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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103위 성인들

성 정국보 프로타시오(丁-- Protasius)

by 파스칼바이런 2012. 10. 3.

성 정국보 프로타시오(丁-- Protasius)

축일 9월 20일

 

 

 

신      분: 상인, 순교자

활동지역: 한국(Korea)

활동연도: 1799-1839년

같은이름: 쁘로따시오, 쁘로따시우스, 정 프로타시오, 정프로타시오, 프로타시우스

 

성 정국보 프로타시우스(또는 프로타시오)는 황해도 개성의 어느 양반 집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가 직무상 괴실로 몰락하자 부친은 가문과 신분을 숨긴 채 서울로 올라와서 노동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정국보는 천성이 착하고 어질었는데, 나이 서른 살 때 입교하여 충실히 계명을 지키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를 지켜본 유방제(劉方濟, 파치피코) 신부는 홍살문 거리에 집을 마련하여 성사를 보기 위하여 서울로 모여드는 신자들의 숙박소를 관리하도록 하였다.

 

그는 모든 교우들에게 한결같이 대하였고, 교우들의 일이라면 위험을 불사하고 헌신적으로 봉사하였다. 또한 그는 지극히 가난하고 병이 잦았지만 어려운 빛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는 열네 명의 자녀를 두었다가 어릴 때에 모두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온전히 주님의 뜻에 복종하는 뜻으로 한 마디 원망의 소리조차 입 밖에 내지 않고 달게 참아 받았다. 또한 성서 읽기를 즐겨하고 강론 듣기를 좋아하였다.

 

1839년 3월 기해박해의 선풍이 일어났다. 조선에 외국인 신부들이 있다는 소식이 조정에 알려져 신자들을 잡아 가두기 시작하였다. 그는 박해가 시작되자마자 아내와 같이 잡혀 포도청에서 배교를 강박하는 혹독한 고문을 받았지만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그러나 형조로 이송되어 관리들의 감언이설과 유혹에 빠져 배교를 선언하고 석방되었지만, 집에 돌아오자마자 자기 죄에 대하여 심한 가책을 느껴 침식을 잊은 채 울며 지내다가 이웃에 사는 열심한 신자의 격려와 권고에 용기를 얻어 자수할 결심을 하였다.

 

그러나 형조의 문지기는 그가 찾아와 자기가 배교한 사실과 배교한 것을 취소하고 죽기를 원한다는 말을 듣고, "이 못난 놈아, 한번 말했으면 그만이지 못 들어간다."라고 호령하며 그를 미친 사람으로 취급하고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이튿날 찾아가 다시 졸랐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사흘째인 5월 12일에는 자신의 신병과 고문의 후유증으로 들것에 실려 형조판서가 지나갈 길목에 지키고 앉아 기다렸다. 판서가 나오자 그는 길 한 가운데 엎드려 이렇게 말했다. "저는 죄를 지었습니다. 마음에 없는 말을 입으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뉘우칩니다. 저는 천주교인입니다. 언제까지든지 그러하고자 합니다." 하고 애원하였다. 그래도 판서가 그냥 지나치려 하자, 그가 하도 큰소리로 부르짖고 애원함으로 판서는 귀찮게 여기고 그를 잡아 옥으로 끌고 가도록 명했다.

 

이리하여 그는 기쁘고도 즐거운 마음으로 형리들에게 끌려 옥으로 들어갔다. 갇혀 있던 다른 신자들이 그를 반가이 맞으며 "잘 했다"는 축하의 말을 하자 그의 기쁨은 한층 더 하였다. 그는 다시 불려 나가 치도곤 스물다섯 대를 맞았다. 이때 그는 장티푸스로 기력이 떨어진데다가 가혹한 형벌을 받았으므로 옥에 들어올 때에는 이미 다 죽어 있었다. 그는 바로 그날 밤, 1839년 5월 20일에 41세의 나이로 옥사하였다. 어쨌든 그는 기해박해의 첫 번째 순교자이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정국보 프로타시오(丁-- Protasius, 탁희성 비오 작)

 

성 정국보 프로타시오(1799-1839, 상인, 기해박해 때 옥사)

 

정국보는 원래 개성(開城)의 유명한 양반 가문에서 출생했으나 벼슬을 하던 조부가 죄를 짓자 부친과 함께 상민으로 신분을 감추고 상경하여 선공감(繕工監)에서 일하며 미천하게 살았다. 천성이 선량하고 겸허했으므로 30세 경 천주교를 알게 되자 곧 입교하여 유방제 신부에게 성세성사를 받았고, 그후로는 홍살문 근처에서 아내와 함께 성사를 받으러 상경하는 시골 교우들을 돌보았는데 자녀 14명을 가난과 병으로 잃어버렸고. 자신 또한 가난과 병에 시달리면서도 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헌신적으로 봉사하고 인내와 극기의 신앙자세를 잃지 않아 모든 교우들의 귀감이 되었다.

 

그러던 중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그해 4월(음력 3월) 밀고되어 아내와 함께 체포되었는데 포청에서의 형벌과 고문은 참아냈으나 형조에서는 참아내지 못하고 배교하였다. 그러나 석방되자마자 배교한 것을 뉘우치고 형조에 들어가 배교를 취소하며 다시 체포해 달라고 간청했고, 그것이 거절당하자 5월 12일(음력 3월 그믐) 고문의 여독과 염병으로 들것에 실린 채 형조판서가 다니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형조판서에게 직접 자신을 체포해 줄 것을 요구, 그 날로 체포되어 5월 20일(음력 4월 7일) 포청에서 곤장 25도를 맞고 이튿날 새벽에 순교했다. 그 때 그의 나이 41세였다.

 

 


 

 

 

"저는 죄를 지었습니다. 마음에 없는 말을 입으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뉘우칩니다. 저는 천주교인입니다. 언제까지든지 그러하고자 합니다" 하고 배교한 것을 뉘우친 정국보 프로타시오 그는 황해도 개성의 양반 가문에서 출생했으나 할아버지가 죄를 짓게 되어 아버지와 함께 서울로 올라와 신분을 숨기고 선공감(線工監)에서 일하면서 미천하게 살았다.

 

천성이 착하고 어진 정국보는 서른 살 때 입교하여 유방제 신부에게 성세성사를 받고 계명을 충실히 지키며 신앙생활을 하였다. 유 신부는 성사를 보기 위해 서울로 모여드는 시골교우들을 위해 홍살문 거리에 숙박소를 마련하였는데, 평소에 유심히 지켜본 정 프로타시오에게 그곳을 관리토록 하였다. 열네 명의 자녀들을 모두 어릴 때 잃어버린 그는 가난과 병으로 시달리면서도, 인내와 극기의 신앙자세를 잃지 않았고, 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헌신적으로 봉사하였다.

 

조선에 외국인 신부들이 있다는 소식이 조정에 알려져 1839년 3월 기해 박해의 선풍이 불기 시작하였다. 정 프로타시오는 박해가 시작되자마자 아내와 같이 잡혀 포도청에서 배교를 강요하는 고문과 형벌을 받았지만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그러나 형조로 이송되어 관리들의 감언이설과 유혹에 빠져 배교하였다.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온 그는 곳 자기 죄에 대하여 심한 가책을 느껴 침식을 거부한 채 지내다가 이웃에 사는 열심한 신자의 권고와 격려로 자수할 결심을 하였다.

 

형조 문지기는, 배교한 것을 최소하며 다시 체포해달라고 간청하는 프로타시오를 보고 "이 못난 놈아, 한번 말했으면 그만이지. 이제는 다 틀렸으니 집으로 돌아가!" 하고 호령하며 그를 미친 사람으로 취급하고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며칠 동안 찾아가 계속 졸랐으나 거절당하였다. 그래서 5월 12일에는 고문의 여독과 열병을 들것에 실린 채 형조판서가 다니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형조판서에게 큰 소리로 "저는 교웁니다. 교우로서 죽기를 간절히 원합니다."하고 다시 체포해 줄 것을 애원하였다.

 

귀찮게 여긴 형조판서는 그를 잡아 옥에 끌고 가도록 명하였고, 갇혀 있던 동료 교우들은 그를 반가이 맞아주었다. 그후 다시 불려나간 프로타시오는 치도곤 스물다섯 도를 맞았다. 이때 그는 열병으로 기력이 쇠해져 있었기에 가혹한 형벌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 이튿날인 5월 20일 새벽에 마흔살의 나이로 옥사했다. 그래서 정 프로타시오는 기해박해 첫 번째 순교자가 되었다.

 

[경향잡지, 1996년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