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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103위 성인들

성녀 조증이 바르바라(趙曾伊 Barbara)

by 파스칼바이런 2012. 10. 4.

성녀 조증이 바르바라(趙曾伊 Barbara)

축일 9월 20일

 

 

 

신      분: 부인, 순교자

활동지역: 한국(Korea)

활동연도: 1782-1839년

같은이름: 발바라, 조 바르바라, 조 발바라, 조바르바라, 조발바라

 

성녀 조증이 바르바라는 명문가의 딸로서 어려서부터 훌륭한 교육을 받았으며, 16세에 남이관 세바스티아누스(Sebastianus)에게 출가하여 아들 하나를 두었으나 난지 얼마 되지 않아 죽었다. 그리고 1801년 신유박해 때 시아버지와 어머니가 희생되고 남편은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 때 남편을 따라갈 수도 없었고 또 의지할 데도 없었으므로 시골 친정으로 돌아가 남동생 집에서 갖은 고생을 하며 살았다.

 

그 당시 조선에는 신부가 한 분도 없었고 신자들과의 교류도 없었기에 바르바라도 자연히 냉담하게 지냈다. 30세 때에 서울로 올라온 그녀는 열심한 신자 친척집에 머물면서부터 예전의 허송세월을 보충하려는 뜻으로 신앙을 지키며 열심히 살았다. 또 바르바라는 친척인 정하상 바오로(Paulus)가 북경으로 선교사를 모시러 가는 계획을 도우며 그 여비를 보태기 위해서 쉬지 않고 일하였다. 1832년에 남편이 귀양지에서 돌아오자 그녀는 남편과 함께 유 파치피코(본래 이름은 余恒德) 신부를 보살펴 드렸고, 나중에는 집에 신자들을 위한 강당을 마련할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유 신부가 중국으로 돌아간 후 바르바라는 작은 집을 구하여 이사하였는데, 모방(Manbant, 羅) 신부와 샤스탕(Chastan, 鄭) 신부와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를 자신의 집에 영접하였다.

 

조 바르바라는 가끔 이런 말을 하였다. "만일 박해가 일어나면 우리는 죽어야 할 터이니, 천주의 영광을 현양하고 우리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고통을 참아 받을 마음의 준비를 하자." 과연 이것은 빈 말이 아니었고 그녀의 행동과 말이 일치하게 되었다. 그때는 기해박해가 한창이었기 때문에 남편은 시골에 가서 숨어 있었고, 바르바라는 혼자 있다가 7월 붙잡혔다. 그녀는 그녀의 이름도 밝히지 않고, 남편의 피신처도 대지 않았으며, 신앙을 배반하지도 않았기에 고문을 20회 이상이나 당하였다. 바르바라는 “만 번 죽어도 나는 천주를 배반할 수 없고 또 내 남편이 어디 숨어 있는지 알지도 못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하느님께 대한 충성과 비밀을 지킨 것 때문에 바르바라는 주리를 틀리고 곤장을 180대나 맞았고, 형조로 옮겨가서도 다시 세 차례나 곤장을 더 맞았다.

 

바르바라는 마침내 사형 선고를 받았다. 사형 집행일이 되자 옥에 갇혀 있던 모든 신자들이 그녀와 함께 있을 수 없게 된 것을 슬퍼하였다. 조증이 바르바라는 사형장에 나가기 전에 둘러싼 신자들을 애정과 신앙에 넘치는 말로 위로하고, 신앙을 증거하는데 굳건하라고 격려하며 서소문 밖의 형장으로 나아갔다. 때는 1839년 12월 29일이었으며, 그녀의 나이는 58세였다. 그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 남이관 성인은 신유박해때 경상도 단성으로 유배되어 30년간

머슴살이를 하는 고초를 겪었다.

 

 

[수원교구 성지에서 만나는 103위 성인]

단내성가정성지 남이관 · 조증이 성인

 부부가 신앙 지키며 같은 장소에서 순교

  

 

"동일동사(同日同死)하자 했더니, 이는 못해 동지동사(同地同死)합시다."

 

1839년 8월 19일(음력) 남이관 성인(세바스티아노, 1780~1839)은 서소문 형장으로 끌려가던 중 한 군사에게 옥중에 있는 아내에게 전해달라며 유언처럼 이렇게 말한다.

 

그리고 성인의 아내 조증이(바르바라, 1782~1839)는 남편의 말처럼 3개월 후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다. 한날한시에 죽자던 약속은 지키지 못했으나 부부는 신앙을 위해 몸 바치며 같은 장소에서 순교하면서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1780년 서울의 양반 교우가정에서 태어난 남이관 성인은 18세 때 교우인 조증이와 결혼했다. 1801년 신유박해로 부친이 체포되고 처가로 피신했지만 곧 체포돼 경상도 단성으로 유배된다.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된 부친은 그곳에서 사망한다.

 

그로부터 30년간 유배생활을 하면서도 성인은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성인은 1832년 풀려나 처가인 경기도 이천에서 살다가 서울로 온다. 서울에서 성인은 처가의 친척인 정하상을 도와 성직자 영입운동에 참여했고 1833년 의주에서 중국인 유방제 신부를 맞아 들여 그에게 견진성사를 받은 후 회장의 직무를 맡아 교회일을 도왔다.

 

그러던 중 1839년 기해박해로 이천으로 피신했으나 9월에 밀고자에 의해 체포돼 서울로 압송됐다. 정하상, 유진길 등과 함께 심문을 받은 성인은 형조로 이송돼 사형을 선고받고 서소문 밖 형장에서 8명의 교우와 함께 순교했다.

 

성인의 부인 조증이 성인은 경기도 이천 양반 교우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1801년 신유박해로 친정아버지가 순교하고 남편도 유배되자 친정인 이천에 내려가 10여년을 고생하며 살았다. 그 후 30세경 다시 서울에 온 성인은 정하상을 도와 선교사 영입에 필요한 자금마련을 위해 노력하는 한편 1832년 남편이 유배에서 풀려나자 남편과 함께 이듬해 입국한 유방제 신부를 보필하고 공소를 세우는데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남편을 친정으로 피신시키고 어린 딸과 함께 집을 지키고 있다가 1839년 7월 체포되었다. 성인은 포청과 형조에서 남편 남이관을 잡으려고 혈안이 된 관헌들에게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당했으나 끝까지 함구하고 신앙을 지켜 12월 29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6명의 교우와 함께 순교했다.

 

성인은 박해 전부터 "만일 박해가 일어나면 우리는 죽어야 할 터이니 천주의 영광을 현양하고 우리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고통을 참아 받을 마음의 준비를 하자"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남편을 위해 목숨을 바치며 당당히 죽음에 맞선 성인의 행동은 이 말과 일치한다. "만 번 죽어도 나는 천주를 배반할 수 없고 또 내 남편이 어디 숨어 있는지 알지도 못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같은 장소에서 순교하며 부부의 연을 하늘나라에까지 이어간 부부는 1925년 같은 날 복자위에 올랐고, 역시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 반열에 올랐다.

 

가정성화를 위한 순례성지인 '단내성지(www.dannae.or.kr)'는 남이관, 조증이 부부 성인을 기념하는 성가정성지다. 성지에는 부부 성인을 비롯해 이문우 성인, 이호영·이소사 남매 성인 등 가족 순교자들을 기념하고 기리는 순교비가 들어서 있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09년 10월 18일, 이승환 기자]

 


 

 

성녀 조증이 바르바라(趙曾伊 Barbara, 탁희성 비오 작)

 

성녀 조증이 바르바라(1782-1839, 부인, 기해박해 때 참수)

 

조증이(趙曾伊)는 경기도 이천의 양반 교우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좋은 가정교육을 받고 자라면서 매우 열심한 신앙생활을 했다. 16세 때 남이관(세바스티아노)과 결혼했으나 1801년 신유박해로 아버지 조 프란치스코와 시부모가 순교하게 되고 남편도 경상도 단성(丹城)으로 유배되자 이천의 친정으로 내려가 10여 년을 고생하며 살았다. 그후 30세 경 다시 상경하여 먼 친척이 되는 정하상을 도우며 선교사 영입에 필요한 자금 마련을 위해 노력했다. 1832년 남편이 유배에서 풀려나자 남편과 함께 이듬해 입국한 중국인 유방제 신부를 돌보며 공소를 세워 교회와 교우들을 위해 열심히 봉사했다. 그러던 중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남편을 이천으로 피신시킨 후 자신은 어린 딸과 함께 집을 지키고 있다가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남이관을 잡으려고 혈안이 된 형리들로부터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받았고, 형조에서도 가혹한 형벌을 당했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마침내 12월 29일 6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니 그때 나이 58세였다.

 

- 성 남이관(南履灌) 세바스티아노는 남편.

 


 

 

 

"나는 언제나 세바스티아노의 집에 초대되어 간 적이 있지요. 그 때 나는 그의 아내 바르바라가 어떻게 이웃을 권면하고, 수많은 비신자들을 입교시키면 계명을 충실히 지키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보았지요. 모든 교우들이 바르바라를 성녀라고 불렀어요." 교우들로부터 '살아 있는 성녀'라고 칭송을 받고 있던 조증이는 남편과 남이관과 함께 시해박해 때 순교했다.

 

조증이는 경기도 이천에서 태어나 열여섯 되던 해에 남이관과 결혼했다. 4년 뒤인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아버지 조 프란치스코와 시부모가 순교했고, 남편은 경상도 단성으로 유배되었다. 바르바라는 의지할 데가 없어 이천 친정으로 돌아와 생활하기에 급급해 자연히 냉담하게 되었다.

 

1811년 서울로 올라온 조증이는 열심한 신자 친척집에 머물면서 신앙을 되찾아 지난날을 보속이라도 하듯 기도와 통화로 신심생활에 전념하며 지냈다. 또 먼 친척이 되는 정하상이 북경으로 성직자를 모시러 가는 계획을 세우자 그를 도우며 여비를 벌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

 

1832년 남편이 유배지에서 돌아오자 그와 함께 유방제 신부를 돌보며 신자들을 위해 봉사하였다. 이들은 "앞으로 우리 나라에 또다시 큰 박해가 일어날 것이오. 우리는 지금부터 치명할 것을 잘 준비하여 그때에 순교함으로써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우리의 영혼을 구합시다"고 하며 같이 순교할 것을 다짐했다.

 

그러던 중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났다. 바르바라는 남편을 피신시킨 뒤 집을 지키고 있다가 체포되었다. 형리들은 남편을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그녀에게 매우 혹독한 형벌을 가했다. 그러나 그녀는 형리들에게 "만번을 죽어도 내 천주를 배반할 수 없고 또 내 남편이 어디 숨어있는지 알지를 못합니다"고 말했다.

 

어느 교우의 배신으로 붙잡힌 남이관은 형장으로 가면서 부인에게 "동일(同日) 동지(同地) 동사(同死)하려고 했으나 이는 못할 것 같으니 동지 동사나 할 수 있도록 내 뒤를 따르오"라는 유언을 남겼다. 남편의 소식을 들은 바르바라는 순교할 결심을 더욱 굳혔다. 마침내 조증이는 남편이 순교한 지 3개월 뒤인 1839년 12월 29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당했다. 그녀의 나이 쉰여덟이었다.

 

<경향잡지, 1996년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