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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103위 성인들

성 장주기 요셉(張周基 Joseph)

by 파스칼바이런 2012. 10. 3.

성 장주기 요셉(張周基 Joseph)

축일 9월 20일

 

 

 

신      분: 회장, 순교자

활동지역: 한국(Korea)

활동연도: 1803-1866년

같은이름: 요세푸스, 요제프, 장 요셉, 장요셉, 조세푸스, 조세프, 조셉, 조제프, 주세페, 쥬세페, 호세

 

성 장주기 요셉(Josephus)은 경기도 수원 땅의 어느 부유한 외교인 집안에 태어났다. 한문에 유식했던 그는 열심한 자기 형수로부터 천주교 도리를 배워 23세에 영세 입교하게 되었는데, 그때 온 가족이 모두 입교하였다. 그는 학식이 있고 슬기로웠으며 신심이 두터웠기 때문에, 모방(Manbant, 羅) 신부가 입국하자마자 그를 회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20년 동안이나 회장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였다. 그는 거듭된 박해로 네 번씩이나 산속으로 피신해야 했으며, 살아남은 신자들을 찾아다니며 위로하고 격려해주며 신앙을 굳세게 지켜나갔다.

 

1845년경에 그는 친척들의 성화와 박해를 이기지 못해 제천 땅 배론 골짜기로 옮겨가 살았다. 1856년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가 그곳에 신학교를 세우게 되자 그는 자기 집을 신학교로 서슴지 않고 제공하였으며, 앞장서서 신학생들의 뒷바라지까지 하였고, 신학교 관리직까지 맡아보았다. 장 요셉과 부인은 합심하여 농사를 지어 신학교에 바쳤고, 자신들은 청빈과 봉사로써 11년간이나 신학교 실림을 잘 이끌어 갔다.

 

1866년 3월 1일 갑자기 포졸들이 배론 골짜기에 들이닥쳐 신부들과 함께 그 역시 체포되었으나, 장 회장의 공을 잘 알고 있는 푸르티에(Pourthie, 申妖案) 신부가 관헌하게 돈을 주며 그를 석방시켜 달라고 해서 하는 수 없이 그는 울면서 배론 신학교로 돌아왔다. 그 후 5일이 지나 식량을 장만하려고 노루골에 사는 한 신자 집에 갔다가 다시 포졸들이 그를 덮쳐서 제천 관장에게로 데려갔다. 제천 관장은 장 요셉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서울에 품신하였다. 서울에서는 "그 사람이 정말 서양인 신부들의 집주인이면 서울로 올려 보내고, 그렇지 않으면 배교하게 하여 집으로 돌려보내라"는 대답을 보냈다. 관장이 그에게 질문을 하자, 그는 자기 신앙을 고백하고 서양인 신부의 집주인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자기라고 서슴없이 말하였다.

 

그는 결박을 당하지도 않은 채 짚으로 만든 가마를 타고 역적모의를 한 죄수에게 씌우는 홍포를 쓴 채 서울로 향하였는데 지나가는 길목마다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죽으러 가는 그의 얼굴에 사색이 감돌기는커녕 기쁨이 넘쳐흘러 보는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일이라 하며 수군거렸다고 한다. 그러다가 1866년 3월 24일 사형선고를 받고 사형집행 날을 기다렸다. 그때 나라에서는 왕비가 해산할 달이었으므로 서울에서 죄인의 피를 뿌린다는 것은 불길하다 하여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보령 갈매못에서 처형하라는 분부가 내려졌다. 이에 그는 1866년 3월 30일에 보령 갈매못에서 참수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64세였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한국교회 선교의 뿌리를 찾아서] 평신도 - 성 장주기 요셉

공소 회장으로 신앙의 모범 보여

  

요당리성지의 장주기 요셉 성인 영성 홍보, 원주교구의 장주기요셉재활원, 수원교구의 장주기요셉관 등 아직도 ‘장주기 요셉’을 기억하는 이들은 많다. 그만큼 한국 순교자 103위 성인 가운데 한 명인 장주기 성인의 생전 덕행과 덕망이 우리에게 모범이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특히 장주기는 1855년 배론(원주교구)에 성 요셉 신학교가 설립될 때, 신학생들의 양성을 위해 자신의 3칸짜리 초가집을 기꺼이 임시 신학교로 내어주고, 자신은 신학교 땅 한쪽에서 농사일을 하며 잔일을 도맡아 하기도 한 인물이다.

 

그의 이러한 희생정신은 1826년(또는 1827년) 세례를 받으면서부터 이뤄졌다. '장낙소'라고도 불리는 그는 경기도 수원 느지지(현 화성군 양감면 육당리)에서 태어났으며, 세례를 받은 후 박해와 친척들의 방해를 피해 충청도 제천 배론(원주교구)으로 이사했다.

 

학식이 있고 슬기로웠던 그는 신앙을 반대했던 거의 모든 집안 식구들을 개종시켰으며, 모방 신부의 추천으로 회장으로 선출돼 모범적 신앙 활동을 펼쳐나갔다. 배론에 성 요셉 신학교가 생겨나면서부터는 학생들에게 직접 한문을 지도하기도 했으며, 신학교 경리, 주위에 있는 공소 회장의 역할 등까지도 함께 맡아볼 만큼 아낌없는 지원을 보냈다.

 

그는 여러 가지 직책을 맡으면서도 열성과 인내를 가지고 수행했으며, 가난했지만 자기 봉사에 대한 보수를 결코 받으려 하지 않았고, 오히려 여가를 이용해 자기와 가족의 생계를 이어가기 위한 일을 했다.

 

1866년 병인박해가 터진 후 장주기는 제천 인근의 노럴골(또는 너레골)로 피신했지만, 다른 교우들이 피해를 입을까 염려해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는 것은 물론, 자신이 선교사들의 집주인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포졸들에게 체포된 그는 서울로 압송돼 포청에서 모진 고문을 견뎌내면서도 끝까지 신앙을 지켰고, 당시 홍주 거더리에서 끌려온 안주교, 민신부, 오신부, 황석두 등과 함께 충남 보령군 갈매못에서 군문효수형을 받았다.

 

삼남매였던 자식들에게 '항상 순교해 예수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 소원'이라고 밝힌 장주기 요셉. 그의 소원대로 순교했던 당시 그의 나이는 64세였다. 장주기 성인의 시신은 다블뤼 주교와 위엥·오메트르 신부의 시신과 함께 형장의 모래밭에 매장됐다가 후에 그곳에서 10리 떨어진 곳으로 이장됐는데, 일본 나가사키, 용산신학교 등 여러 곳을 거쳐 현재 절두산 지하성당에 이르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1년 7월 24일, 오혜민 기자]

 


 

 

 

[수원교구 성지에서 만나는 103위 성인] 요당리성지 장주기 요셉

청빈 · 봉사로 신학생 물심양면 도와

   

장주기 요셉 성인은 1803년 수원 양간(현재 경기도 화성시 양감면 요당리 느지지)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한문에 유식했던 그는 1827년경 신심이 두터운 형수로부터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았다. 이때 온 가족이 모두 입교했다. 모방 신부는 조선에 입국하자마자, 학식이 있고 슬기로우며 신심이 두터운 그를 회장으로 임명했다. 20여 년간 회장으로 일한 성인은 박해로 네 번씩이나 산속으로 피신해야 했으나 갖은 어려움 속에서도 신자들을 찾아다니며 위로하며 신앙을 굳세게 지켜나갔다.

 

성인은 1845년경 박해를 피해 제천 땅 배론 골짜기로 이사해 살았다. 1856년 베르뇌 주교가 그곳에 신학교를 세우자 그는 자기 집을 신학교로 제공하고 앞장서서 신학생들의 뒷바라지와 신학교 관리직을 맡았다. 성인은 부인과 마음을 모아 농사를 지어 수확물을 신학교에 봉헌했고, 청빈과 봉사의 삶으로 11년 동안 신학교 살림도 도맡았다. 1866년 3월 1일 포졸들이 배론에 들이닥쳐 신부들과 함께 체포됐지만 성인의 공을 잘 알고 있는 푸르티에 신부가 관헌하게 돈을 주며 석방시켜 달라 청해 성인은 하는 수 없이 울면서 배론 신학교로 돌아왔다. 그 후 5일이 지나 식량을 장만하려고 노루골에 사는 한 신자 집에 갔다가 다시 포졸들에게 체포됐다.

 

제천 관장은 성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서울에 품신했다. 서울에서는 "그 사람이 정말 서양인 신부들의 집주인이면 서울로 올려 보내고, 그렇지 않으면 배교하게 하여 집으로 돌려보내라"는 대답을 보냈다. 관장이 그에게 묻자 그는 자기 신앙을 고백하고 서양인 신부의 집주인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자기라고 솔직하게 말했다. 그는 짚 가마를 타고 역적모의를 한 죄수에게 씌우는 홍포를 쓴 채 서울로 향했는데 죽으러 가는 그의 얼굴에 사색이 감돌기는커녕 기쁨이 넘쳐흘러 보는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일이라 하며 수군거렸다 전해진다.

 

1866년 3월 24일 사형선고를 받은 성인은 왕비의 해산 달 서울에서 죄인의 피를 뿌린다는 것은 불길하다는 조정의 결정에 따라 충남 보령 수영으로 끌려갔고 3월 30일 보령 갈매못에서 순교했다. 그의 나이 64세였다.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시복됐고 1984년 5월 6일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됐다.

  

 

요당리성지는

 

요당리성지는 기해박해와 병인박해를 통해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로 하느님을 증거한 신앙의 요람지이고, 장주기 요셉 성인과 현재 시복시성이 추진되고 있는 장토마스(1815-1866)의 출생지이다. 이곳 출신 순교자로는 지타대오, 림베드로, 조명오(베드로), 홍원여(가를로)와 장주기 성인의 친인척인 장경언, 장치선, 장한여, 장요한, 방씨 등이 있다. 성지는 또한 민극가(스테파노, 1787-1840) 성인과 정화경(안드레아, 1808-1840) 성인이 활동한 곳이기도 하다.

 

요당리성지는 한국 교회 순교사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갖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그간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지 못해왔다. 이러한 점을 안타깝게 여긴 3대 교구장 최덕기 주교는 2006년 9월 성지 전담 사제를 파견해 성지개발에 대한 의지를 대내외적으로 천명했다. 성지에는 대형십자가와 성인 묘지, 기도의 광장, 묵주기도 길, 십자가의 길 등이 조성돼 순례자들을 맞이하고 있다. 지난 해 3월 성당 기공식을 갖고 공사에 들어간 성지는 1년 3개월간의 공사를 마치고 6월 4일 오전 11시 평택대리구장 조원규 신부 주례로 신축성당 입당미사를 봉헌할 예정이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09년 5월 15일, 이승환 기자]

 


 

 

 

수원교구 화성시 양감면 요당리 성지 성역화사업 도움 호소

천막성지 개발 주인공은? 우리 모두!

 

요당리성지?

 

경기도 화성 발안 나들목을 지나 안중방향으로 가다보면 '요당리성지'(전담 김대영 신부, 수원교구)라는 큰 표지판이 보인다. 하지만 표지판 방향을 따라 성지를 찾아가면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다.  입구에 세워진 요당리성지라는 대형 표지판만이 성지라는 것을 알려줄 뿐 그 흔한 십자가나 성모상 하나 없다. 허허벌판에 성전으로 쓰이는 천막 건물과 컨테이너 사제관, 화장실이 전부다.

 

"이곳은 성 장주기 요셉과 하느님의 종 중 한분인 장토마스 출생지입니다. 특히 성 장주기 요셉은 평신도로 교회를 위해 한평생 헌신한 분인데 이 분을 제대로 공경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현실이지요. 그래서 우리 교구에서 지난해 요당리에 부지 6200평을 마련하고 저를 전담사제로 파견해 이제 막 성지개발에 나선 상태입니다."

 

성지 전담 김대영 신부는 "요당리는 성 장주기 요셉뿐만 아니라 성 민극가 스테파노, 성 정화경 안드레아께서 활동하셨던 곳이며 교회사적으로도 풍부한 신앙 유산을 간직한 곳"이라면서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성역화 사업을 시작해 어려움이 많은 상태라 뜻있는 분들의 도움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느지지로 불렸던 요당리(경기도 화성시 양감면 요당리 191-1)는 장주기 성인이 태어나 신앙 기반을 다지고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놓으며 주위 친척들과 교우들에게 신앙을 전파한 곳이다. 또 장씨 집성촌으로 하느님의 종 124위에 올려진 장 토마스(장주기 성인 6촌)를 비롯해 장씨 일가가 장주기 성인을 따라 순교한 곳이기도 하다.

 

이밖에도 요당리 교우촌 신자들은 교회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별도의 전답을 운영하기도 했고 박해를 피해 이곳으로 피신해 순교한 성 앵베르 범 라우렌시오 주교와 이를 도운 손경서 안드레아 순교자 얼이 서려있다.

 

이제라도 장주기 성인과 그 순교자들을 현양할 수 있는 곳이 마련돼 다행이라는 김 신부는 "앞으로 이곳을 기도가 끊임없이 바쳐지고 신자들이 편히 쉬어가며 신앙교육이 이뤄질 수 있는 곳으로 개발하려 한다"며 신자들 관심과 도움을 부탁했다.

 

요당리가 고향인 이용훈 주교는 "장주기 성인을 위한 성지가 생겨 기쁘다"면서 "신자들이 성지를 순례하며 성지 조성에 정성을 쏟아 풍성한 은총을 받는 성지가 되기를 바란다"고 격려했다. 한편 성지는 성 장주기 요셉 순교일을 맞아 30일 오전 11시 성지에서 이용훈 주교 주례로 기념미사를 봉헌한다.

 

[평화신문, 제913호(2007-03-25), 박수정 기자]

 


 

 

성 장주기 요셉(張周基 Josephus, 탁희성 비오 작)

 

성 장주기(張周基) 요셉(1803-1866)

 

일명 '낙소'로도 불리는 성 장주기 요셉은 경기도 수원 느지지(현재 경기도 화성군 양감면 육당리)에서 출생했다. 1826년 영세 입교한 후 박해와 친척들의 방해로 충청도 배론으로 이사하여 회장직을 맡아보며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했다. 1855년 배론에 신학교가 설립될 때 자신의 집을 신학교로 쓰게 하는 한편 자신은 신학교에 딸린 토지의 농사일과 잔일을 맡아 했다.

 

1866년 3월 1일 배론 신학교에서 신 뿌르띠에 신부와 박 쁘띠니꼴라 신부가 체포될 때 그는 제천 부근의 '노럴골'로 피신했으나 다른 교우들이 피해를 입을까 염려되어 자수하여 서울로 압송되었다. 서울의 포청에서 고문을 참아내며 끝까지 신앙을 지켜 때마침 홍주의 '거더리'에서 압송되어온 안 주교, 민 신부, 오 신부, 황석두 루가 등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고 3월 30일 충남 보령군 '갈매못'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64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수원교구 요당리 성지 안내판에 새겨진 성 장주기 요셉 회장 모습

요당리 성지는 신유박해(1801년)를 기점으로 서울과 충청도 내포 등지의 신자들이 피난하면서 형성된 양간 공소라 불리던 교우촌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닷물이 유입되어 뱃길이 열렸던 지리적 특성상 충청도와 경기도 내륙, 서울을 잇는 선교 루트의 교두보 역할을 했던 곳으로, 기해년(1839년)과 병인년(1866년)에 일어난 두 번의 박해를 통해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로 하느님을 증거한 신앙의 요람지였습니다.

장주기(요셉, 1803-1866) 성인과 125위 시복추진자인 장 토마스(1815-1866)의 출생지이자 신앙의 터전이었고, 그외에도 많은 순교자들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또한 교회 재정 확보를 위한 전답이 운영되었던 곳으로 그 책임을 맡았던 민극가(스테파노, 1787-1840) 성인과 공소회장을 역임한 정화경(안드레아, 1808-1840) 성인께서 활동하셨던 곳입니다. 그리고 박해를 피해 피신했던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1796-1839) 주교님과 그분의 피신을 도운 손경서(안드레아, 1799-1839) 순교자의 얼이 서려 있는 곳입니다. 이런 역사적 중요성으로 인해 수원교구에서는 2006년부터 전담사제를 파견해 성지를 개발 보존하고 있습니다.

 


 

 

조창원 작, 황석두 루카와 장주기 요셉의 순교, 58 x 87.5cm, 2008년

 


 

 성금요일의 순교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