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가톨릭 관련>/◆ 103위 성인들

성 최형 베드로(崔炯 Peter)

by 파스칼바이런 2012. 10. 5.

성 최형 베드로(崔炯 Peter)

축일 9월 20일

 

 

 

신      분: 회장, 순교자

활동지역: 한국(Korea)

활동연도: 1814-1866년

같은이름: 베드루스, 최 베드로, 최베드로, 페드로, 페트로, 페트루스, 피터

 

성 최형 베드로(Petrus)는 일명 최치창으로도 불렸다.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난 그는 부모와 함께 수원으로 이사했다가 1863년에 또다시 서울 석정동으로 이사하였다. 20세 때 영세 입교한 그의 부친은 슬하에 세 아들을 두었는데, 최 베드로의 동생 최방제(崔方濟) 프란치스코는 최초의 유학길에 오른 3명의 신학생중 한 명이었고, 그의 형인 최수 요한은 순교자이다. 어려서부터 한문을 잘 배워 익힌 최 베드로는 집이 넉넉지 못해 집안일을 도와 농사일이나 수공업 등의 손일을 통하여 가계를 도왔다.

 

1836년 모방(Manbant, 羅) 신부가 입국한 이래 베드로는 모방 신부의 복사로 일하였는데, 그의 재주와 신심이 크게 돋보였기 때문에 모방 신부는 자신이 순교한 1839년까지 그를 자기 옆에 있게 하였다. 1845년 유학길을 떠난 김대건 신학생이 부제가 되어 돌아오자 김 부제를 도와 조선 입국을 기다리던 페레올(Ferreol, 高) 주교와 다블뤼(Daveluy, 安敦伊) 신부를 모셔 들이는데 많은 힘을 썼다. 그는 사공 하나 없는 배를 타고 상해로 건너가 김대건 안드레아(Andreas) 부제의 서품식에도 참석하였다.

 

그 후 36세쯤에 결혼하여 서울 남쪽 교외로 내려가서 틈틈이 종교서적을 번역하고 묵주도 만들어 팔아가며 생활하였다. 1856년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가 입국하자 모든 교회 서적의 정리를 단행했는데, 이 일의 책임자로 최 베드로가 임명되자 그는 기꺼이 이 일을 맡아 여러 가지 어려움과 장애를 이겨 나가며 4년 동안 교회 서적을 많이 출간하였다.

 

1826년 2월 23일 베르뇌 주교가 체포되자 사태가 위태롭게 전개됨을 알고 피신하였으나, 이선이라는 밀고자가 그의 집을 알려주었다. 포졸들이 그의 집에 들이닥쳤으나 그가 피신하고 없었으므로 그의 아내가 문초를 받아 피와 살이 범벅이 되고 말았지만 끝까지 남편의 거처를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최 베드로의 집에 사는 14세 된 하녀가 밤중에 몰래 집을 빠져 나가는 것을 보고 포졸들이 붙잡아 곤장을 쳐서 베드로가 숨어 있는 곳을 알아내었다.

 

포졸들은 3월 1일 최 베드로를 체포하여 온 몸에 석회를 뿌리고 주먹으로 마구 친 다음 포청으로 데려갔다. 그는 천주교를 신봉했다는 죄와 사악한 책을 출판했다는 죄 그리고 다른 신자들을 선동했다는 죄 등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사형 선고문에는 "혹심한 곤장에도 굴하지 않고 쇠나 돌같이 고집이 세어 사교를 단념하지 않을 것을 맹세하였다. 또 진리를 고백하면서 사형 선고문에 직접 서명까지 하였으니 이에 국법을 따라 마땅히 사형에 처하노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하여 최 베드로는 그의 성실한 벗 전장운 요한과 함께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이때가 1866년 3월 9일이며, 그의 나이는 53세였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한국교회 선교의 뿌리를 찾아서] 평신도 - 성 최형 베드로

'성교일과'등 교회서적 간행

 

  

김대건, 최양업과 함께 사제가 되기 위해 마카오로 유학을 떠났던 최방제. 청운의 뜻을 품고 바다를 건넜다가 안타깝게도 병사한 그를 우리는 기억하면서도, 그의 형인 최형(베드로)을 기억하는 이는 사실 손에 꼽기조차 어렵다. 오히려 최형이 최방제의 형인 사실도 모르는 이가 더 많을 것이다.

 

충청도 공주에서 최인호(야고보)와 황 안나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103위 성인 가운데 하나이고, 1866년 병인박해 순교자. 하지만 최형 성인을 더욱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그가 '성교일과'와 '성찰기략' 등의 교회서적을 간행하고 묵주를 제작해 교회를 도왔으며, 훗날 교회서적 출판의 책임자가 돼 큰 공로를 남겼다는 사실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운 최방제와 최형 형제는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격동의 삶을 살았다. 누이는 동정녀로 생활하다가 1856년경 죽었으며, 큰 형 최수(베드로)는 1866년 양화진에서 참수됐다.

 

1836년 입국한 모방 신부는 최방제를 신학생으로 선발함과 동시에 그의 형 최형을 복사로 삼았다. 최방제와 최형의 운명도 이곳에서 갈린다. 최형은 2~3년간 모방 신부의 복사직을 수행하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 신자들과 체포됐다.

 

하지만 다행히 돈만 빼앗긴 채 풀려난 그는 1845년 입국한 우리나라의 첫 번째 사제 김대건 신부를 도와 이듬해 10월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의 입국까지 돕는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1846년 병오박해 때 김대건 신부가 순교하자 그는 아예 상경해 다블뤼 신부의 복사로 활동하며 목수가 돼 생활하다가 시간이 있을 때면 종교 서적을 베끼고 묵주를 만들었다. 1856년 베르뇌 주교가 입국하자 교회를 위한 최형의 활동은 더욱 활기를 띠게 된다.

 

베르뇌 주교의 명에 따라 서울에 인쇄소를 세운 그는 '성교일과' '성찰기략' 등 교회서적 다수를 간행하고, 비록 회장은 아니었지만 베르뇌 주교로부터 대세를 주는 권한까지 부여받았다. 또 자신의 집에 머물던 이덕보(마태오)에게 행랑을 내주어 학당을 마련해 교우 자녀들을 가르치게 배려하기도 했다.

 

1866년 병인박해, 최형 역시 박해의 칼날을 피해가지 못하고 1월 5일 체포됐으며, 신문 중에 신앙을 증거하다가 23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전장운(요한) 등과 함께 참수형을 받았다. 1868년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시복됐고, 1984년 다른 순교자들과 함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됐다. 축일은 9월 20일이다.

 

[가톨릭신문, 2011년 7월 3일, 오혜민 기자]

 


 

 

[한국교회 선교의 뿌리를 찾아서] 평신도 - 성 최형 베드로

 

성 최형(崔炯) 베드로(1814-1866)

 

일명 '치장'으로도 불리는 성 최형 베드로는 충청도 홍주(洪州)에서 출생하여 14세 때 부모의 권유로 입교했는데 가족이 모두 독실한 신자였다. 1836년 마카오 유학길에 오른 3명의 신학생 중 병사한 최방제는 그의 동생이었다. 큰누나는 평생 동정으로 살았으며 형 최수는 병인박해로 절두산에서 참수되었다. 이러한 독실한 교우 가정에서 성장한 최형은 1836년 나 베드로 모방 신부의 복사로 교회 일에 헌신했다.

 

1839년 기해박해로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후로는 목수일과 묵주 만드는 일, 그리고 교회서적을 출판하는 일에 참여했다. 장 시므온 주교가 입국하자 교회서적 출판의 책임자가 되어 교회서적 출판에 큰 공로를 남겼다. 1866년 장 주교가 체포되면서 많은 교회서적이 적발되자 주교의 하인 이선이의 밀고로 전장운 요한과 함께 체포되어 3월 9일 사형선고를 받고 그 날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전장운과 함께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그 때 그의 나이는 53세였다.

 

- 성 전장운(全長雲) 요한과 함께 체포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