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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103위 성인들

성녀 전경협 아가타(全敬俠 Agatha)

by 파스칼바이런 2012. 10. 3.

성녀 전경협 아가타(全敬俠 Agatha)

축일 9월 20일

 

성녀 전경협 아가타(Agatha, 좌)와 성녀 박희순 루치아(Lucia, 중)와

성녀 김유리대 율리에타(Julietta, 우) (김형구 작)

 

 

신      분: 궁녀, 순교자

활동지역: 한국(Korea)

활동연도: 1790-1839년

같은이름: 아가다, 아가따, 전 아가다, 전 아가타, 전아가다, 전아가타

 

성녀 전경협 아가타는 서울의 외인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친을 잃고 가난하게 살 때, 안형광이라는 궁녀가 궁중으로 데리고 들어가 함께 살았다고 한다. 이때 그녀는 궁녀이던 박희순 루치아(Lucia)를 만났고, 그녀의 감화로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그러나 궁중에서는 자기가 원하는 만큼 훌륭히 계명을 지키지 못할 것 같아 편안하고 사치스런 궁중 생활을 용감히 박차고 병을 빙자하여 루치아에게 가서 함께 살았다.

 

아가타는 성품이 점잖고 강직하며 또한 뛰어나게 영리하였으므로 교우들의 사랑을 받았다. 또 기도와 독서와 묵상과 덕행에 전심하며 상냥함과 겸손한 태도로써 많은 외교인들의 마음까지 감동시켜 이들을 회두시켰다고 한다. 그녀는 자주 병을 앓으면서도 불평을 말하는 법이 없었고, 궁중의 사치와 맛있는 음식을 그리워하는 일도 없었다.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그녀는 붙잡힐 줄 미리 알고 집에서 태연하게 기도하며 기다리고 있다가 4월 15일에 체포되어 옥에 갇혔다. 포장이 "너는 궁녀로서 다른 부녀들과는 다른데 어떻게 사도에 혹하였느냐?" 하고 묻자 아가타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천주는 천사와 사람과 만물의 임금이요 주재이십니다. 이 천주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기르시고 우리의 생명을 보존하여 주시며, 착한 이를 상주시고 악한 자를 벌하시니 그분은 우리의 대군대부이십니다." 다른 문초 중에 위와 비슷한 질문에 대하여 그녀는 아래와 같이 재치 있고 힘찬 대답을 하였다고 한다. "재목 없이 어떻게 집이 서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만일 대들보가 집에 가장 중요한 재목이라면 우리를 보존하시는 천주는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이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이러한 이유로 그분을 공경하는데 무슨 죄가 있다고 하시겠습니까?"

 

포장은 그녀의 신앙을 꺾기 위하여 형벌을 가하기도 하고 혹은 감언으로 달래어 보았으나 헛수고였다. 결국 포장은 아가타를 형조로 보냈고 형조판서도 포장과 비슷한 질문을 하였다. 아가타는 다섯 차례나 삼릉장으로 몹시 맞아 살아 헤어져 떨어지고 뼈가 부러지며 피가 땅을 적시었으나 조금도 안색이 변하지 아니하여 외교인들까지도 감탄하였다고 한다.

 

아가타에게는 조그마한 관직을 가지고 있던 비신자 오라버니가 있었는데, 그는 관직을 잃고 패가망신할까 두려워 동생에게 배교하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아가타가 그의 간절한 청을 뿌리치자 그녀의 오라버니는 동생을 독살할 생각으로 꿀과 계란과 연백으로 만든 과자를 동생에게 보냈다. 아가타는 수상히 여겨 비녀로 그것을 찔러보니 비녀의 색깔이 금방 변했다. 그녀는 모든 것을 알아차리고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다. 실패한 것을 안 오라버니는 포졸에게 뇌물을 주며 몽둥이로 쳐 죽여 달라고 하여 아가타는 여러 차례 삼모장으로 맞았다고 한다. 이렇게 6개월가량 옥에 있던 아가타는 마침내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받아 치명하였다. 때는 1839년 9월 26일이요, 그녀의 나이는 50세였다. 그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녀 전경협 아가타(全敬俠 Agatha, 탁희성 비오 작)

 

성녀 전경협(全敬俠) 아가타(1787-1839)

 

동정녀인 동시에 순교자. 전경협은 서울의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대궐로 들어가 궁녀가 되었다. 그후 평소 친교가 있던 궁녀 박희순(루치아)을 따라 입교했다. 박희순이 자유스럽게 천주교를 실천하고자 궁을 나오게 되자 박희순을 따라 그녀도 궁을 나와 교우들의 집에 머물면서 신앙생활에 전념했다. 1839넌 4월 15일 전경협은 포졸들의 습격을 받아, 자기 집에 숨어 있던 박희순, 박큰아기(마리아)와 함께 체포되었다.

 

궁녀였다는 이유로 전경협은 포청과 형조에서 더욱 가혹한 형벌과 고문을 당했으나 참아냈다. 이 때 조그만 관직을 잃을까 두려워한 오빠는 관리를 매수하여 누이를 독살시키려 했으나 전경협은 독이 든 음식을 먹지 않았다. 이렇게 힘든 옥살이를 5개월 동안 참아낸 후 9월 26일 전경협은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했다. 그때 나이는 51세였다.

 

- 성녀 박희순(朴喜順) 루치아, 성녀 박큰아기 마리아와 함께 체포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