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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103위 성인들

성 정의배 마르코(丁義培 Mark)

by 파스칼바이런 2012. 10. 3.

성 정의배 마르코(丁義培 Mark)

축일 9월 20일

 

 

 

신      분: 회장, 순교자

활동지역: 한국(Korea)

활동연도: 1795-1866년

같은이름: 마르꼬, 마르꾸스, 마르쿠스, 마크, 말구, 정 마르코, 정마르코

 

성 정의배 마르코(丁義培 Marcus)

 

성 정의배 마르코(Marcus)는 서울 창동의 어느 양반집 태생으로 어려서부터 천성이 어질고 진실하며 행동이 신중하였다. 그러나 그의 집은 유학을 숭상하였기에 오로지 사서오경을 외우며 과거공부에만 전념하였다. 과거 공부를 마친 후 서울의 어느 서당에서 아이들에게 한문을 가르치며 살다가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자식도 없이 홀로 생활하였다.

 

1839년에 그는 우연한 기회에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와 모방(Manbant, 羅), 샤스탕(Chastan, 鄭) 신부가 순교하는 모습을 새남터에서 보게 되었다. 이역만리 낯선 땅에 와서 목숨을 초개같이 여기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진리를 전하며 모욕과 멸시와 학대를 달게 받고 있으니 그들은 무엇을 믿으며, 무엇을 바라고, 누구를 사랑하는 것인가? 자기들을 죽이려고 날뛰며 악의에 찬 조소를 퍼붓는데 오히려 웃는 낯으로 불쌍히 여기지 않는가? 이처럼 그의 의문은 끝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천주교 서적을 구해 읽기 시작하였고, 자기가 닦아온 지식을 바탕으로 하여 그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이제껏 나는 천주교 신자가 되면 착한 일을 할 수 없는 자로 보았었지만, 이제 알고 보니 진정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이 되려면 먼저 천주교 신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그는 영세 입교하여 조선 교회의 훌륭한 일꾼이 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46세였다.

 

1845년에 입국한 페레올(Ferreol, 高) 주교는 그를 전교회장으로 임명하였는데, 죽는 날까지 모든 열성과 신심을 다해 임무를 수행했기에 '산 성인'이라 할 정도로 신자들을 잘 이끌고, 예비자들을 잘 준비시키며, 병자들을 방문하고, 먹을 것조차 없어 고생하면서도 버려진 고아들을 데려다가 도와주기도 하였다. 그의 생활은 매우 검소하였는데 그에게 값진 옷이라곤 한 벌도 없었고, 군데군데 깁고 또 기운 헌 옷을 입었고, 조금 들다가 그만 밥상을 물리곤 하였다. 그는 브르트니에르(Bretenieres, 白) 신부를 자기 집에 모셔 들여 조선말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그는 자주 "순교한다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로다. 반면 자기 집에 앉아 안일하게 죽는 것은 진정 두려운 일일 수밖에 없다"라고 하였다.

 

1866년 2월 25일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처음에는 감옥에 갇혔으나 의금부로 넘겨졌고, 3월 5일에는 사형선고가 내려졌고, 같은 달 11일에 처형되었다. 사형 길에 나선 정 회장은 눈을 내리 뜨고 열심히 기도하는 모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이윽고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이때가 1866년 3월 11일로 바로 그의 72회 생일날이었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한국교회 선교의 뿌리를 찾아서] 평신도 - 성 정의배 마르코

고아 구호단체 '성영회' 운영

  

탁희성 작가의 그림을 보면, 병인박해 당시 순교한 정의배(마르코) 성인의 모습에서 다른 성인들과 한 가지 다른 점을 느낄 수 있다. 댕기를 묶은 아이들이 정의배 성인을 따르고 그는 포대기에 싸인 한 아기를 안고 있다는 점이다.

 

정의배 성인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증거했으며 회장으로서 20년 동안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등 다른 순교자들과 비슷한 일을 했다. 하지만 그가 좀 더 우리에게 기억되는 이유는 고아구호 단체인 '성영회(영해회)'를 맡아 돌보았기 때문이다.

 

서울 창동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정의배 성인은 평소 유학자로서 천주교의 교리가 제사를 금지하는 등 당시 규율에 어긋났기 때문에 박해를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1839년 기해박해 때 프랑스 선교사들이 하느님을 증거하며 목숨을 선뜻 내놓는 것을 보고 감동해 스스로 천주교 서적을 구입, 공부하고 입교했다.

 

홀로 결단한 신앙은 계속 이어져 1845년 페레올 주교가 입국한 후 회장으로 임명돼 순교할 때까지도 자신의 직무를 철저하게 수행했다. 그는 또 1854년 성영회가 조직되자, 직접 맡아 안타까운 상황에 놓인 고아들을 돌보았다. 철종 통치 당시였던 1850년대에 파리외방전교회가 세운 고아구호단체 성영회는 실로 놀라운 것이었지만, 1866년 베르뇌 주교가 순교한 후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1865년 5월 입국한 브르트니에르 신부를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하기도 했으며, 볼리외, 위앵, 도리 신부 등도 모두 정의배 성인의 집을 왕래했다. 이처럼 그는 회장이라는 직분 외에도 당시 조선에서 활동하던 프랑스 선교사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유학자였던 높은 학식을 바탕으로 주위의 교우들에게 복음을 가르치는 일을 도맡아 했다. 실제로 배치서와 정복길, 이득삼 등에게 교리를 가르치기도 했다.

 

1866년 병인박해의 박해 바람이 몰아닥치자 정의배는 베르뇌 주교가 체포될 때 함께 체포됐던 주교의 하인 이선이의 밀고로 2월 25일 새벽 체포된다. 포도청으로 압송된 그는 2회의 심문을 받고 3월 2일 의금부로 옮겨져 모진 고문을 받았다.

 

정의배는 심문 당시 '동료 교우들의 이름을 대라'는 요구에 이미 죽은 신자들의 이름만을 진술하며 끝까지 순교 의지를 밝혔다고 한다. 결국 사형선고를 받은 그는 3월 11일 푸르티에 신부, 프티니콜라 신부, 제자 우세영(알렉시오) 등과 함께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72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정의배의 시신은 처형된 지 며칠 후 그의 아내가 포졸들에게 돈을 주고 거둬 갔는데, 가족들에 의해 노고산(현 서강대학교 뒤편에 위치)에 안장됐다고 전해진다. 1968년 10월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복자가 됐으며, 1984년 5월 다른 성인들과 마찬가지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됐다.

 

[가톨릭신문, 2011년 7월 10일, 오혜민 기자]

 


 

 

성 정의배 마르코(丁義培 Marcus, 탁희성 비오 )

 

성 정의배 마르코(1795-1866, 회장, 병인박해 때 군문효수)

 

서울 창동에서 태어난 성 정의배(丁義培) 마르코는 유업(儒業)에 종사하다가 1839년 기해박해 때 서양 선교사의 순교 장면을 목격하고 감동하여 곧 교리를 배우고 입교했다. 1845년 3대 조선교구장 고 페레올 주교가 입국한 후로는 서울 지역의 회장직을 맡아 순교할 때까지 20여 년을 헌신적으로 일했다. 또 1854년 성영회(聖영會)가 설립되었을 때 성영회를 맡아 고아들을 돌보았다.

 

1866년 장 시므온 베르뇌 주교의 체포를 시작으로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서울지역의 회장으로 명망이 높은 정의배는 주교의 하인 이선이의 밀고로 2월 25일 체포되어 3월 11일 신 신부, 박 신부 그리고 그의 제자 우세영 알렉시오와 함께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72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평소에도 "순교한다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로다. 반면 자기 집에 앉아 안일하게 죽는 것은 진정 두려운 일일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다닌 정의배는 서울 창동의 한 양반 집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은 유학(儒學)을 숭상하였기에 오로지 과거시험 공부에만 열심하였다. 그는 과거시험을 마친 후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살다가 1839년 우연한 기회에 서양 선교사들의 순교 장면을 보게되었다. 그 때부터 '저들은 무엇을 믿기에 머나먼 낯선 땅에 와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들의 진리를 전하면서 모욕과 멸시를 달게 받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천주교 서적을 구해 읽기 시작하였고 그의 나이 마흔 여섯에 영세 입교하였다.

 

1845년 제3대 조선교구장 고 페레올 주교는 그를 전교회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순교하는 날까지 모든 열성과 시심을 다해 헌신적으로 일하였다. 이 모습을 본 안 다블뤼 주교는 "산 성인(聖人)이로다" 하고 칭찬하였다. 정의배는 1845년 한국 최초의 고아원인 성영회(聖瓔會)가 설립되었을 때 성영회를 맡아 고아들을 돌보았다.

 

1866년 장 베르뇌 주교의 체포를 시작으로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서울지역의 회장으로 명망이 높던 마르코는 주교의 하인인 이선이의 밀고로 2월 25일 체포되어 3월 11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바로 그날이 그의 72회 생일이었다.

 

[경향잡지, 1996년 3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