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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103위 성인들

성녀 정정혜 엘리사벳(丁情惠 Elizabeth)

by 파스칼바이런 2012. 10. 3.

성녀 정정혜 엘리사벳(丁情惠 Elizabeth)

축일 9월 20일

 

이콘연구소 4기 회원 공동작, 성 정정혜 엘리사벳, 에그 템페라, 2009년

 

 

신      분: 동정 순교자

활동지역: 한국(Korea)

활동연도: 1797-1839년

같은이름: 엘리자베스, 엘리자벳, 정 엘리사벳, 정엘리사벳

 

성녀 정정혜 엘리사벳(Elisabeth)은 학문으로도 유명하고 또 교회 설립자 중의 한 분이며 1801년의 신유박해 때에 순교한 정약종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의 딸이고, 어머니는 유 체칠리아이며 동생은 최초의 신학생인 정하상 바오로(Paulus)이다. 집안 전체가 열심한 신앙인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일찍부터 성교회의 진리를 몸에 익히며 성장하였다. 1801년에 아버지 정 아우구스티누스와 오빠 정 카롤루스(Carolus)가 순교하였다. 엘리사벳도 어머니 유 체칠리아와 자기 오라버니 둘과 같이 붙잡혀 들어갔으나 조정에서 그들의 재산을 몰수한 후 젊은 부인과 어린 아이들은 놓아주었다.

 

그러나 살 길이 막연했던 그녀의 어머니는 마재의 시동생 정약용 요한의 집으로 갔으나 그곳에서 친척들의 냉대와 구박을 받으며 몹시 궁핍하게 지냈다. 그래서 엘리사벳은 어머니가 당하는 수많은 슬픔을 함께 나누며 살았다. 그녀는 이러한 시련 속에서도 신앙을 지켜 나갔고, 가난과 추위와 굶주림을 이겨나가는 데 익숙할 정도였다. 또한 바느질과 길쌈으로 어머니와 장차 신자들의 일꾼이 될 자기 동생 정하상 바오로의 뒷바라지를 하였다. 처음에는 천주교가 집안을 망쳐 놓았다 하여 적대시하던 몇몇 친척들도 그녀의 아름다운 모범을 보고 또 그녀의 덕에 감화되어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어려서부터 주님께 동정을 허원하였던 그녀는 언제나 단정하게 지냈지만, 30세쯤에 이르러서는 마음이 약하여져 5년 이상이나 강한 유혹을 당하였다. 그녀는 이 유혹을 이기기 위하여 기도와 단식과 편태를 사용하였는데, 마침내 그녀의 눈물은 완전한 승리를 얻을 수 있었다. 또한 선교신부들이 조선에 오기를 절실히 원하여 전심으로 그 뜻을 주님께 청하였다. 이리하여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와 두 분 신부가 입국하자 자기 집에 모시고 주밀하게 보살펴 드림으로써 감사의 뜻을 표시하였다. 앵베르 범 주교는 "엘리사벳은 참으로 여회장의 일을 불만하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신앙과 신심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박해가 일어남을 보고 무서움을 감추지 못하였으니, "내게는 과연 짐이 될까봐 무섭다"고 했던 것이다. 박해의 조짐을 알고 주교가 서울을 떠나 시골로 피신해 있는 동안 엘리사벳과 어머니 그리고 동생 정하상 바오로는 옥에 갇힌 이들을 보살펴 주다가 결국 그녀도 관헌에게 붙잡혔다.

 

그녀는 7회의 혹독한 고문과 곤장을 320대나 맞았다. 그러나 엘리사벳은 잠시도 평온을 잃지 않았고 관원은 그를 이길 희망을 버리고 10월 2일 형조로 보냈으며, 형조에서 다시 6회의 심문과 고문을 당한 후 사형선고를 받았다. 엘리사벳은 형장으로 떠나면서도 신자들에게 "무엇보다 가난한 사람들과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 많이 해 주세요"라는 말밖에는 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그녀는 마침내 12월 29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43세를 일기로 참수되어 순교하여 동정 순교자의 월계관을 얻었다. 그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녀 정정혜 엘리사벳(Elisabeth, 좌)와 성녀 유소사 체칠리아(Caecilia, 중)와

성 정하상 바오로(Paulus, 우) (정창섭 작)

 

어머니와 딸 류 체칠리아 성녀와 정 엘리사벳 성녀

최홍준 파비아노

 

 

우리는 지금까지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와 그의 맏아들 철상 카롤로 순교자들을 통해 하늘과 땅, 우주 만물을 지어내시고 주재하시는 아버지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피조물인 인간의 도리임을 익혔다. 그리고 그들 부자는 사랑이신 하느님을 삶의 첫 자리에 모시고 살다가 끝내 그러한 가치관을 위해서 목숨까지도 바쳤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람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생명인데, 순교자들은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을 얻기 위해 그것을 내놓았다. 그들 순교자들이 추구한, 목숨보다 더 값진 것을 오늘의 우리도 차지할 수 있을 것인가? '십자가의 길' 기도에서 우리는 세 번씩이나 넘어지시며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성자 그리스도를 본받고자 결심하고, '묵주기도' 고통의 신비 4단에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 지심"을 묵상하며 우리 각자가 죽음을 받아들이기로 다짐하게 된다. 언제, 어디서, 어떤 모양으로 다가오더라도, 그분께서 원하시는 나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이 순간, 내 안에 찌꺼기처럼 남아있는 '자아'를 죽이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 한국교회는 103명에 이르는 순교 성인을 모시고 있고, 다시 125명의 순교자와 증거자를 복자와 성인으로 모시기 위한 후보자인 '하느님의 종'들의 행적을 기리고 있다. 사실 성인들에 대한 공경은 '그리스도인들의 형제적 일치와 사랑의 표지'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시복 시성에 대한 열망은 단순히 어떤 인물에 대한 거룩함의 증거와 확인만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살고 있는 우리 모든 이들을 위해서 개방된 일치와 사랑의 증거로 제시돼야 한다.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각자가 그분들이 보여주는 삶의 모범을 어떻게 따르고 기릴 것인가, 이 점을 묵상할 필요가 있다.

 

호적법이 개정되면서 가정과 가족의 의미를 소홀히 여길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할지라도,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가정의 근본만은 흔들려서 안 될 것이고, 2백여 년 전 하느님을 위해서 한 가정이 풍비박산이 나고 만 정약종 일가의 '비극'을 보면서 우리는 참 삶의 지혜를 찾아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신유박해, 그로부터 38년이 지난 1839년에 기해 대박해가 일어났고, 천주교를 배척한 헌종 임금의 '척사윤음'이 나온 10월 18일 바로 그날, "한 용감한 여교우가 순교함으로써 덕과 헌신으로 짜인 긴 생애의 갚음을 받았다"고 샤를르 달레의 '한국교회사'는 기록하고 있다. "그이는 정하상 바오로의 어머니 류 체칠리아였는데, 1801년의 유명한 순교자 정 아우구스티노의 후취였다."

 

"체칠리아는 남편에게서 천주교를 배워 처음 가졌던 열심을 언제까지나 변하지 않고 보존했다. 아우구스티노가 죽은 후 체칠리아는 3명의 자녀와 함께 오랫동안 옥에 갇혀 있었다. 옥에서 풀려나왔을 때는 모든 가산이 사라진 뒤였다."

 

달레의 교회사가 언급하고 있는 류 체칠리아 식구들은 재산이 적몰되었으므로 당장 먹고 살 길이 막연했고, 하는 수 없이 고향 마재의 시아주버니 댁으로 갔다. 큰 시아주버니가 약현으로, '백서'사건의 주역 황사영 순교자의 장인이었고, 둘째와 넷째는 약전, 약용으로, 전라도지방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었다. 약용은 처음에 경상도 장기로 유배갔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전라도 강진으로 옮겨가 있었다. 박해를 받아 가장들이 떠나고 없는 가정들은 말할 나위도 없고, 처음부터 천주교를 외면하던 큰 시아주버니 댁에서도 사형수의 유족들을 반겨줄 리가 없었다. 서양 선교사의 기록을 보면,

 

"시아주버니는 그를 도와주기는 고사하고 천만 가지로 집안 박해를 일으켰고, 극도의 빈궁 속에 신음하게 버려두었다. 체칠리아의 맏딸이 얼마 가지 않아 죽었고, 순교자 철상 카롤로의 아내와 어린 아들도 죽었다. 그래서 그의 아들 하상 바오로와 딸 정혜 엘리사벳 밖에 남지 않았다."

 

철상은 약종 아우구스티노의 첫 번째 아내와의 사이에 태어난 맏이였는데, 아들 하나만을 남겨놓고 아내가 아주 젊어서 세상을 떠나자, 약종은 아들에게 교우의 모든 본분을 정성껏 가르치며, 재혼하지 않기로 작정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주위의 권면에 재혼은 했으나, 이번에는 아내와 금욕을 하며 살아갈 작정을 하게 되었다.

 

"이 사람아, 금욕이라니, 그 무슨 얼토당토않은 소리인가?"

"양반 가문의 체면을 봐서 혼인은 했지마는, 하느님을 극진히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리 하는 것이 좋을 듯하이."

"그건 오히려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처사라네."

"응? 어찌해서?"

"하느님께서는 혼인을 통해 한 남자와 한 여자를 한 몸이 되게 하심으로써 인간 생명을 전달하게 하신 걸 왜 모르시는가? 또 자식을 낳고 번성해서 온 땅에 퍼지라고 하신 성경 말씀도 모른다고 하실텐가? 후손들에게 인간 생명을 전달함으로써 배우자와 부모로서의 남자와 여자는 각각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일에 협력하는 고귀한 일을 하는 걸 어찌 모르신단 말인가?"

 

서울대교구 절두산 순교성지 순교자 박물관에 있는 정정혜 엘리사벳, 유소사 체칠리아, 정하상 바오로 성인 영정입니다. 성녀 정정혜 엘리사벳과 성 정하상 바오로는 남매지간이고, 성녀 유소사 체칠리아는 그들의 어머니입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약종 아우구스티노와 류체칠리아의 새로운 가정은 하느님 뜻 안에서 자라나게 되었다.

 

재혼을 하고 한 집에 살면서도 부부생활을 하지 않고 지내다가 주위의 권고와 스스로 하느님의 뜻을 헤아림으로써 재취 부인을 가까이하게 된 정약종은 혼인한지 3년이 지나서야 아내가 세례를 받도록 주선했다.

 

이렇듯 뒤늦게 신자가 되었지만 한 발자국 교회 안에 들어선 류 체칠리아 부인은 하느님 중심의 가정생활을 꾸려나가고자 했다. 부인은 특히 나자렛 성가정을 본받아 '성삼위의 사랑'을 구현하려고 애를 썼다.

 

"우리 가정에 허락하신 자녀들이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소중한 선물이란 걸 알았어요."

 

"그러니 말이오, 체칠리아. 교리책 '주교요지'를 쓸 때는 거울에 비친 자의 모습을 가지고 삼위일체를 설명하려고 했지만, 지금 와서 보니 우리 집안 식구들 사이에도 성삼위의 사랑을 담아낼 수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떻게요?"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성령으로 인하여 마리아에게서 잉태되고 태어나신 성자 그리스도와, 동정 마리아의 평생 배필이신 요셉 성인이 이룩해낸 나자렛 성가정이야말로 성부, 성자, 성령의 성삼위께서 서로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고자 한 모범이라는 거지요."

"우리 식구들도 서로 서로 사랑하면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해드리자는 거란 설명이지요?”

"그래요. 우리가 알고 행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이들에게 바르게 가르치는 것이 더 중요한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사실 그랬다. '주교요지'를 남긴 정 아우구스티노 회장은 자녀교육, 특히 신앙의 유산을 자녀들에게 심어주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고, 체칠리아 부인은 여기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이를 실행에 옮겼다. 남편이 순교한 다음 마재로 돌아갔을 때, 나이가 어린 까닭에 겨우 살아남았던 일곱 살 난 아들 하상 바오로와 다섯 살의 딸 정혜 엘리사벳을 잘 길러내야겠다는 굳은 각오로 종교교육에 열중했던 것이다.

 

"엄마, 바오로 오빠가 오늘도 작은집 오빠들이 공부하는 걸 엿보다가 야단맞았어요."

 

이들 가족은 넷째 숙부인 약용(다산, 요한)의 집에 머물게 되었던 것인데, 학연과 학유, 두 아들이 있었다. 하상보다 열두 살, 아홉 살 위였으나 숙모와 사촌 형들은 천주교 탓으로 가장이 귀양살이를 하고 있으므로 천주교를 신앙하는 하상네 가족들을 몹시 구박했다.  

 

"글쎄, 집안이 온통 걷잡을 수 없이 돼버린 것이 누구 탓인지 알기나 해? 천주학을 믿는 하상이 너희 때문인 줄을 아직도 모르느냐구! 응?"

 

천주교에 발을 들여놓았다가 여러 사람이 귀양살이를 하고 숱한 고난을 당하고 있던 정(丁)씨 일가는 '천주교'라는 말만 들어도 치가 떨릴 정도였고, 그 가운데서도 유독 체칠리아와 그 자녀들만 항구하게 신앙생활을 계속하고 있어서 이들에 대한 친척들의 박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통렬한 비난과 협박, 멸시와 조소, 심한 학대까지 다 동원해서 그들 가족을 구박했던 것이다. 남보다 못한 일가붙이들의 학대 속에서도 체칠리아 부인은 아이들을 달래면서 마음의 주파수는 하느님께 고정시키려고 애를 썼다.

 

"바오로야, 울고 있니?"

"아니에요, 어머니. 울긴 왜 울어요?"

"오빠, 예수님께서는 죄를 짓지 않으셨는데두 십자가상에서 수난하시고 돌아가셨잖아?"

"호, 그래. 엘리사벳 말이 옳구나. 하느님이시면서도 사람들의 죄를 대신 기워 갚아주시기 위해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님께서는 죄만 빼고는 우리 사람들과 똑 같으시단다. 그러니 수고수난하신 그 고통이 오죽이나 힘드셨겠니?"

"어머니, 저도 공부를 하고 싶어요. 여기서는 어렵고, 그래서 고향을 떠날까봐요."

"흠, 이 에미두 그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야. 이리저리 수소문해봤더니 함경도 땅 무산에 좋은 스승이 계시다는구나. 치명하신 네 아버님께서도 잘 아시던 선비 한 분이 귀양 가 계시느니라. 허나, 유배지로 가는 길이 워낙 멀고 험해서 어린 너를 보낼 수가 없구나."

 

"그런 고생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어머니."

"오빠, 거기가 어디인데? 깊은 산에선 호랑이도 나온다던데?"

"문제없어. 나도 힘께나 쓰지 않니."

"가거라."

"네에? 정말이지요, 어머니?"

"허나, 아직은 아니야. 하느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니."

"그게 언제입니까, 어머니! 전 떠나고 싶어요. 지금 당장이라도 말씀이에요."

"이 어미의 마음이 찢어지는 듯 아프구나."

"어머니…. 흑흑…"

 

아들 하상이 고향을 떠나 유랑의 길에 나섰고, 체칠리아 부인은 딸과 함께 기도로써 그를 도우며 영신생활에 더욱 깊이 잠기게 됐다.

 

 

함경도 무산에는 조동섬 유스티노 선비가 천주 신앙 때문에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하상 바오로가 심심산골인 이곳에 이른 것은 고향 마재를 떠난 지 칠팔년 후인 스무 살적이었다. 그는 천신만고 끝에 선비를 찾아가서 일반 학문과 함께 교리를 배워 훗날 국경선을 십여 차례 넘나들며 성직자를 모셔오고, 신유박해로 와해된 교회를 재건하는 데에 주역의 한 사람으로 봉사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했던 것이다.

 

아들을 떠나보낸 뒤 체칠리아 부인은 그의 성공을 기원하면서 딸과 함께 바느질과 길쌈으로 생계를 유지해나갔다.

 

"힘들지, 엘리사벳?"

"아니에요, 어머니. 전 조금도 힘들지 않아요. 다만 어머니를 고생시켜 드려서, 그게 마음 아픈걸요.”

"에휴. 노동과 가난과 추위와 굶주림에 익숙해진 네가, 온갖 시련을 참아 받으면서 숙모랑 사촌들과도 잘 아울리는 걸 보면, 그게 기특하고, 신통방통이지 뭐니."

"그건 모두 어머니 덕분이에요. 만약에, 제가 조금이라도 이웃을 사랑한 구석이 있었다면, 그건 모두 엄마가 그렇게 사셨기 때문이에요. 그렇잖음 제가 누굴 보고 자랐겠어요?"

 

박해시대 여교우들 사회에서 모전여습(母傳女習)이란 아름다운 전통이 있었다. 어머니의 신앙생활이 그대로 딸에게 전해져서 가정 안에 '사랑의 학교'가 태어났던 것을 말한다. 사실 기해박해 때 현석문 카롤로 회장과 그의 누이 경련 베네딕타가 기록한 「기해일기」총론에서는 남녀 모두 110여 명의 순교자들에 대한 언급이 있고, 그 가운데서도 78명에 대한 기록은 비교적 자세히 남아있다. 그 78명 중 특별히 여성 순교자가 50명이고, 남자가 28명인데, 여교우들이 남자들보다 훨씬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이때의 여성 순교자 거의 모두가 가족관계로 얽혀있었다.

 

"어머니, 오늘 오빠 소식을 들었어요. 또 북경엘 간다는 이야기였어요."

"흠, 몸이나 성해야 할 터인데, 쯧쯧…"

 

신유년 이후 30여년이나 성직자 없이 지내는 조선교회에 주교, 사제들을 영입하기 위해 북경엘 드나들던 하상 바오로는 그곳 주교로부터 질문을 받았다.

 

"이보라구 바오로. 모친과 누이가 외교인 지방에 그냥 살고 있다면서?"

"예, 주교님."

"안 될 일이에요. '천주십계' 중 제 사계가 무엇입니까? 부모를 효도로 공경하라, 하지 않았습니까? 어서 가서 어머니를 편안하게 모시도록 하세요. 알아들었습니까, 바오로?"

 

정하상 바오로가 무산에서 조동섬의 도움으로 1년 남짓 학문을 연구하고 교리를 공부한 다음 조선교회 재건을 위해 처음으로 북경에 간 것이 21세 때인 1816년이었고, 다섯 번째로 방문하던 1825년경 북경 주교로부터 "노모와 누이동생을 외교인 지방에 두어서는 안 된다"는 충고를 듣고 귀국해서는 박해도 피할 겸 시골 산중에서 6, 7년간을 가족과 함께 지냈다.

 

활동을 잠시 멈추었던 이 무렵은 물론이고, 그는 활동기간에도 틈틈이 책을 읽고 연구에 충실했다. 그래서 나중에 기해박해가 났을 때 우의정 이지연에게 보낸 호교론 편지 「상재상서」(上宰相書) 등을 통해 천주교로써 민족의 구원을 역설할 정도로 그의 학문도 자라났던 것이다. 하상 바오로가 어린 날의 갖은 고생을 무릅쓰고 훌륭한 신앙의 지도자로 살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어머니로부터 가정교육을 제대로 받았음을 말해준다. 이는 또한 정혜 엘리사벳의 생애에서도 드러난다. 시성 조서에서 정정혜 순교자에 대한 김 프란치스코의 증언은 이렇게 나와 있다.

 

"정정혜는 그녀의 어머니처럼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으며 동정을 지켰는데, 이러한 좋은 표양과 흔치 않은 덕으로 말미암아 모든 신자들 사이에 칭송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엘리사벳은 사실 따로 교육받은 적도 없었지만 가정교육 덕분으로 열심한 신앙인이 되어 동정을 지켰고, 모범적인 덕을 지니게 되었는데, 이러한 교육의 뿌리는 역시 순교자 정약종이었고, 그 부인 체칠리아 또한 남편의 덕과 뜻을 따라 아들딸을 잘 가르쳤던 것으로 알 수 있다.

 

"엘리사벳, 네가 노동으로 벌어서 내 북경 여비로 쓰라고 주었으니, 하느님께서 갚아주지 않으신다면 이를 어찌할꼬?"

"아이 참, 오빠두! 오빠가 북경에서 가져다준 책으로 교리공부한 건 또 어디인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잖아요, '주어라, 그러면 받을 것이다!' 호호호."

"하하하, 아무튼 여기서 쉬고 지내자니 세상 편하구나.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이도 없고 말이야."

"그렇지만 태평세월이 우리 영혼에 그저 좋기만 한 건 아니란다. 이런 때일수록 몸과 마음을 한층 더 바르게 가지면서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하느니라."

"알겠어요, 어머니…."

정혜 엘리사벳은 항상 그 성품이 단정하고, 비록 가까운 친척이라도 바로 쳐다보지 못할 정도였는데, 그런데 나이 서른에 접어들었을 때 갑자기 유혹에 걸려 넘어질 뻔 했다.

  

정정혜 엘리사벳은 "내가 정덕을 지키는 것이 이렇게 어려우니, 차라리 평탄한 길로 돌아서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이러한 유감이 점점 더 심해지고 욕정의 공격이 계속되는 바람에 이를 이겨내기 위한 자신의 고통 또한 엄청나게 바쳐야만 했다.

 

"얘야, 오늘 아침에도 대재냐?”

"네, 어머니. 이런 고행을 통해서라도 마귀 유감을 물리쳐야 할까봐요."

"하긴, 방지거 성인도 그랬다고 하더라만."

"저도 들었어요. 성인이 젊어서 한때 아시시 마을 아래쪽 가시가 많은 장미꽃밭에 자기 알몸을 던져가면서까지 욕정을 가라앉혔다고 들었어요."

 

 

엘리사벳도 엄한 고행과 함께 대재, 소재를 자주 지키고 자신의 몸을 편태, 즉 스스로 채찍질을 해가면서까지 하느님을 사랑하고자 했다.

"예수님, 십자가에 달려 갖은 고통을 다 받으시고, 숨을 거두시면서 까지도 저희 죄인들을 사랑하시어 구원의 길을 터주신 주님, 저의 고통을 주님 수난에 합쳐드리고자 하오니 받아주시어요, 네?"

 

그러면서도 또 한 가지 청원기도를 잊지 않았다.

"주 예수님, 조선교회에 성직자를 보내주십시오. 길 잃은 양떼를 바른 길로 인도해줄 사제가 필요합니다. 저의 모든 고통을 바쳐드리오니, 이 땅에 사제를 허락해주십시오, 주 예수님!"

자그마치 이태나 걸려서야 육신이 편안해지고 마음이 평화롭게 되어 자신을 이기는 승리를 맛보게 됐을 즈음, 참으로 기쁜 소식이 당도했다.

 

1801년 주문모 야고보 신부 순교 이래로 1831년 9월 9일에 조선교구가 설정됐음에도 성직자 한 분 없이 지탱해온 조선의 교회는 1833년 말에 중국인 유빠치피코 신부를 맞아들였다. 이어 프랑스 선교사 모방 나신부가 1836년 1월 입국했고, 유신부가 중국으로 돌아갈 때 국경까지 그를 배웅한 청년 신자들이 그해 연말 샤스탕 정신부를 모시고 돌아왔고, 엥베르 범주교까지 서울에 도착한 것이 1837년 12월이었다.

 

하느님의 특별한 은혜와 정하상 바오로 등의 노력으로 사도들의 후계자까지 세워 풍요롭게 된 조선교회는 날로 발전해 모방 신부가 입국할 때 6천 명 정도이던 신자수가 2년 후에는 9천명으로 늘어났고, 유 체칠리아와 정 엘리사벳 모녀는 성직자들을 뒷바라지하는 일에 혼신의 힘을 다해나갔다.

 

정하상 바오로와 정혜 엘리사벳의 어머니인 류 체칠리아는 아들이 북경으로 떠날 때마다 항상 가슴을 조이면서 기도했고, 바오로도 어머니와 누이를 떠나야 하는 어려움을 주님의 수난에 합쳐드리면서 자신과 조선교회가 바라는 모든 일이 주님 뜻 안에서 이뤄지기를 온 마음 다해 간청했다. 이들 세 가족이 작별을 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이것이 마지막일는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의연하게 일러주었다.

 

"괜찮아. 여기서 다시 만나지 못한다면 천국에서 만날 수 있을 거 아니니? 한 분이신 성삼위(聖三位)께서 계시고, 우리들의 어머니이신 동정 성모께서 함께 계시는 그 자리에 너희 아버지도 계시는 그곳에서 다시 만나게 될 테니, 무에가 두려울 거 있겠니? 그렇지 않니?"

 

그 확실한 믿음과 희망 속에 그들 가족은 서로 사랑하면서 헤어졌고, 마침내 성직자 영입이라는 큰 결실 속에 서울에 거처를 마련하고 함께 살게 되었다. 그것도 성직자들을 모시면서 살게 되었던 것이다. 하상 바오로가 주교와 신부의 복사(服事) 일을 보게 됐고, 체칠리아는 아들을 따라다니며 식복사(食服事) 뒷바라지를 맡았으나 나이가 많아 딸 엘리사벳이 주로 그 일을 해야 했다.

 

"감사합니다, 주님! 오늘이 있게 해주시니, 이 후 어떤 고난이 닥쳐오더라도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일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이겠나이다."

 

정말 감사한 마음으로 온갖 정성을 다해 성직자들을 받들어 협력하는 한편, 회장들과 모든 신자들을 극진히 대접하는 일에도 소홀하지 않으려고 애쓴 엘리사벳은 그 나름의 봉사에도 여념이 없었다. 예컨대 모든 일반 신자들에게 교리와 경문을 가르쳐 깨우쳐주었고, 그들이 교회의 여러 가지 의식과 예절, 특별히 성사를 잘 받을 수 있도록 준비시킬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뿐이 아니었다. 엘리사벳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로하고 도와주는 일에 성심을 다했다. 당시 신자들은 대부분 가난했고, 또 잇달아 흉년이 들어서 기근 또한 몹시 심했기 때문에 이 사업은 참으로 긴요한 일이었다.

 

"정말 고맙습니다. 주교님, 신부님, 엘리사벳이 너무 너무 잘해주고 있습니다요!"

교우들의 이 같은 마음을 알아차린 앵베르 범 라우렌시오 주교는 그를 조선교회의 '여회장'으로 임명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때 기해박해가 일어났다.

 

"어머니, 주교님과 신부님들을 먼저 안전한 곳으로 모셔야 하지 않겠어요? 그리구 어머니두요."

"아니다, 난 아니야."

"피신처를 마련해두었습니다, 어르신."

 

박해가 닥쳐오자 주위에서 위험을 피하라고 권했으나 류 체칠리아는 손사래를 치면서 사양했다.

"아니야. 나는 치명하기를 원했으니, 내 아들 바오로와 함께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고 싶네."

사실은 순교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고,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했다. 체칠리아가 "주님, 저에게 용기를 주십시오. 당당하게 주님을 증언할 힘을 주십시오."라며 기도하고 있을 때 그 유명한 '꿈'을 꾸게 되었던 것이다. 38년 전 신유박해 때 순교한 남편 정약종 아우구스티노가 꿈에 나타나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여보, 체칠리아. 나는 천국에 방 여덟 개 있는 집을 지었소. 그 중 다섯은 찼는데, 나머지 방 셋은 빈 채로 있소. 비참한 생활을 잘 참아 견디고, 무엇보다도 우리 있는 데로 오는 것을 잊지 마시오."라고 일러주었다. 이 꿈으로 그녀는 자신이 순교하게 될 것을 미리 알게 됐고, 위로와 용기를 얻을 수가 있었다.

 

정혜 엘리사벳은 처음에 "저는 순교자로서 자격이 없습니다."라며 겸손해했다. 그러다가 박해가 점점 더 깊어져 위험지경에 이르자 범주교의 복사들은 주교를 모시고 피신하고, 체칠리아와 엘리사벳 두 모녀만 손발이 되어 함께 지내던 몇몇 사람들과 함께 집을 지키면서 '그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 저 왔습니다. 바오롭니다."

주교가 시골로 피신하자 아들 하상 바오로가 다시 서울 집으로 왔고, 두 남매는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모시고 서로 협력하면서 다른 교우들을 위로하고, 남아있던 교회 재물을 풀어 옥중에 갇힌 이들의 먹을거리, 입을거리를 챙기고 가난한 환자들의 병고도 보살폈다. 이렇게 해서 어머니와 두 아들딸은 서로 순교할 용기를 북돋아주면서 음력 6월 초아흐렛날(양력 7월 19일), 포졸들이 들이닥치자 태연히 잡혀갔다. 아들이 국경선을 넘나든 중한 죄에 연고되어 체칠리아는 일흔아홉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국사범과 같이 오랏줄에 묶여서 갔고, 포장 앞에 불려나가 심문을 받았다.

 

"네가 천주교를 믿는다니 참말이냐?"

"예, 나는 천주교를 봉행합니다."

"천주를 배반하고 공범자를 대라."

"비록 죽을지라도 천주를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 또 이렇게 늙은것이 아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공범자는 없습니다."

체칠리아의 답변은 솔직하고 행동은 분명했으며, 또 품위 있고 점잖았다.

 

어머니 류체칠리아는 노령임에도불구하고 다섯 번 문초를 받는 동안에 곤장 230도를 맞았으나 태연자약했고, 목이 잘려 단숨에 하늘나라로 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으나 당시 국법이 노인에게 참수형을 금했으므로 포장은 매로써 그녀를 죽이려 했다. 박해자들은 열두 차례나 노인을 끌어내어 위협을 거듭하며 형벌을 가했던 것이다.

 

"네 남편은 어디 있느냐?"

포장의 문초에 정혜 엘리사벳이 대답하기를,

"출가를 아니하였나이다."

"무슨 연고인가?"

"화(禍)를 당한 집안의 여식이므로 아무도 혼인하기를 원하지 않았나이다."

"천주학은 누구에게 배웠느냐?"

"어려서부터 모친에게 배웠나이다."

"천주를 배반하라."

"배반하지 못하나이다."

"네 오라비는 죽으려고 결심했다. 너는 한 마디만 하고 어미를 데리고 나가서 살아라."

"나가 살려면 천주를 배반해야 할 것이니, 그렇게는 못하나이다."

 

온갖 유혹과 감언이설에도 흔들리지 않고, 일곱 차례의 신문과 일곱 차례의 혹독한 고문에 32도나 곤장을 맞으면서도 안색이 변하지 않았다. 엘리사벳은 오히려 "나같은 쓸데없는 종을 주 성모님께서 특별히 보존해주시니, 이제야 오 주 예수께서 받으신 형고(刑苦)의 만분의 일이나마 알게 해주심에 달게 받을 따름입니다."

 

 

엘리사벳은 10월 초이튿날 형조로 옮겨가서 여섯 번에 걸친 신문과 고문을 더 당하면서 끝내 사형선고를 받았다. 옥중에서 염경묵상하며 함께 갇힌 교우들을 위로하고 깨우치며 권면해서 끝까지 주님을 따르도록 도왔으며, 밖에까지 왕래하는 위험을 무릅쓰고 교회 재산을 들여다가 세 군데에 있는 옥방 죄수들의 먹을 것, 입을 것을 돌봐주었다. 그래서 집에 있을 때보다 오히려 더 많이 가난한 이웃을 돕는 일에 성심을 다한 엘리사벳은 형장으로 떠나가면서까지 교우들에게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

 

"무엇보다 가난한 사람들과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 많이 해주셔요."

 

노부인 류 체칠리아는 모든 것을 잘 참아 받고 몇 달 동안 옥에서 신음하다가 고통으로 기진해 옥바닥에서 마지막으로 기도를 바치면서 운명했다. 기해년 찬 바람이 몹시 불던 11월 23일이었다.

 

어머니 체칠리아가 옥중에서 순교한 지 한 달 가량이 지난 12월 29일 정혜 엘리사벳이 서울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최창현 순교자의 아우이며 손소벽 성녀의 남편이자 최영이 성녀의 아버지인 최창흡 베드로, 현석문 성인의 누이 현경련 베네딕타 등 여섯 교우들과 함께 목이 잘려 순교했다. 이곳 서소문 밖 형장은 곧 아버지 아우구스티노와 큰오빠 철상 카롤로가 신유년에 참수 치명한 곳이요, 둘째 오빠 하상 바오로가 이 해 기해년 9월 22일 하느님을 위해 붉은 피를 뿌린 거룩한 땅이다. 이때 엘리사벳의 나이 마흔셋이었다.

 

어쩌면 한 가정이 이리도 철저하게 모두 하느님 제단에 피의 제사를 올릴 수가 있었을까? 남편 정 아우구스티노 순교자와 사별하고 사십년 가까운 세월 동안 겪어야 했던 아내이자 어머니인 체칠리아의 고통은 바로 십자가의 생애 그것이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그녀는 자신이 이 고통의 생애와 가난을 극복한 위대한 순교자의 생애를 살면서 영광의 길을 닦은 것이 사실이다. 실로 위대한 순교자들의 어머니였으며, 자신이 꾸었던 꿈 그대로 가족 모두를 순교자로 하늘에 바침으로써 한국교회사에 찬연히 빛나는 궤적을 체칠리아는 그려놓았던 것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가정은 사랑을 주고받고 이를 보호하고 드러내며 전달해야 할 사명을 지닙니다. 이것이 바로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과 아울러, 신부인 당신 교회를 위한 주 그리스도의 사랑을 활기 있게 반영하고 진정으로 나누는 것입니다"(「가정 공동체」17)라고 강조했다. 현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지난해 11월 3일 ‘새가정운동 40주년’ 참석자들에게 “말없는 가운데 매우 깊이 복음화되고, 가정의 일치와 사랑이신 하느님의 선물을 증명함으로써 이를 통해 가정이 사랑의 근원이 되며 자녀들을 위해 그리스도인의 가치와 덕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학교가 되도록 할 것”을 당부하면서 '나자렛 성가정'을 모범삼아 "지속적으로 기도하고, 하느님의 말씀에 순응하며, 성화되고 충실한 삶을 이어가며 동시에 사랑하며 용서하라고 하시는 그리스도의 계명을 결코 저버리지 않고 살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렇게 볼 때 류 체칠리아 성녀는 자녀교육에 성공한 위대한 교육자로서 "한국 여성사의 정신사 안에서 지워질 수 없는" 큰 발자취를 남긴 분으로 기록하는 이도 있다. 그녀의 딸 정혜 엘리사벳 성녀 또한 가족과 가풍과 전통에 따라 순결한 생활과 덕행의 교육을 통해서, 동정인과 순교자라는 영광의 칭호를 한꺼번에 지니게 되었다.

 

아무튼 이들 모녀는 그들의 순교로써 '전 가족 순교'라는 특별한 전통을 세우면서 한국교회의 초석을 마련한 가정에다, 모전여습(母傳女習)의 대표적인 사례를 남겨놓았다.

 


 

 

성녀 정정혜 엘리사벳(丁情惠 Elisabeth, 탁희성 비오 작)

 

성녀 정정혜(丁情惠) 엘리사벳(1797-1839)

 

동정녀이며 순교자인 정정혜는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의 딸로, 4세 때 주문모 신부에게 성세(세례) 성사를 받았다. 다섯 살 되던 해인 1801년의 신유박해로 전가족과 함께 체포되었다. 아버지와 이복 오빠 정철상은 순교하였으나 정혜는 어머니 유 체칠리아, 오빠 정하상(바오로)과 함께 석방되었다. 그 후 마재의 삼촌 정약용(요한)의 집에서 살면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길쌈과 바느질로 가족들의 생계를 꾸려나갔다.

 

한편 친척들의 구박과 냉대를 아름다운 덕행과 인내로 극복하고 박대하던 몇몇 친척들까지 입교시켰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났을 때 정정혜는 서울에서 7월 11일 어머니, 오빠와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7회의 신문을 받으면서 320도의 곤장을 맞았고, 형조에서도 6회의 신문과 함께 혹독한 고문을 받았으나 정정혜는 끝까지 신앙을 지킨 끝에 12월 29일 6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때 나이 43세였다.

 

- 성녀 유소사(柳召史) 체칠리아는 어머니.

- 성 정하상(丁夏祥) 바오로는 오빠.

- 성 정하상(丁夏祥) 바오로, 성녀 유소사(柳召史) 체칠리아, 성녀 김 데레사와 함께

  체포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