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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103위 성인들

성 조윤호 요셉(趙-- Joseph)

by 파스칼바이런 2012. 10. 4.

성 조윤호 요셉(趙-- Joseph)

축일 9월 20일

 

 

 

신      분: 농부, 순교자

활동지역: 한국(Korea)

활동연도: 1848-1866년

같은이름: 요세푸스, 요제프, 조 요셉, 조세푸스, 조세프, 조셉, 조요셉, 조제프, 주세페,

            쥬세페, 호세

 

성 조윤호 요셉(Josephus)은 조화서 베드로(Petrus)의 아들로 충청도 신창에서 태어났고, 부친을 따라 1864년경부터 전주 성지동으로 이사하였으며, 박해가 일어났을 때에는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므로 부인과 함께 아버지 집에서 살고 있었다. 그의 깊은 신심과 세심하리만큼 성실한 수계생활은 주위의 모든 사람들의 칭찬을 받을 정도였다. 또 젊은 조 요셉은 아버지의 성품을 닮아 과격하고 용감한 모습도 보여주었다.

 

1866년 12월 4일 포졸들이 아버지 조 베드로를 체포하여 집에서 심문을 하고 있을 때, 아버지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집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의 부친 베드로는 아들에게 멀리 피하라고 당부하자 요셉은 "아버지, 저더러 이제 어디로 가란 말씀이십니까? 저도 같이 묶여 가기가 소원입니다. 이제껏 믿어온 믿음이 결코 헛되지 아니하게 저도 잡혀가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 이렇게 되는 날을 그 얼마나 기다렸는지요." 하며 아버지와 함께 잡혀 압송되었다.

 

전라 감사 앞에 불려나간 요셉은 먼저 문초를 받은 아버지가 배교했다고 거짓말을 하면서 배교하라는 감사의 말에 "아버지의 일은 아버지가 처리하실 줄 압니다. 저로서는 할 말이 없습니다. 저는 배교할 생각이 없으니 통촉하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감사가 성교회의 도리를 가르쳐 준 사람과 서양 책을 어디에다 숨겼느냐고 묻자 그는 "성교 도리를 가르쳐 준 분은 1839년에 치명하신 할아버지이며, 책은 가진 것이 한 권도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 후 감사는 다시 한 번 이 젊은이를 배교시켜 보려고 시도했으나 허사로 돌아갔다.

 

포졸들은 사형장으로 향하는 긴 여행 중에서까지 배교하면 잃어버린 재산을 모두 다시 찾아주겠다고 하면서 그를 꾀어보았다. 그러나 "나의 생사를 결정짓는 것은 당신들이 아닙니다. 그러니 그런 말은 그만 두십시오" 하고 거절했다. 1866년 12월 23일 포졸들은 그에게 큰 칼을 씌워 먼 길을 뛰어 사형장으로 끌고 가는 바람에 그는 기진맥진하였다. 형장에 도착하자 관리가 사형 선고장을 그 앞에 가져다 놓자 그는 태연하게 서명한 후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했다. 이에 기가 질려버린 감사가 음식 맛이 어떠냐고 묻자, 요셉은 "하느님이 창조하신 음식이라 무척 맛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도리가 없다고 생각한 감사는 바지를 벗기고 엎드리게 하였다. 손을 머리 위로 묶고 양쪽에 서서 곤장을 교대로 치기 시작하였다. 곤장은 수없이 부러져 나갔고 얼마를 쳤는지 친 사람도 기억하지 못하였다. 그렇게도 빳빳하던 고개가 드디어 푹 숙여졌다. 이를 본 사람들은 요셉이 죽은 줄 알았다. 그러나 요셉은 죽은 것이 아니었다. 뒤늦게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안 포졸은 장터로 모여든 거지 떼를 시켜 밧줄로 목을 매고 양쪽에서 당기니 숨을 거두었다. 조 요셉의 장한 순교로 그의 집은 연 3대의 순교자 가문이 되었다. 때는 1866년 12월 23일이요, 그의 나이는 19세였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지순례] 전주 서천교 - 조윤호 요셉 성인(1848-1866)

박종희 이냐시오(쌍백합 편집위원)

18살 꽃다운 나이 순교 조윤호 성인 시신 거지들이 질질 끌고 다녀

 

조윤호 요셉 성인(1848-1866)이 순교한 곳인 전주 서천교 성지 순례에 나섰다. 조윤호 성인의 이름을 딴 윤호관이 있는 숲정이 성지에서 잠깐 기도를 드리고 전주천 둔치 산책로를 따라 걸으니 서천교까지는 채 30분이 걸리지 않았다.

 

봄, 여름 푸르름으로 온몸을 가렸던 가로수가 맨 살이 드러나는 것이 부끄러운 듯 얼마남지 않은 나뭇잎이 붉게 홍조를 띠고 있었다. 산책로에 들어서자 하얀꽃처럼 핀 억새가 ‘은색터널’을 이루며 바람이 불 때마다 은날개를 펄럭이고, 깃털 붓으로 쪽빛 ‘하늘 도화지’에 뭉게 구름을 그리고, 바람결에 순간순간 변하는 모습을 흐르는 냇물 속에 담았다.

 

전주천의 여러 다리 가운데 하나인 서천교는 매곡교와 다가교 중간에 놓여 있으며, 옛날엔 정읍 방면으로 통하는 길목이었다. 이 다리 밑에서 조윤호 성인은 18세의 꽃다운 나이에 치명하였다.

 

 

꿀맛 같은 신혼초에 아버지와 함께 체포돼

 

그는 1848년 충청도 신창 남방재에서 조화서 베드로(1815-1866)와 한 막달레나의 막내로 태어났으며, 할아버지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치명한 조 안드레아이다. 어려서부터 독실한 신앙 분위기 속에서 자란 그는 8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1865년에 아버지 조화서를 따라 전주 근처의 교우촌 성지동으로 이사하여 교우 처녀인 이 루시아와 결혼하였다. 그러나 달콤한 신혼의 재미를 채 누리기도 전에 1866년 12월 4일 갑자기 들이닥친 포졸들에게 아버지 조화서, 정원지, 이명서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아버지 조화서와 함께 전주 감영에 갇혀 여러 차례에 걸친 신문과 형벌을 받았으나 그때마다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옥중에서 아버지 조화서는 아들에게 "네 마음이 변할까 걱정된다. 관장 앞에서 진리대로 말하여라” 하며 격려했고, 이에 아들은 “염려 마시고 아버님께서도 조심하세요"라고 하며 죽음의 두려움보다는 배교의 유혹에 넘어갈까 걱정하며 서로를 다독였다.

 

아버지 조화서는 배교하지 않을 땐 대가 끊긴다는 관장의 끈질긴 유혹에 여러 번 넘어갈 뻔했으나 끝가지 잘 버틴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감영에 갇힌 부자(父子) 끝까지 순교할 것 서로 독려

 

마침내 아버지 조화서는 혹독한 형벌과 배교의 유혹을 견뎌내고 1866년 12월 13일 한 겨율의 칼바람보다 더 매서운 휘광이의 칼바람에 의해 전주 숲정이에서 성지동과 대성동에서 체포된 5명의 교우들과 함께 참수형을 당하였다.

 

아버지를 잃은 슬픔에 잠길 겨를도 없이 조윤호는 당시의 부자(父子)를 한 날 같은 장소에서 처형하지 않는 국법에 따라 열흘 후인 12월 23일 서천교에서 아버지 뒤를 따라 치명하였다.

 

조윤호는 서천교 형장에서 200여 대의 매를 맞고도 숨이 붙어 있자 노끈으로 목을 졸라 죽였다. 죽은 다음에 거지들이 시체를 질질 끌고 다니며 거렁뱅이짓을 하였는데, 끔찍하고 처참한 시체를 보고 겁에 질려 얼른 밥을 내주었다고 한다. 천주교를 믿으면 그 최후가 이처럼 비참하리라는 것을 보여주는 전시용으로, 굶주린 거지들의 밥 구걸에 이용되며 지상에서 갖은 수모를 당한 조윤호는 그 겪은 고통과 치욕과 수모를 천상에서 충분히 보상을 받고 영광을 누리고 있으리라.

 

조윤호의 시신은 서천교 너머 용머리에 묻혔다가 후에 교우들이 완주 소양면 유상리 막고개에 묻힌 아버지 조화서 묘 옆으로 이장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다른 증언으로는 용머리에 갖다버렸고, 시신을 찾지 못했다고 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유상리 막고개로 이장되지 못하고 처음부터 시신을 찾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까지 그 행방을 찾을 수 없어 안타깝기 그지없다.

 

조윤호는 아버지 조화서와 함께 1968년 10월 6일 로마 성 베드로 성당에서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복자품위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어 성인 반열에 올랐다.

 

 

할아버지 - 아들 - 손자 3대가 순교의 영광 안아

 

할아버지로부터 아버지를 거쳐 손자까지 3대가 순교한 것을 보면서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재산과 명예와 권세를 쥐고 호사를 누리는 부자도 3대까지 가기 어렵다고 하는데, 모진 형벌과 회유와 협박, 그리고 피와 눈물과 땀, 고뇌와 고통이 수반되는 박해를 견디고 끝내 목숨을 바치는 순교가 3대에 걸쳐 이뤄진 것은 굳은 믿음과 영원한 삶에 대한 확신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생각된다.

어쩌다 한번 무심코 건너던 서천교 위를 거닐면서 문득 순교자들이 다리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승과 저승, 피안과 차안, 성(聖)과 속(俗), 지상과 천국을 잇는 다리 말이다.

 

굳건한 '믿음의 교각' 위에 '핍박 고통 고뇌의 상판'을 깔며 '신앙의 다리'를 놓은 순교자들의 삶과 정신을 묵상하며 육신보다는 영혼을, 지상 것보다는 천상 것을 갈구했던 그분들처럼 현세를 살아야 천상으로 이어지는 다리를 건널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순교자들의 피와 땀과 눈물로 세운 다리를 통해 물려받은 신앙의 유산을 잘 받아들이고 후세에 잘 전하는 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작은 순교가 아닐까?

 


 

 

성 조윤호 요셉(趙-- Josephus, 탁희성 비오 작)

 

성 조윤호 요셉(1848-1866, 농부, 병인박해 때 참수)

 

아버지 조화서와 함께 순교한 조윤호는 충청도 신창에서 태중 교우로 태어났다. 1864년 아버지를 따라 전주 지방의 교우촌인 성지동으로 이사하여 교우 처녀인 이 루치아와 결혼했다. 1866년 12월 5일 아버지 조화서, 정원지, 이명서 등과 함께 체포되어 전주 감영에서 아버지와 함께 6, 7차의 심문과 형벌을 받았으나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아버지가 순교한 지 10일 후인 12월 23일 전주 서문 밖 '숲정이'에서 곤장 16도를 맞은 후 19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 성 조화서 베드로는 아버지.

- 성 조화서 베드로, 성 이명서 베드로, 성 정원지 베드로와 함께 체포됨.

 


 

 

 

1866년 한 해도 저물어 가는 12월, 박해의 불길은 더욱 거세지면서 지방으로 번져가고 있었다. 병인년의 박해는 이렇게 꺼질 줄 모르고 있었다. 찬 기운이 도는 새벽녘, 조화서 베드로는 교우들을 돌보기 위해 집을 나섰다. 아들 요셉 집으로 향하던 베드로는 막 돌아서던 골목 어귀에서 천주교인을 잡으러 다니는 포졸들과 맞딱드리게 되었다. 교우들임을 순순히 밝히고 포졸들에게 포박되어 집으로 되돌아온 그는 아들만은 살아서 집을 지키고 계속 전교를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어서 피하라는 전갈을 아들에게 보냈다. 그러나 아버지가 체포되었다는 전갈을 받은 아들 요셉은 그 길로 달여와서는 오히려 "아버지, 저더러 어디로 가란 말입니까? 이제껏 믿어온 믿음이 헛되지 않게 함께 가기가 소원입니다. 허락하여 주십시오" 하며 애원하였다. 이에 조화서도 아들의 뜻을 갸륵하게 여겨 포졸들에게 "우리 부자는 결코 변하지 않는 신심이 두터운 신자들입니다" 하며 앞장서 갔다. 이렇게 해서 조화서와 윤호 부자는 같은 오리에 묶여 전주 감영으로 가면서 갖은 천대와 멸시를 받았다.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난 조화서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아버지 조 안드레아가 순교하자 곧 홀어머니를 모시고 충청도 신창으로 이사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최양업 신부의 복사로 일하기도 하였다. 1864년에는 전주지방의 교우촌인 성지동으로 이사를 가 농사를 지으며 전교에 힘쓰며 살았다.

 

조 베드로는 아내 한 막달레나가 아들 요셉을 낳고 얼마 후 세상을 떠나자 김수산나와 재혼했다. 그는 언제나 순교한 아버지의 뜻을 이어 주님의 섬기는데 전념하였고, 신자의 도리를 충실하게 지켰다. 그의 아들 요셉 또한 아버지 못지 않은 깊은 신심과 성실한 수계생활로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았다.

 

전주 감영에 도착한 조 베드로는 곧바로 심문을 받았다. 이때 포장은 "네가 아들과 함께 죽는다면 대(代)가 끓어짐은 물론 재산을 빼앗기며 가족도 살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니 배교하여 떳떳이 살아감이 어떻겠느냐?"며 배교를 강요하였다. 그러나 베드로는 "내 비록 세상에서는 죽더라도 죽은 뒤 곧 새 세상에 가서 살게 될 것이오"라고 의연하게 응수하였다. 며칠 후 조 요셉도 문초를 받는 중에 '아버지가 배교하였으니 너도 어서 배교하여 나가라'는 유혹을 받았다. "아버지의 일은 아버지가 처리하실 줄 압니다. 저로서는 관여할 바 아니옵고 저는 결코 배교할 수 없습니다"고 꿋꿋하게 말하는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가혹한 채찍과 고문뿐이었다.

 

이들 부자는 감옥에 갇혀있으면서도 "요셉아, 우리는 기왕 주님 곁에 가는 몸, 결코 형리들의 채찍 앞에 마음을 굽히지 말자. 관장 앞에 가서도 우리 성교의 진리만을 대답할 뿐 어떤 가혹한 형벌 앞에서도 마음이 흔들려서는 안된다"며 서로를 격려하며 마음을 평온하게 가졌다.

 

이윽고 조화서 베드로에게 참수형이 내려졌다. 1866년 12월 13일, 베드로는 형장에 이르러 밝은 표정을 지으며 정중히 긋고 희광이에게 "진실된 삶을 가지려거든 천주교를 믿으십시오. 그러면 당신도 나처럼 하늘나라에 갈 것이오" 하며 머리를 내밀었다. 전주 숲정이에서 참수형을 당한 그는 그때 나이 쉰둘이었다. 아버지와 아들이 같은 날에 죽을 수 없다는 국법에 따라 아들 조윤호 요셉은 열흘 뒤인 12월 23일 같은 장소에서 곤장 16도를 맞은 뒤 열아홉의 나이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이렇게 해서 조씨 가문은 삼대에 걸쳐 순교자를 내게 되었다.

 

<경향잡지, 1996년 12월호>

 


 

 

 

 

 

 전주교구 서천교 조윤호 성인 순교터에 있는 순교 기념 모자이크 벽화 모습입니다.

2006년 설치된 것으로 조윤호 성인과 순교 장면을 앞뒤로 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