이때가 1846년 9월 20일이요, 그의 나이 43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임치백(林致百) 요셉(1804-1846)

 

'군집(君執)'으로도 불리던 임치백 요셉은 한강변의 한 부유한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이미 1830년에 천주교를 알게 되었으나 입교하지는 않았고, 호의적으로 천주교와 천주교인을 대하기만 했다. 1846년 5월 선주(船主)인 아들 임성룡이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함께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이 갇혀 있는 옹진 수영으로 가서 아들을 만나기 위해 천주교인이라 속이고 자수했다. 며칠 후 서울로 이송되어 포청에서 처음으로 김대건 신부를 만나 천주교 교리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즉시 세례성사를 받고, 순교를 결심했다. 드디어 9월 20일 정오부터 해가 질 때까지 매를 맞은 후 포청 옥에서 6명의 교우와 함께 43세의 나이로 교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성 임치백 요셉(林致百 Josephus, 탁희성 비오 작)

 

옥중에서 신자가 된 임치백

 

일명 군집(君執)이라고도 하는 임치백(林致百 요샙 1803-1846년) 성인은 서울 한강변의 부유한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모친을 잃고 홀아버지의 극진한 사랑을 받고 자랐는데 천성이 순량, 정직하여 덕행을 쌓았다. 1830년 처음으로 천주교를 알게 된 그는 호감을 가졌을 뿐 입교하지는 않았다.

 

이 무렵 김대선 신부는 중국에 머물고 있던 메스트로 신부와 최양업 신부를 영입하고자 연락망을 찾고 있었다. 김 신부는 연평도 앞바다에서 조기잡이를 하는 중국배를 통해 중국으로 편지와 지도를 보내려고 계획했고, 중국선과 접촉하려고 조기잡이 배를 위장할 배를 한 척 얻었다. 그 배가 바로 임치백의 아들 임성룡의 배였다. 1846년 5월 13일 조기잡이 배로 위장한 임성룡의 배를 빌려 탄 김대선 신부는 마포를 떠나 연평도 앞바다를 거쳐 등산곶으로 나갔다가 등산첨사에서 체포되었다.

 

임치백은 배를 빌려준 아들이 김대선 신부와 함께 관아로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고 옹진수영을 찾아갔다. 하지만 이미 아들은 황해도 감영으로 넘겨지고 난 뒤였다. 다시 해주로 달려간 그는 아들의 석방을 청원하였으나 거절당했다. 아들을 만나고자 '천주학쟁이'라고 거짓 고백을 한 임치백은 곧 감옥에 갇혔고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는 서울로 압송된 감옥에서  김대건 신부를 만나게 되었다. 김 신부의 신덕과 용덕에 크게 감동받은 임치백은 감옥에 갇힌 신자들 앞에서 "나도 오늘부터 천주교를 믿겠다" 하고 말하였다.

 

임치백은 그 날로부터 기도하며, 요셉이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임요셉의 친구들은 그의 목숨을 살리고자 배교를 종용했지만 그는 의연히 거절하고 오히려 천주를 위해 죽기를 다짐했다. 형리는 더욱 간교하게 임치백의 아들과 며느리를 앞세워 가족의 처지를 생각해서라도 배교한다는 말 한 마디만 하도록 그를 회유했다. 임치백이 인정에 끌려 천주를 배반할 수 없다고 단호히 거절하자 형리들은 극심한 매질을 시작했다.

 

 

요셉은 피투성이가 된 채 태연한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들은 죽을 사람을 공연히 매질하는 헛수고를 하는 게요." 그러자 형리들은 대꼬챙이로 임치백의 몸을 찌르고 주리를 틀며 "만일 네가 신음소리 한 번이라도 내면 그것으로서 배교한 것으로 보겠다"고 했다. 이게 어쩐 일인가? 이 말이 있자마자 임치백 요셉은 입을 굳게 다문 채 단 한번의 신음소리도 내지 않은 것이다.

 

그이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진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는 자신의 사형선고 소문을 듣고 얼굴에 기쁜 표정을 지으며 같이 있던 교우들을 격려하였다. "나는 본래 아무런 공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특별한 은혜로 여러분보다 앞서 천국에 가게 되면 반드시 천국에서 내려와 여러분의 손을 잡고 아버지이신 천주의 나라로 안내할 터이니 여러분은 용기를 내주시오."

 

얼마 뒤, 그는 포도대장 앞으로 끌려갔다. 포도대장은 그에게 "네가 진실로 천주교를 믿느냐?" 하고 물었다. 임치백은 "저는 감옥에 들어온 이래 기도하며 배우고 있습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천주십계명을 외워보아라." "저는 아직 다 외우지 못합니다." 이에 포도대장은 "십계도 못 외우면서 어떻게 천국에 갈 수 있느냐? 천국에 가려면 다른 신자들처럼 유식해야 하느니라" 하며 그를 내보내려 했다. 이때 임치백은 큰 소리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아이는 글을 몰라도 어버이께 효도할 수 있습니다. 비록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일지라도 효도는 훌륭히 합니다. 제가 배운 것은 없지만 천주께서 제 아버지이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 일로 임 요셉은 거듭 고문을 받았으나 굽히지 않았다. 그러던 9월 20일, 해질녘까지 매를 맞은 그는 옥안에서 동료 여섯 명과 함께 목매어 죽음을 당했다. 임치백의 나이 마흔 넷이었다. 그의 위대한 죽음을 지켜본 옥리가 시신을 거두어 묻은 뒤 그의 몸이 신비로운 빛 속에 싸여있었다고 유족들에게 전했다.

 

[경향잡지, 1997년 6월호, 김길수(대구가톨릭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