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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103위 성인들

성 조신철 가롤로(趙信喆 Charles)

by 파스칼바이런 2012. 10. 4.

성 조신철 가롤로(趙信喆 Charles)

축일 9월 20일

 

수원교구 미리내 성지의 103위 시성 기념성당 옆벽에 설치된 한국 순교성인화입니다. 성 정하상 바오로, 성 유진길 아우구스티노, 성 조신철 가롤로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신      분: 복사, 순교자

활동지역: 한국(Korea)

활동연도: 1796-1839년

같은이름: 가롤루스, 까롤로, 까롤루스, 샤를, 샤를르, 조 가롤로,  조가롤로, 카롤로,

             카롤루스, 칼

 

성 조신철 카롤루스(Carolus, 또는 가롤로)는 강원도 회양에 살던 외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다섯 살 때에 모친을 잃고, 얼마 안 되는 재산마저 부친이 탕진하자 그는 하는 수 없이 집을 떠나 절에 들어가 몇 해를 지냈다. 그 후 절에서 내려와 이집 저집 다니며 머슴살이를 하다가, 나이 23세 때에 북경을 왕래하는 사신의 하인으로 들어갔다. 정직하고 용감했던 그는 사신의 종복 중에서 가장 훌륭하다는 칭찬을 듣게 되었고, 여러 번 북경을 왕래하는 동안 모은 돈으로 아버지와 형제들을 먹여 살렸다고 한다.

 

이 때 사신을 따라다니던 유진길과 정하상이 그의 착실함을 보고 장차 조선 교회의 큰 일꾼으로 만들고자 하는 생각에서 그를 입교시켰다. 얼마 후 그는 유진길과 함께 북경으로 가서 신부들을 만나보고 성세와 견진과 성체성사를 받는 즐거움을 맛보았다. 조선에 돌아온 그는 기쁨 중에 겸손과 인내와 주님께 대한 사랑으로 생활하였고, 애긍시사로 새 신자들을 도왔으며, 아내를 권유하여 입교시켰으나 불행히도 아내가 세상을 떠났다. 조 카롤루스는 열심한 신자와 재혼하여 살았는데 그 부인이 곧 최영이 바르바라(Barbara)이다.

 

비록 그는 비천한 지위에 있으면서도 조선 천주교회를 위해 많은 공헌을 하였다. 그의 도움으로 성직자들이 입국하여 복음을 전파할 수 있게 되었고, 특히 조선말을 잘 모르던 모방(Manbant, 羅) 신부의 통역관이 되어 지방 전교 사업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1839년 봄 북경에서 귀국하던 어느 날 꿈에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는데, "금년에는 순교하는 은혜를 너에게 주노라"하시는 말씀을 두 번이나 하셨다고 한다. 서울에 돌아와 보니 과연 박해가 시작되었다.

 

그 해 7월 어느 날 조 카롤루스가 외출한 사이에 포교들이 가족들을 잡아가고 말았다. 마침 집으로 돌아온 카롤루스는 곧 그들의 뒤를 따라 포도청으로 달려가서 스스로 잡혀온 사람들의 가장이라고 말하여 고문을 받게 되었다. 포장이 그의 집에서 압수한 종교서적과 묵주, 성패의 유래를 물으니 카롤루스는 자신이 북경에서 구하여 온 것이라고 대답하였을 뿐 그 밖의 물음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이에 형리들은 그의 팔과 다리를 묶어서 대들보에 매달고 닥치는 대로 매질을 하였으나 역시 별다른 말을 듣지 못하였다.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 모방 신부와 샤스탕(Chastan, 鄭) 신부가 잡히자, 조 카롤루스는 이들과 함께 의금부로 보내져서 3일간의 고문과 매질을 받고 드디어 사형선고를 받게 되었다. 그는 형장으로 싣고 갈 수레를 타기 전에 옥리에게 말하기를, "나는 천국으로 먼저 가서 기다릴 터이니 모두 용기를 내서 따라오도록 하라고 나의 가족들에게 전하여 주시오" 하며 희색이 만면하여 출발하였고, 가는 도중에도 기도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서소문 밖에 이르러 수레 위의 십자가로부터 풀려 내려질 때, 그는 많은 구경꾼들 속에 끼어 있던 외인 친척들이 슬퍼하는 것을 보고 미소로 인사를 한 후 1839년 9월 26일 44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받고 치명하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조신철 가롤로(趙信喆 Carolus, 탁희성 비오 작)

 

성 조신철(趙信喆) 가롤로(1795-1839)

 

'덕철(德喆)'로도 불리던 조신철 가롤로는 천민 출신으로 강원도 회양(淮陽)의 상민 집안에서 태어났다. 5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또 아버지가 얼마 안되는 재산을 탕진하자 한때 중이 되었다. 23세 때 동지사(冬至使)의 마부가 되었다. 30세 쯤에 유진길, 정하상 등과 알게 되어 입교했고, 북경에서 성세, 견진, 고백, 성체 성사를 받고 계속 동지사의 마부로 일하면서 북경교회와의 연락을 취하며 성직자 영입을 도와 나(모방) 신부, 정(샤스땅) 신부, 범(앵베르) 주교 등을 입국시켰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조신철은 처가로 피신했다. 그러나 6월 어느 날 외출했다가 처가로 돌아가던 중 처가를 습격한 포졸들이 어린 젖먹이까지 잡아가는 것을 보고, 포청까지 따라가 자헌했다. 포청에서의 신문 중 그가 처가집에 숨긴 성물과 성서 때문에 매우 혹독한 형벌을 당해야 했고, 곧이어 체포된 유진길, 정하상과 함께 주교와 신부들의 은신처를 대라고 형리들에게 더욱 가혹한 형벌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어떠한 형벌과 고문에도 굴하지 않았고 마침내 9월 26일 45세의 나이로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어 순교했다.

 

- 성녀 최영이(崔榮伊) 바르바라는 아내.

- 성 최창흡(崔昌洽) 베드로는 장인.

- 성녀 손소벽(孫小碧) 막달레나는 장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