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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103위 성인들

성 정하상 바오로(丁夏祥 Paul)

by 파스칼바이런 2012. 10. 3.

성 정하상 바오로(丁夏祥 Paul)

축일 9월 20일

 

 

 

신      분: 신학생, 순교자

활동지역: 한국(Korea)

활동연도: 1795-1839년

같은이름: 바울로, 바울루스, 빠울로, 정 바오로, 정바오로, 파울로, 파울루스, 폴

 

성 정하상 바오로(Paulus)는 남인 양반의 후예로 경기도 양근 지방 마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정씨 가문에서 최초로 신앙을 받아들인 정약종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이며, 1801년에 그의 맏아들 정철상 카롤루스와 함께 순교하였고, 어머니 유 체칠리아는 1839년 11월 순교하였다. 아버지가 순교할 때에 그는 겨우 일곱 살로 그의 모친과 누이 정 엘리사벳(Elisabeth)과 함께 풀려났다.

 

그러나 가산이 모두 몰수당하자 살길이 막연하여 경기도 양근 지방 마재에 있던 그의 숙부인 정약용 요한에게 의지하고 살았다. 그러나 숙부가 전라도 강진으로 귀양 가 있던 때였으므로 외교인 친척들로부터 천대와 냉대를 받았지만, 바오로는 어려서부터 어머니로부터 기도와 교리를 배웠다. 하지만 외교인들 틈바구니 속에서는 신자의 본분을 지키기가 어려워 20세 때에 서울로 올라와 조증이 바르바라(Barbara)의 집에 머물면서 목자 없는 조선교회의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교회 재건을 모색하였다.

 

그는 함경도에 귀양 가 있던 한학자 조동섬 유스티아누스에게서 학문을 배우고,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양반 신분을 감추고 어떤 역관의 집에 하인으로 들어가 살다가 북경에 가서 성세와 견진과 성체 성사를 받고 주교에게 성직자 한 분을 요청했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나 실망하지 않고 계속해서 북경까지 9회, 변문까지는 11회나 왕래하였다.

 

그는 유진길, 조신철 그리고 강진에 유배 가 있는 삼촌 정약용의 자문과 후원으로 끊임없이 성직자 영입 운동을 전개했다. 그들은 로마 교황에게 탄원서를 보내는 한편, 북경 주교에게도 서신 등을 보냄으로써 마침내 조선교회가 파리 외방전교회에 위임되고, 동시에 조선 독립교구가 설정되었다. 마침내 그는 유방제(劉方濟, 파치피코) 신부를 모셔 들이고, 모방, 샤스탕 신부와 앵베르 범 주교까지 모셔 들여 자신의 집에 모셨다.

 

앵베르 주교는 바오로가 사제가 되기에 적당하다고 여겨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치던 중 박해가 일어나자 그는 주교를 피신시키고 순교의 때를 기다렸다. 이때 그는 체포될 경우를 대비하여 "상재상서"를 작성했는데, 이것은 조선교회 최초의 호교론이다. 그는 이 속에 박해의 부당성을 뛰어난 문장으로 논박했기 때문에 조정에서까지 이 글에 대하여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1839년 7월 11일, 포졸들이 바오로의 집에 달려들어 그와 노모 그리고 누이를 잡아 포도청에 압송하여 바오로와 4대 조상까지의 이름을 명부에 올리고 옥에 가두었다. 이튿날 상재상서를 포장대리에게 주니 사흘 후 문초를 시작하였다. 바오로는 무서운 고통을 강인하게 참아나갔고 배교하라고 엄명하였으나 거절하자 옥에 가두었다. 며칠 뒤에 다시 끌려나와 톱질 형을 받아 살이 떨어져 나가고 골수와 피가 쏟아져 나왔다. 또한 그는 샤스탕과 모방 신부의 은신처를 대라고 했으나 입을 열지 않았다. 그 후 두 신부가 자수한 다음 또 심문을 받고 세 차례의 고문을 받았다. 그리하여 1839년 9월 22일, 서양 신을 나라에 끌어들인 모반죄와 부도의 죄명으로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45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한국교회 선교의 뿌리를 찾아서] 평신도 - 성 정하상 바오로

민족 구원 위해 성직자 영입 주도

  

최양업 · 김대건 등 신학생 선발 앞장

사제 요청하기 위해 북경 9차례 왕래

 

"한국 천주교회는 평신도 사도직운동의 선구적 전개를 실천한 교회이며, 스스로의 학문 활동을 통해 천주 신앙에 도달했고, 교회를 창립했고, 신앙생활을 실천했다." 1982년 제1회 '평신도 심포지엄'에서 이원순 교수(한국교회사연구소 고문)는 이같이 말했다. 평신도 사도직운동의 선구적 전개를 실천한 교회, 그 교회 안에 평신도 정하상이 있다. 한국교회 평신도의 대표격으로 불리는 정하상은 조선대목구 설정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정약종과 유소사의 아들로 1795년 출생, 1839년 서소문 밖 형장에서 순교하기까지 그는 쉼 없이 한국교회의 토대를 쌓았다.

 

윤민구 신부(수원교구 손골성지 전담)는 정하상 성인이 본격적으로 천주교 부흥운동에 뛰어든 것은 1816년의 일이라고 전한다. 신유박해와 을해박해가 일어난 직후 성직자 영입 운동에 적극 나선 것. 신유박해로 국내에서 활동하던 유일한 성직자 주문모 신부를 잃게 된 당시 조선 신자들은 가슴 아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정하상은 1816년 만 21세의 나이로 북경으로 떠나 조선의 소식을 전하고, 이후 조선교회 재건과 성직자 영입을 위해 무려 9차례나 북경을 왕래한다. 물론 유진길, 조신철 등 동료들과 함께 성직자 영입을 요청하는 서한을 교황에게 작성해 올렸지만, 이 가운데 정하상의 역할은 핵심적이었다. 결국 이들이 올린 서한은 1827년 교황청(재위 교황 레오 12세) 포교성성(현재 인류복음화성)에 전달됐다.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 주교는 정하상을 가리켜 "주께서는 우선 우리의 북경 보행군으로 나이 42세에 아직 독신이며 우리들을 모두 조선에 인도하여 들인 신자(정하상)를 찾아내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나는 3년 안으로 신품을 줄 희망을 품었습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의 노력은 초대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 파견으로 이어졌지만 입국 전 주교의 선종으로 뜻을 이루지는 못한다. 브뤼기에르 주교의 뒤를 이어 1836년 모방 신부가 서울에 도착했다. 이때 정하상의 노력은 또 한 번 빛을 발한다. 모방 신부는 최양업과 최방제, 김대건 등을 신학생으로 선발했는데, 이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사람이 정하상이라는 것이다.

 

정하상은 또 서양 선교사들을 집에 모셨고, 비서로 활동하기도 했다. 선교사들의 지방출장에 동행했고, 신자들이 성사를 보게끔 도와줬다. 당시 문헌들은 그의 지도력이 전국에 미치고 있었음을 알게 한다. 윤민구 신부는 정하상이 천주교를 통한 민족의 구원을 위해 일했으며, 당시 사회제도의 한계를 초월한 삶을 살았다고 말한다. 또 정하상 성인의 모친과 여동생이 바느질과 옷감 짜는 일로 연명했다는 사실을 볼 때, 살림이 넉넉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그는 애긍의 삶을 살았다고 전한다.

 

정하상은 「상재상서」등 저술활동에도 열심이었다. 그는 이를 통해 성교의 도리를 밝힘으로써 당시 유학자들이 가졌던 천주교에 대한 그릇된 생각들을 지적하고자 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 우리는 그가 남긴 「상재상서」를 보며 그가 생각하는 ‘신앙인으로서의 삶’을 추측해 볼 수 있다. 평신도를 넘어서 모든 신앙인의 귀감이 되고 있는 정하상 바오로. 그는 선종했지만 한국교회사 속에서 살아 숨 쉬며 오늘날 평신도가 걸어갈 길을 힘주어 외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1년 4월 17일, 오혜민 기자]

 


 

 

 

[신앙 유산] 거침없이 전개된 호교의 글 : 정하상의 상재상서

조광 이냐시오(고려대학교 교수)

  

머리글

 

조선에 천주교가 전래된 이후 조선인 신도들은 이를 참다운 가르침으로 받아들여 믿고 실천했다. 그러나 정부 당국자들은 천주교 신앙을 반(反)왕조적이며 반(反)윤리적 사상으로 파악하고 이를 엄격히 규제하고자 했다. 더욱이 1801년 황사영의 백서 사건이 터진 이후로 정부에서는 천주교 신도들을 일종의 통외 분자(通外分子)로 규정하게 되었다. 외국과의 교섭권이 국가에게만 있는 것으로 생각했던 당시의 위정자들은 천주교 신도들이 국가의 정식 허가를 거치지 아니하고 외국인과 몰래 교섭하는 일을 반역 행위의 일종으로 파악해서 처벌하곤 했던 것이다.

 

이러한 인식이 지속되던 과정에서 1839년에 이르러 대규모의 박해가 발생했다. 흔히 '기해 박해'라고도 불리우는 이 박해의 과정에서 조선에 나와서 선교하던 세 명의 프랑스 선교사들이 붙잡혀 순교했다. 그리고 정하상(丁夏祥), 유진길(兪進吉), 조신철(趙信喆) 등 조선인 신도들도 순교하게 되었다. 이때 정하상은 '재상에게 올리는 글’[上宰相書]을 지어 교회를 변호하고자 했다. 그의 글은 박해 시대의 조선 교회에서 창출해 낸 짜임새 있는 호교의 글로 평가받고 있다.

  

정하상의 삶

 

'재상에게 올리는 글'을 쓴 정하상의 한 삶은 이러하다. 정하상은 1795년 경기도 양근(楊根)의 마재(馬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정약종(丁若鍾)은 초기 교회의 대표적 지도자였으며 "주교요지"를 지었던 뛰어난 이론가였다. 정약종은 1801년의 박해 때에 그의 맏아들 정철상(丁哲祥)과 함께 순교했다. 아버지와 맏형이 순교한 1801년 당시 정하상은 일곱 살의 어린 나이에 지나지 않았다. 이 박해의 과정에서 그는 어머니 유 체칠리아와 한 살 아래 여동생 정정혜(丁情惠)와 함께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살아 남은 이들 가족들은 갖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교회의 재건과 발전을 위해 애쓰고 있었다.

 

특히, 정하상은 조선 교회와 중국 교회의 연락을 위해 그리고 선교사를 맞아들이기 위해 자신의 생애를 바쳤다. 그는 이를 위해서 중국의 북경까지 9회, 의주의 변문까지 11회나 왕래했다 한다. 그는 앵베르(Imbert) 주교를 비롯한 선교사의 입국에 안내자가 되었고, 이들을 맞아들여 보호해 주었다. '주교의 충실한 동반자'인 정하상은 주교가 입국한 이후 그로부터 신학을 배우며 스스로 성직의 길을 걷고자 했다.

 

그러나 1839년 1월경부터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탄압의 불길은 교회의 지도적 인물들에까지 미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하상은 자신의 체포를 예견하고, 박해를 피해 도망하기보다는 자신의 신앙이 옳고 바름을 떳떳이 밝히며 신앙의 자유를 옹호해 보고자 했다. 그리하여 그는 한편의 호교문을 미리 작성해 놓았다. 그러다가 1839년 6월 1일 정하상은 어머니 및 여동생과 함께 관원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체포된 직후 자신의 이 글을 재상(宰相)에게 전달해 주기를 종사관(從事官)에게 부탁했다. 이 글이 바로 ‘재상에게 올리는 글’인 것이다.

  

'상재상서'에 담긴 믿음

 

정하상은 '상재상서'에서 먼저 천주교의 교리를 풀어 밝히고 있다. 그는 천지 만물의 창조자가 있음을 말하고 인간에게 양지(良知) 즉 양심이 있음을 들어 천주의 존재를 증명하려 했다. 또한 그는 '천주 십계'를 들어 천주교의 실천 윤리를 설명했다. 그는 천주교의 '십계' 안에 유교의 삼강 오륜(三綱五倫)에 관한 모든 조항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유교의 실천 윤리에 비해 천주교의 그것이 조금도 부족함이 없음을 그는 밝혀보려 했다.

 

또한 정하상은 천주교의 영혼관을 설명하고 있다. 그는 영혼의 불멸과 상선 벌악의 당연함을 설명하며 천당과 지옥의 존재를 밝히려 했다. 그러나 그는 천주교에서 천당과 지옥을 논한다 하여 천주교가 불교의 한 갈래로 잘못 인식되던 당시의 지적 풍토를 배격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불교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천주교가 불교와는 다른 정도(正道)임을 밝히려 했다.

 

이렇게 정하상은 '상재상서'를 통해 자신의 믿음이 올바름을 선언하고 있었다. 아울러 정하상은 이 글을 통해 우선 천주의 존재를 분명히 하려 했고, 천주교 실천 윤리의 우월성을 천명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그의 선언은 당시의 지배층에서 천주교를 사학(邪學)으로 규정하는데 대한 거부의 몸짓이었다. 정하상은 천주교 교리의 근간이 되는 내용들을 요약 정리하여 조선 정부의 관리들에게 제시해 주며 그들의 깨우침에 일말의 희망을 걸어 보았다.

  

거침없이 전개된 호교론

 

정하상은 '상재상서'에서 강력한 호교론을 전개하고 있다. 그는 먼저 천주교가 '무부 무군' (無父無君)의 가르침이 아님을 밝히려 했다. 그리하여 그는 '천주 십계'의 제4 계명을 들어, 천주교가 부모와 국왕올 깍듯이 받들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물론, 정하상은 부모나 국왕에 대한 충효(忠孝)에 앞서 하느님 천주께 대한 충효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세속적 충효를 온전히 부인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국왕과 부모에게 '절대적으로' 요청되던 충효를 상대화시켰던 것이다.

 

정하상은 천주교가 중국 밖에서 전래되었기 때문에 이적 금수의 학문이라는 비난에 반대하고 있다. 그는 중국 이외의 지역에서 형성된 학문이라 하더라도 진리이면 받아들여야 함을 다음과 갈이 말했다. "외국의 도라 하여 금한다는 말이 있사온데, 다시 비유로써 말씀드리리이다. 금(金)이라는 것은 그것이 나온 땅으로써 택함이 아니라, 오직 그 깨끗함을 곧 보배로 치나이다. 도라 하는 것도 지방을 가리지 아니하고, 아무 도이든 도만 바르면 참도가 되는 것이옵니다. 어찌 참된 도가 나라와 지방을 가리겠나이까?"

 

이 밖에도 정하상은 이 글을 통해서 천주교 신도들이 재물과 여색을 공유한다는 이른바 통화 통색론(通貨通色論)에 대하여 저항하고 있다. 그는 말하기를 재물을 통한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지만, 여색을 통한다는 비난에는 전혀 근거가 없음을 밝히고자 했다. 또한 그는 조상 제사와 신주 모시는 일이 이치에 맞지 않음을 주장하면서, 신앙의 자유를 간절히 요청 했다.

  

마무리

 

정하상이 지은 '재상에게 올리는 글'은 한문으로 3400여 자에 이르는 비교적 간단한 문헌이다. 정하상은 이 제한된 글을 통해 교회에 대한 박해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어야 함을 당당히 주장하고 있다. 논리 정연하게 작성된 이 호교의 글은 초기 교회의 정신사를 밝히는 데에 있어서 매우 귀중한 자료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이 글을 지은 정하상은 1839년 8월 16일 서소문 네거리에서 목이 잘려 순교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 유 체칠리아와 여동생 정정혜도 그의 뒤를 이어 순교의 길을 걸었다. 이들이 걸은 순교의 길은 성인(聖人)에로의 길이었다. 그리하여 이들 세 사람은 다른 순교자들과 함께 1984년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이 '상재상서'는 참다움을 사랑하며 참답게 살아가려던 한 사람의 굳은 의지가 깃든 글이다. 여기에는 전환기를 살면서 겨레의 앞날을 걱정하던 한 가톨릭 지식인의 예지와 정열이 담겨 있다. 그리고 이 글은 순교자의 용기와 성인의 믿음이 스며 있는 우리의 성전(聖傳)인 것이다.

 

[경향잡지, 1990년 12월호]

 


 

 

이콘 연구소 4기 작품전, 주광희 에스텔 작, 정 정하상 바오로,

목판 에그템페라, 39.5 x 52cm, 2009년

 

[평신도주일특집] '평신도의 모범' 정하상 바오로 성인의 생애

성직자 영입위해 중국 9차례 왕복, 조선교구 설정뒤 신학생 선발 주도

 

 

한국 103위 성인 중 평신도 대표인 정하상(1795∼1839·바오로)성인. 피비린내 나는 박해로 한국교회가 쓰러질 위기에 처했을 때 그는 김대건과 최양업 등을 신학생으로 선발하고, 성직자 영입운동을 전개하는 등 교회 재건과 복음화에 진력했다. 평신도주일을 맞아 '평신도 모범' 정하상 성인의 생애를 되돌아본다.<편집자>

 

1801년에 조선 팔도를 '천주학쟁이'의 피로 물들인 신유박해. 이제 막 움트려던 한국 천주교회는 '신유'의 칼날 앞에 무참히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조선 천지의 유일한 성직자였던 주문모 신부가 체포되고, 한국 최초의 평신도 사도직단체인 '명도회' 회장 정약종을 비롯한 평신도 지도자들마저 순교하자 천주교인들은 잇따른 박해를 참지 못해 목자잃은 양처럼 뿔뿔이 흩어졌다. 이때 정약종의 아들 6살배기 정하상은 경기도 마재부락에 있는 큰 아버지 정약용의집에 숨어들어 어머니 유소사로부터 신앙을 몸으로 배워 익히며 조선 천주교회의 재건을 꿈꾼다.

 

그로부터 15년 후인 1816년. 꺼져가던 조선교회의 등불을 밝히기 위해 정하상이 내놓은 묘책은 '성직자 영입'. 즉, 목자 없이 고통만 당할 것이 아니라 평신도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양떼를 돌볼 참목자를 모셔오자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현석문(가롤로)과 유진길(아우구스티노) 등의 도움을 받아 중국까지왕복 5000리(2000km) 길을 무려 9차례나 왕복하며 '성직자 영입'에 구슬땀을 흘렸지만 당시 북경교회의 사정상 성직자 영입은 어렵게 됐다. 그러나 정하상은 여기에 굴복하지 않고 교황에게 직접 청원서를 보내 성직자 파견 문제뿐 아니라 조선 천주교인의 영적 구원을 위한 적극적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비범함을 보였다.

 

"저희는 교황 성하께 두가지 일을 겸손되이 제안합니다. 신부를 파견해 주시는 것이 저희들에게는 큰 은혜요 기쁨이 되리라는 것은 틀림없는 일이나, 이와 동시에 저희들의 욕구를 영속적으로 채워주고 장래의 후손들에게 영신적 구원을 보장해 줄 방법이 강구되지 않으면, 그것은 불충분한 일입니다."

 

결국 교황청은 1831년 조선교구를 공식적으로 설정하고, 3년후부터 유방제·모방·샤스탕 신부를 조선에 파견해 천주교인들이 성사적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정하상의 말대로 단순한 성직자 영입은 교회 재건을 위한 근본대책이 될 수없었다. 조선인 사제를 양성해 교회의 초석을 놓는 것이 시급했다. 그래서 모방 신부는 조선에 도착한 즉시 신학생 선발에 착수하지만 생면부지의 조선 땅에서 누구를 뽑을 것인지 막막했다. 이때 앞에 나서서 주도적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정하상이다. 천주교인들 사이에서 지도자역할을 했던 정하상은 평소 눈여겨 봐둔 소년 김대건·최양업·최방지거의 집에 모방 신부와 함께 찾아가 부모들에게 아들을 사제로 봉헌할 것을 권고한다.

 

"만일 당신의 아들을 서양에 보내어 천주교를 전습(傳習)하여 배우게 하면 10여년후면 다시 본국에 나와 모방 신부와 같은 사제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정하상은 이 말을 자신에게도 적용해 신학생의 길을 걷는다.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이던 앵베르 주교가 정하상의 순교적 열정과 교리에 대한 해박한 이해, 그리고 굳센 믿음에 탄복해 사제 양성을 위한 신학교육을 시켰던 것이다. 물론 정하상은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함으로써 사제의 꿈을 이룰 수 없었다. 그러나 말로만 성직자의 필요성을 외치지 않고 성직자 발굴에 직접 뛰어들고 또 죽음을 무릅쓴 채 그 자신도 사제의 길을 가려했던 점은 말과 행동, 신앙과 생활의 일치를 보여주는 참신앙인의 모범이었다.

 

1816년부터 1839년 기해박해까지 20여년을 조선 천주교회의 부흥을 위해 전력한 정하상은 서양 선교사를 자신의 집에 모시고 살며 비서의 역할을 하는 등 성직자를 보좌, 자문하는 평신도의 직무에도 충실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천주교인들은 그를 '장상'처럼 여기며 존경했고, 수많은 이들이 정하상의 도움으로 하느님을 믿게 됐다. 심지어 김대건 성인의 부친 김제준은 자신이 회개한 동기가 정하상의 권고 덕분이었음을 고백하였다.

 

"저의 백부께서 일찍이 천주학을 배웠으므로 저도 역시 이를 믿다가 신유박해때 나라의 금령이 지엄하여 다시 학습하지 못했습니다. 그 후 정하상이 제게 권하여 다시 배우게 하였으므로 저는 1년에 여러 차례 정하상의 집에 왕래하며 수계(受戒)하였습니다." 기해박해때 체포돼 피비린내 나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임금에게 박해의 부당함을 알리고 천주교의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리는 '상재상서(上宰上書)'를 제출한 정하상 성인. 그는 굳센 믿음의 생활로 그리스도의 복음과 진리를 증거한 평신도 중의 평신도다.

 

"대저 목숨을 걸고 생명을 바쳐서 천주의 가르침을 증거하고 천주의 영광을 나타냄은 저희들이 해야할 본분입니다."('상재상서'본문 중에서)

 

[평화신문, 제553호(1999-11-14), 박주병 기자]

 


 

 

수원교구 미리내 성지의 103위 시성 기념성당 옆벽에 설치된 한국 순교성인화입니다. 성 정하상 바오로, 성 유진길 아우구스티노, 성 조신철 가롤로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성 안드레아 김대건과 성 바오로 정하상과 동료 순교자 대축일

 

 

한국에는 18세기 말경에 처음으로 몇몇 평신도들의 노력으로 그리스도 신앙이 들어왔다. 1784년 북경에서 영세한 첫 한국인 이 귀국하기 전에 이미 공동체를 형성하고 신앙을 실천하였으니 이는 교회사에 전무 후무한 일이다. 초기부터 신자들은 모진 박해를 겪어야 했고 박해는 100년 이상 계속되어 만 명 이상의 순교자를 냈다. 초기 50년간에는 중국인 사제 두 분의 짧은 사목 활동이 있었을 뿐 1836년에 프랑스에서 선교사들이 몰래 입국할 때까지는 사목자 없이 평신도들만이 용감하고 열심한 신자 공동체를 지도하고 길러 냈었다. 이 공동체 속에서 1839년, 1846년, 1866년 박해 때 순교한 103명이 성인 반열에 들게 되었다. 그들 중 열심한 사목자였던 최초의 사제 안드레아 김대건과 훌륭한 평신도 바울로 정하상이 대표적 인물이다.

 

성 안드레아 김대건 사제 순교자의 편지에서

(제25신의 발췌, 김대건의 서한, 이원순, 허인 편저, 1975년, 정음사)

 

이런 군난 때에는 주의 시험을 받아 세속과 마귀를 쳐 덕공을 크게 세울 때다.

 

교우들 보아라. 우리 벗아, 생각하고 생각할지어다. 천주무시지시로부터 천지 만물을 배설하시고, 그 중에 우리 사람을 당신 모상과 같이 내어 세상에 두신 위자와 그 뜻을 생각할지어다.

 

온갖 세상 일을 가만히 생각하면 가련하고 슬픈 일이 많다. 이 같은 험하고 가련한 세상에 한 번 나서 우리를 내신 임자를 알지 못하면 난 보람이 없고, 있어 쓸데없고, 비록 주은으로 세상에 나고 주은으로 영세 입교하여 주의 제자 되니, 이름이 또한 귀하거니와 실이 없으면 이름이 무엇에 쓰며, 세상에 나 입교한 효험이 없을 뿐아니라, 도리어 배주 배은하니, 주의 은혜만 입고 주께 득죄하면 아니 남만 어찌 같으리요.

 

씨를 심는 농부를 보건대, 때를 맞추어 밭을 갈고 거름을 넣고 더위에 신고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아름다운 씨를 가꾸어, 밭 거둘 때에 이르러 곡식이 잘되고 염글면, 마음에 땀낸 수고를 잊고 오히려 즐기며 춤추며 흠복할 것이요, 곡식이 염글지 아니하고 밭 거둘 때에 빈 대와 껍질만 있으면, 주인이 땀낸 수고를 생각하고 오히려 그 밭에 거름 내고 들인 공부로써 그 밭을 박대하나니, 이같이 주 땅을 밭을 삼으시고 우리 사람으로 벼를 삼아, 은총으로 거름을 삼으시고 강생 구속하여 피로 우리를 물 주사, 자라고 염글도록 하여 계시니, 심판 날 거두기에 이르러 은혜를 받아 염근자 되었으면 주의 의지로 천국을 누릴 것이오. 만일 염글지 못하였으면 주의 의지로서 원수가 되어 영원히 마땅한 벌을 받으리라.

 

우리 사랑하온 형제들아, 알지어다. 우리 주 예수 세상에 내려, 친히 무수한 고난을 받으시고 괴로운 데로조차 성교회를 세우시고 고난 중에 자라게 하신지라. 그러나 세상 풍속이 아무리 치고 싸우나 능히 이기지 못할지니, 예수 승천 후 종도 때부터 지금까지 이르러 성교 두루 무수 간난중에 자라니. 이제 우리 조선에 성교 들어온 지5,60년에 여러 번 군난으로 교우들이 이제까지 이르고 또 오늘날 군난이 치성하여 여러 교우와 나까지 잡히고 아울러 너희들까지 환난중을 당하니, 우리 한 몸이 되어 애통지심이 없으며, 육정에 차마 이별하기 어려움이 없으랴. 그러나 성경에 말씀하시되, 작은 털끝이라도 주 돌아보신다 하고 모르심이 없어 돌보신다 하셨으니, 어찌 이렇다 할 군난이 주명 아니면 주상 주벌 아니랴.

 

주의 성의를 따라오며, 온갖 마음으로 천주 예수의 대장의 편을 들어, 이미 항복받은 세속 마귀를 칠지어다. 이런 황황한 시적을 당하여, 마음을 늦추지 말고 도리어 힘을 다하고 역량을 다하여, 마치 용맹한 군사가 병기를 갖추고 전장에 있음같이 하여 싸워 이길지어다.

 

부디 서로 우애를 잊지 말고 돕고 아울러 주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환난을 걷기까지 기다리라. 또 무슨 일이 있을 지라도, 부디 삼가고 극진히 조심하여 위주 광영하고 조심을 배로 더하고 더하여라. 여기 있은 자 20인은 아직 주은으로 잘 지내니 설혹 죽은 후라도 너희가 그 사람들의 가족들을 부디 잊지를 말라. 할 말이 무궁한들 어찌 지필로 다하리, 그친다.

 

우리는 미구에 전장에 나아갈 터이니 부디 착실히 닦아, 천국에 가 만나자. 마음으로 사랑하여 잊지 못하는 신자들에게, 너희 이런 난시를 당하여 부디 마음을 허실히 먹지 말고 주야로 주은을 빌어, 삼구를 대적하고 군난을 참아 받아, 위주 관영하고 여등의 영혼 대사를 경영하라.

 

이런 군난 때는 주의 시험을 받아, 세속과 마귀를 쳐 덕공을 크게 세울 때니, 부디 환난에 눌려 항복하는 마음으로 사주 구령사에 물러나지 말고 오히려 지나간 성인 성녀의 자취를 만만 수치하여, 성교회 영광을 더으고 천주의 착실한 군사와 의자됨을 증거하고 비록 너희 몸은 여럿이나, 마음으로는 한 사람이 되어, 사랑을 잊지 말고 서로 참아 돌보고 불쌍히 여기며, 주의 긍련하실 때를 기다리라. 할 말이 무수하되, 거처가 타당치 못한다. 모든 신자들은 천국에 만나 영원히 누리기를 간절히 바란다. 내 입으로 너희 입에 대어 사랑을 친구하노라.

 


 

 

 

성 바오로 정하상의 [상재상서]에서

(정하상의 상재상서에서, 김남수 주교 편역)

 

 

종교도 어디서 왔거나 진정 거룩한 종교라면 어찌 이 나라 저 나라의 경계가 있겠습니까

 

천주께서 천지 만물을 만드신 목적은 우리에게 당신의 복을 내려 주시고, 당신의 착하심을 드러내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늘을 만드시어 우리를 덮어 주시고 땅을 만드시어 그 위에 우리를 살게 하시고, 해와 달과 별들을 만드시어 우리를 비추시고 초목과 금수와 금은동철을 우리가 향유하고 사용하게 하셨습니다.

 

모태에서 태어나 장성할 때까지 가지가지 은혜가 이와 같이 한이 없으니. 인간의 마땅한 본분은 과연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만일 하늘을 머리에 이고 땅을 밟고 살면서 먹고 입기만 한다면 인류를 내신 분의 은덕을 저버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를 들어, 아버지가 집을 짓고 살림을 차려 아들에게 주어 쓰게 하였는데도 아들이 그 집에 살며 그 살림을 사용하면서도 제가 잘난 체하고, 부모를 섬기며 그 은덕에 보답할 도리와 근본을 모른다면 어찌 효도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불효가 아니겠습니까?

 

사람이 이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은 티끌에 이르기까지 모두 천주의 능력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를 내시고 기르시고 돌보시며 인도하십니다. 굳이 죽은 후에 받을 상을 말하지 않더라도 당장 지금 받고 있는 은혜가 극진하여 그분을 받들어 섬긴들 어찌 만 분의 일이나 보답한다 하겠습니까? 천주를 섬기는 일이 어려운 것도 아니려니와 은밀한 말을 들추어내거나 괴상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니라, 오직 스스로의 잘못을 고치고 새로운 사람이 되어 천주의 계명을 지키려는 것뿐입니다.

 

사람의 목숨이 길다 해도 백 년을 넘기지 못하는데 자기 이익만을 탐하여 얻지 못할 것을 얻으려 애쓰고 이미 얻은 것을 잃지 않으려 걱정하는 사이에 어느덧 늙고 만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 몸이 한 번 죽으면 부귀 공명도 반드시 허무로 돌아가고 맙미다. 부귀 공명마저 일평생 애써도 얻지 못하는 것인데 이 헛된 꿈을 깨기가 그다지 어렵단 말입니까? 세상에 있을 때에 정신이 흐려져 깨닫지 못하다가 육신이 죽은 뒤에 뉘우친다 해도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그러기에 목을 벨 도끼가 눈앞에 있고 몸을 삶을 가마솥이 제 뒤에 있어도 꿋꿋이 굽히지 않은 사람이 대대에 적지 않습니다. 이것도 참된 종교의 증거입니다.

 

교리의 참되고 거짓됨이나 사리의 바르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얼토당토 아니한 말로써 공격하고 배척하고 있으니, 그저 외국의 종교라 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금은 산지를 가리지 않고 순금이면 보배가 아니겠습니까? 종교도 어디서 왔거나 진정 거룩한 종교라면 어찌 이 나라 저 나라의 경계가 있겠습니까?

 

수명을 감하고 바쳐서 천주교의 참됨을 증거하고 천주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이 몸도 장차는 죽을 목숨이오니, 감히 말해야 할 이 시각을 만나 한 번 머리를 들고 길게 외치지 못하고 슬프게도 입을 다물고 죽어 버린다면 산같이 쌓인 회한을 장차 백 대 후세에 이르기까지 폭로할 길 없기에, 엎드려 청하오니, 지금 한 번 밝은 빛으로 굽어보시고, 도리가 참된지 거짓인지, 올바른지 그릇된지 자세히 판단한 다음, 위로는 정부로부터 아래로는 백성에 이르기까지 일변하여 바른길로 돌아와, 금명을 풀고 체포하는 법을 거두며, 옥에 갇힌 사람들을 석방하고 온 백성이 모드 제 고향에 돌아가 제 직업을 즐기면서 함께 평화를 누리게 해주시기를 천번 만번 바라고 또 바랍니다.

 


 

 

 

교리와 유학 소양 충분/ 호교론 상재상서 저술

정하상 바오로 성인 심포지엄

 

한국 천주교 평신도사도직협의회(회장=여규태, 지도=정월기 신부) 는 올해의 평신도 상으로 정한 정하상 바오로 성인의 생애와 활동을 고찰해보는 장을 마련했다. 한국 평협은 10월 27일 오후 2시 서울 중림동성당에서 정하상 바오로 성인 심포지엄을 열고, 한국교회 평신도 중 대표적 지도자였던 그의 활약상을 되돌아보았다. 특히 정하상은 조선교구 설정의 직접적 계기를 이룬 진보적 인물로 성직자 영입과 성직자들의 충실한 협조자의 역할을 담당하며 교회발전에 큰 업적을 남겼다. 오늘의 평신도들에게 그의 신앙을 널리 전하고 본받게 하기 위해 마련된 이 심포지엄을 지상 중계한다.

 

정하상(바오로, 1795~1839)은 북경을 9회나 왕래하면서 성직자 영입운동을 끈질기게 전개하여 조선교구 설정의 직접적인 계기를 마련했고, 유방제 신부, 모방 신부, 앵베르 주교 등을 영입했다. 그 뒤에는 그들의 복사가 되어 사목활동을 충실하게 도왔으며 기해 박해 때에는 미리 준비한 호교론서인 '상제상서' 를 재상 이지연에게 제출하여 박해자들에게 당당하게 천주교의 입장을 밝히고 박해를 그치 도록 문서로 힘있게 주장하다가 순교했다. 이러한 그의 뛰어난 활동으로 인하여 정하상은 한국 교회 평신도의 가장 모범적인 인물로 오늘날 주목받고 있다.

 

정하상의 생애와 교회활동을 그가 교회의 지도자로 성장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첫째, 정하상과 그의 가족이 신유박해 이후 경기도 마재에 가서 붙여 산 집은 정약현의 집이 아니라 정약용의 집이었다. 신유박해 때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은 정약현의 집은 정하상의 가족을 받아줄 입장에 있지 않았다. 반면에 정약용의 집은 정하상의 집과 마찬가지로 폐족의 처지에 있었기 때문에 정하상의 가족을 받아줘도 별 문제가 없었다. 신유박해 때 피해를 당해 마찬가지로 폐족의 처지에 있던 정약용, 정약전 가족들은 정하상 가족들을 돌보아 주고 보살피며 살았다고 이해된다.

 

둘째, 정하상은 뛰어난 호교론서인 '상재상서' 를 저술할 정도로 높은 수준의 유교적 소양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그는 어머니로부터 구전 교육을 통해 그의 아버지가 저술한 한글 교리서인 '주교요지' 를 비롯해 기본적인 교리서와 경문도 배웠다. 그 결과 정하상은 20세에 가출하기 전 이미 교회의 지도자로 활동할 수 있을 만큼 천주교 교리에 대해서도 충분한 이해를 갖추고 있었다. 셋째, 정하상이 함경도 무산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던 조동섬을 찾아간 것은 달레의 책에서 밝히고 있는 것 처럼 학문과 교리를 배우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20세에 가출하기 전 이미 유학과 천주교 교리에 대한 소양을 충분히 쌓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때 조동섬에게 받은 지도자 수업은 그가 교회의 지도자로 활동하는데 아마도 중요한 지침이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정하상의 신학사상 : 상재상서를 중심으로

 

상재상서는 박해의 부당성을 알리고, 천주교의 교리를 풀어 밝히는 부분, 호교론을 전개하는 부분, 그리고 정부에 대한 호소란 세 부분으로 나뉘어 볼 수 있다. 첫째 부분에서 정하상은 천지만물의 창조자가 있음을 말하고 인간에게 양심이 있음을 들어 천지만물의 창조자가 존재함을 이야기 한다. 둘째 부분에서는 호교론(護敎論)을 전개시킨다. 그는 먼저 천주교는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종교가 아니라고 변호하며 이와 같은 말은 천주교의 참뜻을 모르는 것이라 주장했다.

 

셋째 부분은 신앙의 자유를 호소하는 내용이다. 정하상은 천주교가 조선의 성리학적 전통에 크게 어긋나는 것이 아니며, 사회윤리를 바르게 하는 미덕이 천주교의 정신 안에 포함되어 있음을 변증한다. 정하상은 유교적 학문적 소양과 체계화된 신학지식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상재상서의 저술을 통해 신에 대한 설명보다는 성교(聖敎)의 도리를 밝힘으로써 당시 유학자들이 가지고 있던 천주교에 대한 그릇된 생각들을 지적하고자 했다.

 

당시 정부는 천주교를 원국지도(怨國之徒)의 집단으로서 사회변동을 꾀하며, 신부제적 사회질서를 파괴하는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집단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정부 당국은 천주교를 위협적인 존재로 느끼며 박해를 가했다. 이러한 정부 당국자들의 천주교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 대해 그는 유교 경전의 용어를 사용하면서 천주교의 정통성을 주장했다. 그는 유교 경전이 천주의 존재를 인정할 뿐 아니라 천주교의 기록이 더 오래되고 완벽하다고 주장했다. 그런 천주를 섬기는 천주교는 정통이기에 옹호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자신의 아버지 정약종이나 진외사촌 윤지충과 마찬 가지로 정부 당국을 설득하는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 대신에 유교 도덕보다 천주교의에 우선권을 두고 정통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고수한 죄목으로 1839년 서소문에서 순교했다. 정하상은 천주교를 유교로 채색할려고 했지만 이미 국가를 저버린 부도덕한 무뢰한으로 비난 받았던 것이다.

 

[가톨릭신문, 2000년 11월 5일, 마승열 기자]

 


 

 

 

성 정하상 바오로(1795-1839, 신학생, 기해박해 때 참수)

 

정하상(丁夏祥)은 한국 천주교회의 가장 훌륭한 순교자의 한 분인 정약종(丁若鐘)의 둘째 아들로, 외국 선교사의 영입을 위해 신명을 바쳐 일했고 유명한 "상재상서"(上宰相書)를 지어 천주교의 교리를 당당하게 변호했던 주님의 참된 용사이다. 그는 또 덕행과 지혜와 능력이 뛰어나 범(앵베르) 주교에 의해 이신규(李身逵)와 함께 신학생으로 뽑혀 라틴어와 신학 공부까지 했으나 박해로 인해서 신품을 받지는 못하였다.

 

정하상은 7세 때인 1801년 신유박해(申酉迫害)로 전 가족과 함께 체포되어 아버지와 이복형인 정철상(丁哲祥, 가롤로)이 순교하자 가산을 몰수당한 채 나머지 가족들과 함께 석방되었다. 몸붙일 곳이 없게 된 하상은 하는 수 없이 고향인 양근 땅 마재로 내려가 숙부인 정약용(丁若鏞)의 집에 의지하여 어린 시절을 보냈다.

 

1813년 홀로 상경하여 조증이(趙曾伊, 바르바라)의 집에서 기거하며 교리를 배우고 열심히 교회 일을 도왔고 그후 더욱 깊게 교리를 배우기 위해 함경도 무산(茂山)에 유배 중인 조동섬(趙東暹, 유스티노)을 찾아가 교리와 한문을 배우고 다시 상경, 성직자 영입운동을 전개하였다. 1816년 역관의 하인으로 들어가 동지사 일행과 함께 북경에 갔으며 그곳에서 북경 주교에게 신부 파견을 요청하였으나 실패하였고 그 후에도 조신철(趙信喆, 가롤로), 유진길(劉進吉, 아우구스티노) 등과 함께 9차례나 북경을 왕래하여 나(모방) 신부 등 네 분의 외국 신부들을 영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1839년 7월 모친 유소사(柳召史, 체칠리아), 동생 정정혜(丁情惠, 엘리사벳)와 함께 체포된 정하상은 곧 그가 쓴 "상재상서"를 대신에게 올렸는데 이 글은 한국 최초의 호교문일 뿐더러 그후 홍콩에서 책으로 발간되어 중국에서도 널리 읽혀졌다.

 

정하상은 포청에서의 6차례 신문과 형벌을 받고 의금부로 이송되어 또 3차의 형문을 당한 후 반역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9월 22일 그는 유진길과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그 때 그의 나이는 45세였다.

 

- 성녀 유소사(柳召史) 체칠리아의 아들.

- 성녀 정정혜(丁情惠) 엘리사벳의 오빠.

- 성녀 유소사(柳召史) 체칠리아, 성녀 정정혜(丁情惠) 엘리사벳, 성녀 김 데레사와 함께 체포됨.

 

 


 

 

성 정하상 바오로(丁夏祥 Paulus, 탁희성 비오 작)

 

한국 천주교회사에 큰 획을 그었던 정하상 바오로(1795-1839, 신학생, 기해박해 때 참수). 그는 천주교가 이 땅에 깊숙이 뿌리내리게 하기 위해 일익을 담당했던 사람 가운데 하나다. 1795년 정하상은 정씨 집안에 대를 이어 살고 있는 양근 땅 마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은 한글 교리서 "주요교지" 두 권을 저술한, 최초의 평신도 회장이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정씨 일가에게 큰 회오리바람이 몰아쳤다. 아버지와 형 정철상(카롤로)이 순교했고, 백부와 숙부인 정약전, 약용은 천주교에 입교한 죄로 전라도로 귀양가게 된 것이다. 정하상은 아버지가 순교할 때 일곱 살로 어머니 유 체칠리아와 여동생 정정혜(엘리사벳)과 함께 풀려났다. 유 체칠리아는 가산이 몰수당해 갈 곳이 없어 가족들을 데리고 다시 마재로 내려갔으나 문중 사람들 모두가 천주교 때문에 집안이 망했다고 하면서 냉대하고 멸시했다.

 

곤궁과 천대 속에서도 정하상은 어머니에게 천주교의 교리를 들으면서 신앙을 키워갔다. 그의 마음에는 아버지의 아들답게 신앙의 일꾼이 되고자 하는 포부를 키워갔다. 그의 마음에는 아버지의 아들답게 신앙의 일꾼이 되고자 하는 포부를 키워갔다. 바오로가 총명하고 비상한 재주를 지닌 청년으로 자라자 친지들은 혼인해서 집안을 다시 일으키라고 권했다. 그러나 바오로는 어머니께 "나에게 앞으로 해야 할 커다란 일이 있습니다. 이밖에는 마음을 쓸 일들이 없습니다."고 말씀드리고 마재를 떠났다.

 

1813년 홀로 서울로 올라온 정하상은 조증이(바르바라) 집에서 머물면서 교리를 배우고 교회 일을 열심히 하였다. 그후 바오로는 더욱 깊이 교리를 공부하기 위해 함경도 무산에 귀양가 있던 한학자 조동섬(유스티노)을 찾아가 천주교 교리와 한문을 배우고 다시 상경하였다.

 

 

그는 성직자 영입을 위해 1816년 역관의 하인으로 들어가 동지사 일행과 함께 북경에 가서 성세와 견진을 받고 주교에게 성직자 한 분을 요청했으나 실패하였다. 비록 그는 뜻은 못 이루었지만 북경에 왕래하는 길을 튼 것으로 만족하였다. 정하상은 꿈을 포기하지 않고 조신철, 유진길과 함께 아홉 차례나 북경을 왕래하면서 북경에 있는 주교와 로마에 있는 교황에게 편지를 보내는 등 끊임없이 성직자 영입운동을 벌였다. 그들의 이러한 노력으로 마침내 1827년 조선교회가 파리 외방전교회에 위임되고 동시에 조선독립교구가 설정되었으며, 유방제, 나 모방, 정 샤스탕 신부와 범 앵베르 주교를 영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국내 학자들이 스스로 교회를 세운지 사십여 년이 지났고, 1794년 주문모 신부가 파견되어 순교한 뒤로 약 사십 년만의 일이었다.

 

앵배르 주교는 바오로가 사제가 되기에 적당하다고 여겨 이신규와 함께 신학생으로 뽑아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치는 등 열심히 사목하였다. 바야흐로 조선교회의 앞날이 밝게 내다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사이에 세력다툼으로 또다시 박해가 시작되었다. 그는 주교를 피신시키고 순교의 때를 기다렸는데, 1839년 7월 어머니와 여동생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는 곧 그가 쓴 "상재상서(上宰相書)"를 대신에게 올려 천주교의 교리를 당당하게 변호했다. 이 문서는 박해의 부당성을 뛰어난 문장으로 논박했기에 조정에서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상재상서"는 한국 최초의 호교문으로 그후 홍콩에서 책으로 발간되어 중국에서도 널리 읽혔다.

 

바오로는 포청에서 서양 신부들의 은신처를 대고 배교하라고 강요당하였으나 이를 거절하였다. 며칠 뒤 다시 끌려나와 톱질형을 받아 살이 떨어져나가고 골수와 피가 쏟아져나오는 무서운 형벌을 받으면서도 끝가지 입을 열지 않았다. 정하상 바오로는 포청에서 여섯 차례의 신문과 형벌을 받고 의금부로 이송되어 세 차례에 걸친 형문을 당한 후 반역죄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결국 1839년 9월 22일, 그의 마흔 다섯에 서소문밖 형장에서 참수되었다. 사십팔 년이라는 사이를 두고 아버지와 아들이 같은 자리에서 같은 죄목으로 순교하였던 것이다.

 

[경향잡지, 1996년 9월호]

 


 

 

[한국순교자 103위 시성 25주년 기획 - 이 땅에 빛을]

 

 

정하상, 한국 평신도 사도직의 시작

정하상, 핍박 견디며 한국교회 초석 다진 평신도

 

<사진설명>

▲ 정하상(맨 오른쪽) 성인과 동생 정정혜 성녀(맨 왼쪽)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순교와 집안의 비난·핍박으로 고통 받았지만 굳센 신앙으로 극복했다. 두 성인의 신심은 어머니 유조이(가운데)에게서 배운 교리의 영향이 컸다.

▲ 서소문공원에 세워진 순교자 현양탑에는 박해 당시 목숨으로 신앙을 지킨 성인들을 기리기 위한 신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1839년 정하상이 순교한 서소문 밖 형장은 1914년 일제에 의해 철거됐다.

 

교황청에 서한 보내 성직자 파견 요청 … 조선교구 설정에 큰 역할

조선 첫 사제인 모방 신부·2대 교구장 엥베르 주교 조선 입국 도와

1839년 9월, 유진길과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44세 나이로 순교

 

순교자 성월 9월의 달력을 펼치면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을 본다. 김대건 성인의 이름 옆에 정하상 성인이 나란히 있다. 김대건 성인과 함께 이야기될 만큼 정하상 성인이 갖는 중요한 의미는 무엇일까. 우리는 왜 정하상 성인에게 한국 평신도의 방점을 찍을까. 103위 시성 25주년의 해를 맞아 오늘날 정하상 성인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들어본다.

 

서소문 밖

서울 의주로와 아현고가가 교차되는 지점.

 

서소문 밖 순교터는 이쯤으로 추정되고 있다. 1914년 일제에 의해 철거돼 흔적도 없이 사라진 서소문. 현재 이곳에서 다소 떨어진 서소문공원에는 서소문 밖 목숨을 바쳤던 그들을 기리기 위해 순교자 현양탑이, 중림동성당에는 서소문 순교자 기념관이 세워져있다. 이곳에서 순교한 44명의 이름을 손으로 하나하나 짚어본다. 많은 성인들 중에 한국 평신도의 시작, ‘정하상 바오로’. 그가 있다.

 

정하상 바오로 성인의 생애

 

정하상은 1795년 경기도 양근의 분원(현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 분원리)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아버지는 정약종. 정씨 집안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중형 정약전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아버지 정약종은 명도회 회장을 역임하는 등 지도층 신자로 활동하다 신유박해로 체포돼 순교했다. 박해 당시 정하상의 나이는 만 6살. 모친 유조이와 함께 옥에 갇혔다가 석방됐다. 하지만 아버지의 죽음으로 집안이 기울자 모친 유조이는 정하상·정정혜 남매를 데리고 마재로 가서 생활하게 된다. 이곳에서 그의 가족들은 집안의 비난과 핍박을 받으며 살아가지만 정하상은 고통을 굳센 신앙으로 극복한다. 모친의 입에서 나오는 교리를 배우며 충실한 하느님의 종으로 성장한다.

 

청년기에 들어서 교회 재건운동에 참여할 수 있는 방도를 구했다. 당시 그가 생각했던 재건 방법은 무엇보다 새 성직자를 조선에 오게 하는 일이었다. 정하상은 만 21세때인 1816년, 북경으로 떠난다. 당시 조선에서 정하상을 돕던 신자들 중에는 동정부부로 유명한 조숙(베드로)과 권데레사(권일신의 딸)가 있었다. 이후 순교자의 후손인 이경언(바오로)과 현석문(가롤로) 등이 그를 돕는다.

 

1824년, 그는 역관 출신 유진길(아우구스티노)을 만난다. 그들은 함께 북경선교사를 만나고 귀국한 뒤 교황에게 서한을 올린다. 이것이 조선 교우들이 1811년에 이어 두 번째로 교황에게 올린 서한이다. 여기에는 조선 교회의 비참한 상황과 성직자 파견요청의 내용이 들어있다. 정하상과 유진길이 조선 교우들의 이름으로 교황에게 올린 서한은 마카오를 거쳐 라틴어로 번역된 후 1827년 교황청 포교성성에 전달됐다. 1831년, 마침내 조선 포교지가 조선교구로 설정됨과 동시에 파리외방전교회의 브뤼기에르 주교가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된다. 정하상의 활약이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으로 오던 도중 병사하자 이어 프랑스 선교사 모방 신부가 1836년 정하상 등과 함께 조선에 입국한다. 하지만 정하상은 다시 조선 신학생 최양업, 김대건, 최방제 등과 함께 중국으로 출발한다. 1837년에는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 주교와 함께 조선에 들어와 주교의 복사로 활동하면서 교우촌을 순방했다. 신학생으로 선발돼 라틴어와 신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그러나 1839년 기해박해가 시작되면서 그는 체포와 순교를 예상하고 박해자들에게 제출할 호교론을 직접 작성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상재상서’다.

 

정하상은 그해 7월 가족과 동료들과 함께 체포돼 포도청으로 압송됐다. 이후 상재상서를 박해자들에게 제출하고 동료들과 문초를 받는다. 이때 앵베르 주교와 모방, 샤스탕 신부도 차례로 체포된다. 정하상은 추국을 당하지만 동요하거나 나약한 신심을 보이지 않았다. 주교·신부들과 대질신문을 받는 중에도 교회나 신자들에게 해가 되는 말은 입 밖에 내지 않았다. 1839년 9월 22일, 그는 유진길과 함께 사형판결을 받고 서소문 밖 형장으로 끌려 나가 순교했다. 그의 나이 만 44세였다.

 

 

평신도의 자랑스러운 이름

 

정하상의 이름을 다시 손가락으로 짚는다. 성직자도, 수도자도 아닌 오늘날 평신도의 모습이다. 작은 평신도인 그가 조선교구를 설정하게 하고 네 명의 성직자를 조선에서 활동하게 했다. 정하상. 우리는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의 이름 석자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말을 건넨다.

 

많은 순교자 배출한 정하상의 나주 정씨 가문

 

정하상의 정씨 집안이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실로 크다. 본관은 나주, 당색은 남인이다. 우선 정하상을 중심으로 가계도를 거슬러 올라가면, 아버지 순교자 정약종(아우구스티노)과 어머니 순교자 유조이(체칠리아)가 있다. 또한 순교자 정철상(가롤로)의 아우이자 성녀 정정혜(엘리사벳)의 오빠이기도 하다. 천주교에 입교할 때도 그의 중형 정약전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했으며 당시 정약용(요한) 또한 천주교 신자였다.

 

정하상의 ‘상재상서’

 

조선의 전통 지식인과 박해자들 비판에 대응

1839년 정하상이 지은 그리스도교 호교론서다. 상재상서는 비록 3644자로 이뤄진 짧은 내용이지만 논리는 명쾌하다. 그는 이를 통해 조선 전통 지식인과 박해자들의 비판에 정면으로 대응했다. 예를 들어 그는 천주교의 효론(孝論)을 바탕으로 제사폐지 문제를 극복하면서도, 동양의 윤리관을 존중하려고 고심했다. 이러한 점은 전통사상과의 합일 또는 교리의 토착화로 설명된다. 이와 같은 상재상서의 내용은 부친 정약종이 지은 ‘주교요지’의 교리에 바탕을 둔 것으로 훗날 안중근(토마스)의 교리 이해에 많은 영향을 준다.

 

[가톨릭신문, 2009년 2월 8일, 오혜민 기자]

 

 


 

 

 

[한국순교자 103위 시성 25주년 기획 - 이 땅에 빛을]

 

(5) 정하상의 벗들

 

한국 평신도 사도직의 시작, 정하상에게도 ‘벗’이 있었다.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 어머니 유조이와 동생 정정혜 등 가족은 물론, 북경 왕래의 훌륭한 동행자 유진길과 조신철이 그들이다. 초대 교구장의 임명도, 사제 영입이라는 기쁜 소식도 모두 그들의 작은 힘에서 시작됐다. 가톨릭신문은 김대건 신부의 벗들(2009년 2월 15일자)에 이어 103위 성인에 속한 ‘정하상의 벗들’을 알아본다.

 

경기도 남양주시 능내면 조안리에는 마재성지가 있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서로 만나는 양수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마재에 가면 정하상과 어머니 유조이, 여동생 정정혜가 어려움을 겪으며 신앙을 지켜가던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신유박해가 일어나 가산이 적몰되자 그들은 아버지 정약종의 고향 마재로 가 생활하게 된 것이다. 이곳에서 그의 가족들은 가문의 비난과 조소, 핍박과 멸시를 받으며 겨우 생계를 꾸려 살아가게 된다. 마재에서 정하상의 벗들을 하나씩 떠올려 본다.

 

<정하상의 가족>

 

정하상의 어머니, 유조이 체칠리아

 유소사로도 많이 알려진 정하상의 어머니 유조이는 정하상의 가장 큰 벗이다.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성사를 받은 유조이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정하상·정정혜 남매에게 몰래 구전으로 교리교육을 시키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아들 정하상을 북경으로 보낼 때마다 뒷바라지와 함께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은 아픔을 견뎌내기도 했다.

 

이러한 유조이의 신심은 순교(기해박해·1839년) 때 빛을 발한다. 고령의 나이에도 230대의 곤장을 맞으면서도 신앙을 버리지 않았고 기개와 믿음을 보여줬다. 당시 노인은 법으로 참수를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그는 4개월 동안 옥에서 신음하다 11월 23일 예수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며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79세다.

 

정하상의 동생, 정정혜 엘리사벳

 

여동생 정정혜 또한 정하상의 버팀목이 됐다. 천주교 신자가 아닌 다른 친척들의 박해와 핍박에도 불구하고 바느질과 길쌈으로 가족들의 생계를 도왔다. 천주교를 믿어 집안을 망하게 만들었다며 그의 가족을 적대시하던 몇몇 친척들은 정정혜의 모범을 보고 천주교에 입교하기도 했다. 성직자 영입운동을 전개하던 오빠 정하상이 서울에 거처를 마련하자 어머니와 함께 상경해 그를 도왔다.

 

선교사들의 처소를 정성으로 돌보았고 사람들을 권면해 성사를 받도록 했다. 기해박해 당시 어머니와 오빠 정하상과 함께 체포됐다. 포도청에서 7회 심문, 320도의 곤장, 고문 등을 당했으나 신앙을 지켰다. 옥중에서도 기도하고 묵상하며 교우들을 격려했다고 전해진다. 1839년 12월 29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 당한다.

 

<정하상의 동료>

 

정하상의 동반자, 유진길 아우구스티노

 성인 유대철의 아버지다. 서울의 유명한 역관 집안에서 태어났다. ‘천주실의’의 일부분을 접하고 입교했다. 한국교회가 1801년 신유박해로 유일한 성직자인 주문모 신부를 잃자 정하상과 만나 성직자 영입을 도모하게 된다. 그는 역관의 신분을 이용, 북경 교회와의 연락 및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다. 1824년 사신 행차의 일행인 역관 자격으로 북경에 들어가 정하상과 함께 주교와 신부들을 찾아보고 세례성사를 받았다.

 

1816년부터 15년간을 두고 국금을 어겨가며 성직자를 영입하기 위해 애썼으나 당시 중국은 성직자 부족 현상으로 단 한사람의 성직자도 할애하지 못했다. 이 때 그는 정하상과 상의해 로마 교황에 청원하기로 결심한다. 1825년 한문으로 쓴 청원서를 발송하고 조선교회에 대한 정책에 대해서도 요청한다. 그들의 노력으로 브뤼기에르 주교가 대목구를 맡게 되고 유 파치피코 신부,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와 앵베르 주교가 각각 입국하게 된다. 1839년 기해박해 때 가혹한 형벌을 받고 9월 22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정하상의 친구, 조신철 가롤로

 1826년 그의 나이 30세경, 정하상과 유진길 등을 알게 되며 교리를 배워 입교한다. 유진길과 함께 북경 천주당을 방문하여 세례·견진·고해·성체성사를 받았다. 동지사(冬至使)의 하급마부로 일하면서 북경 교회와의 연락과 성직자 영입 운동에 깊이 관여한다. 북경을 왕래하는 교우들을 안내하는 일은 물론 선교사의 입국에도 크게 공헌했다. 그는 애주애인하는 마음이 강해 궁핍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선교에도 힘썼다. 특히 고집을 세우며 천주교를 받아들이지 않던 아내도 설득해 입교시켜 선종하게 했다. 기해박해 당시 그는 포도청과 의금부에서 여러 차례 혹독한 심문을 받았는데 북경에서 가져온 교회 물건이 집에서 발견됐지만 서양신부들의 은신처도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 1839년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됐다.

 

[가톨릭신문, 2009년 3월 8일, 오혜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