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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103위 성인들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崔京煥 Francis)

by 파스칼바이런 2012. 10. 4.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崔京煥 Francis)

축일 9월 20일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Franciscus)

 

 

신      분: 회장, 순교자

활동지역: 한국(Korea)

활동연도: 1805-1839년

같은이름: 방지거, 최 프란치스코, 최프란치스코, 프란체스꼬, 프란체스꾸스, 프란체스코, 프란체스쿠스, 프란치스꼬, 프란치스꾸스, 프란치스쿠스, 프랜시스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Franciscus)는 두 번째 방인 사제인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부친으로 충청도 홍주군 다래골의 어느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천주교의 계명을 지켰다. 그는 원래 성질이 괄괄해서 불같이 일어나는 분노를 억제할 수 없을 정도였으나, 신앙의 힘으로 많은 노력을 한 결과 사람들은 그가 본래 성질이 온순한 사람인 줄 알았다고 한다. 점점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그는 우상숭배에 빠진 주위 사람들 속에서는 참 신앙생활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서울 벙거지골이라는 동네로 이사를 하였다. 그러나 이사를 하자마자 외교인과의 송사 문제로 가산을 탕진하게 되어 가족을 이끌고 산골로 들어가 살게 되었다. 그 후 그는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생활하다가 마지막으로 자리 잡은 곳이 과천 고을 수리산이었다.

 

이곳에서 그는 자기의 본분을 지키며 종교서적을 자주 읽고 가난 중에도 애긍시사를 하니 사람들은 그를 존경하여 그의 권고를 즐겨 듣고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려고 멀리서도 찾아오곤 하였다. 최 토마스 신부는 훗날 다음과 같이 회고 하였다. "저의 부친은 자주 묵상하고 신심서적을 대하셨으며, 언제나 종교와 신심외의 것은 말하지 아니하셨으며, 아버지의 말씀은 힘 있고 설복시키는 능력이 있어 모든 이에게 천주의 사랑을 심어 주셨다."

 

기해박해가 엄습하고 또 서울과 인근 지방이 기아에 시달리고 있을 때, 회장으로 임명된 그는 많은 의연금을 모아 옥에 갇힌 사람들을 돌보아 주었고, 순교자의 시체를 매장하였다. 그리고 집안사람들에게 순교토록 준비시킬 때가 된 것을 알고 성패와 성물을 감추었으나 서적은 감추지 아니하였다. 이것을 보고 조카 최 요한이 놀라서 "다른 교우들은 혐의를 받을만한 것을 모두 감추는데 이 책을 그렇게 내어 두십니까?" 하고 물었더니 "성물은 불경한 무리들이 더럽히지 못하게 감추는 것이지만, 서적이야 어디 강복한 물건이냐? 군사가 전쟁 때에 병서를 참고하지 않고 언제 하겠느냐?" 하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1839년 7월 31일 밤 서울에서 내려온 포졸들이 수리산에 이르러 고함을 치며 최 프란치스코의 집으로 달려들었다. 그는 조금도 놀라지 않고 마치 가장 친한 친구를 대하듯 포졸들을 친절한 태도로 맞이하였고, 그의 이러한 태도에 포졸들은 안심하고 누워 잠을 잤다. 해뜰 무렵에 포졸들을 깨워 음식을 대접하고는 프란치스코와 남자들과 큰 아이들이 앞장서고, 그 뒤로는 부인들과 젖먹이들이 따라가고, 맨 뒤에는 포졸들이 따라왔다. 때는 7월이라 찌는 듯한 더위로 빨리 걷지를 못하였고 어린 아이들은 피곤하여 울부짖었다. 행인들은 악담과 저주를 퍼붓는 사람도 있고 불쌍하게 보는 사람도 있었다. 이에 그는 "형제들아 용기를 분발하라. 너희 앞을 서서 갈바리아로 올라가시는 오 주 예수를 보라!"고 하며 격려하였다. 일행은 날이 저물어서야 옥에 당도하여 밤을 지냈다.

 

포장은 프란치스코를 두 차례나 주리를 틀게 하고, 뾰족한 몽둥이로 살을 찌르게 하여 배교한다고 할 때까지 고문을 하게 하였다. 프란치스코의 아들 하나가 나라 밖으로 나갔다는 것을 안 포장은 더욱 분이 치밀어서 무지하게 매질을 하여 그의 팔과 다리의 뼈가 어그러졌다. 그는 태형 3백 40도와 곤장 1백 10도를 맞았다. 다른 많은 교우들은 석방되었으나 끝까지 신앙을 증거한 이는 프란치스코와 그의 아내와 일가 부인 3명뿐이었다. 그 후 프란치스코는 포장대리 앞에 끌려 나가 치도곤 50대를 맞으니 그것이 최후의 출두요 형벌이요 신앙고백이었다. 옥으로 돌아온 그는 "예수께 내 목숨을 바치고 도끼날에 목을 잘리는 것이 소원이었으나 옥중에서 죽는 것을 천주께서 원하시니 천주의 성의가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한 후 몇 시간 뒤에 숨을 거두었다. 때는 1839년 9월 12일이요, 그의 나이는 35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한국교회 선교의 뿌리를 찾아서] 평신도 -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

한국교회 디딤돌 놓은 '참신앙인'

 

 

수리산 교우촌 회장으로 신앙 모범 보여

신심 함양 힘쓰고 나눔·극기 실천에 앞장

  

'회장'이라는 직분보다 '최양업 신부의 아버지'이자 '이성례 마리아의 남편'으로 더욱 잘 알려진 최경환 프란치스코. 그는 한 사람의 아버지, 남편, 평신도 등 다양한 꼬리표를 달고 신앙인으로서의 직분을 다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한 인물이다.

 

김수태(충남대) 교수는 '2009 수리산성지 학술 심포지엄'에서 "최경환은 수리산에서 체포돼 순교할 때까지 보여준 훌륭한 표양들만으로도 오래 기억하기에 충분한 인물"이라며 "공소회장으로 당시 교회지도자의 한 사람이었던 그는 기해박해에서 평신도 순교자를 대표하는 인물이 될 수 있었다"고 말한 바 있다.

 

이렇듯 그는 한국교회 평신도의 대표격인 정하상과 동시대를 살았고, 한국교회의 디딤돌을 함께 놓으며 평신도의 위상을 높였다. 1827년경 그는 가족들을 이끌고 서울로 이주해 살다가 박해의 위험이 있자 다시 강원도 김성과 경기도 부평으로 이주했다.

 

1838년에는 과천 수리산 뒤뜸이(현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안양9동)에 정착해 이곳을 교우촌으로 일구는데 힘썼다. 신학생으로 선발된 장남 최양업을 마카오로 보내고, 그는 모방 신부에 의해 수리산 교우촌의 회장으로 임명돼 신앙의 명맥을 이어갔다.

 

최경환의 「칠극」(예수회 판토한 신부가 지은, 죄악의 근원 일곱 가지와 이를 극복하는 일곱 가지 덕행을 다룬 책)에 대한 사랑은 지극했다. 「칠극」의 가르침을 신심의 바탕으로 삼고 있던 그는 교리에 해박했으며 묵상과 독서를 통해 신심 함양에 힘썼고, 나눔운동과 극기 실천, 그리스도와 성인·순교자들의 모범을 따르고자 애쓰는 참신앙인이었다. 그는 ‘회장’으로서 교우촌 신자들의 신앙생활은 물론 경제적 측면까지도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신자들은 어버이 같이 돌봐주는 그를 존경하고 따랐으며, 그의 권고를 즐겨 듣고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려고 멀리서 찾아오고는 했다.

 

아들 최양업 신부 또한 아버지에 대해 “저의 부친은 자주 묵상하고 신심서적을 대하셨으며, 언제나 종교와 신심 외의 것은 말하지 아니하셨으며, 아버지의 말씀은 힘 있고 설복시키는 능력이 있어 모든 이에게 천주의 사랑을 심어 주셨다”고 회고할 정도였다.

 

최경환은 자신이 선종할 때까지 평신도의 사명과 본분을 다했다. 1839년 기해박해로 인해 서울과 인근 지역에서 많은 이들이 죽고 살아남은 이들은 피신하기 시작했을 때, 그는 수리산 신자들과 함께 서울로 와 순교자 시신을 찾아 안장해주었다. 당시 무자비하고 잔혹한 박해 상황을 미루어 보았을 때, 최경환의 의연하고 담대한 애긍 실천은 놀라운 것이었다.

 

아들을 신학생으로 봉헌하고, 마을의 '회장'직분까지 맡았던 최경환은 체포됐을 때도 남보다 더 많은 고문과 형벌을 감내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서울로 압송돼 가던 도중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앞장서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타 산으로 올라간 것을 생각합시다"라며 격려했고 마음을 다잡았다. 포도청에서는 "천지만물의 대주재 이신 하느님을 어떻게 배반할 수 있겠습니까? 결코 배교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끝까지 신앙을 지켜냈다.

 

수리산 교우촌에서 신자들과 함께 평신도 신앙과 애긍을 실천하던 최경환은 결국 1839년 9월 12일 34세의 나이로 옥사했다.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에 순명하고 신앙공동체를 일구기 위해 애썼던 그는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됐다.

 

[가톨릭신문, 2011년 4월 24일, 오혜민 기자]

 


 

 

 

최경환 성인은?

이웃과 나눔·극기 실천에 솔선

 

오페라 '세인트 최경환'의 주인공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은 한국교회 두 번째 사제, 최양업 신부의 아버지다. 그는 1805년 충청도 홍주 다래골(현 대전교구 다락골성지)에서 최인주와 경주 이씨 사이의 삼남으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 왔다. 이성례(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한 후 서울로 이주했으나 박해의 위험이 있어 강원도와 경기도 부평 등으로 옮겨 다녔다.

 

1838년 경기도 과천 수리산 뒤뜸이에 정착해 교우촌을 일구기 위해 노력했다. 모방 신부에 의해 수리산 교우촌 회장을 맡은 그는 ‘칠극(七克)’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신심을 키워나갔다. 최양업 신부의 서한에 기록된 최경환 성인은 교리에 해박하고 묵상과 독서를 통해 신심 함양에 힘썼으며, 이웃과의 나눔 운동과 극기의 실천에 뛰어난 인물이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와 성인들을 따라 살고자 노력했으며 교우촌 회장으로 신자들의 신앙생활은 물론 경제적으로도 많은 도움을 줬다고 한다.

 

성인은 기해박해(1839년)때 수리산 신자들과 함께 상경한 뒤 순교자의 시신을 찾아 안장하고 다시 수리산으로 내려와 순교의 때를 기다렸다. 교우촌 신자 40여 명과 함께 체포된 그는 서울로 압송되는 도중에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앞장을 서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타 산으로 올라가는 것을 생각합시다"라며 일행들을 격려했다.

 

포도청 옥에 투옥된 성인은 교우촌 회장인데다가 아들이 신학생으로 외국에 공부하러 갔다는 이유로 더 많은 형벌을 받았다. 40일 이상 참혹한 고문을 당하면서 110대나 되는 곤장을 맞은 성인은 그 상처로 인해 옥사했다.

 

성인의 시신은 서울 노구산(현 서울 마포구)에 안장됐다가 여러 해 뒤 수리산 뒤뜸이 앞산으로 옮겨졌다. 이어 1925년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으며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됐다. 올해는 성인이 순교한지 170주년이 되는 해이자 성인으로 시성된 지 25주년이며, 또한 성인의 아들 최양업 신부 서품 160주년을 맞이하는 해다.

 

[가톨릭신문, 2009년 11월 8일, 이지연 기자]

 


 

 

 

[수원교구 성지에서 만나는 103위 성인]

수리산성지 성 최경환(프란치스코)

교우촌 건설하고 복음전파에 헌신

   

최양업 신부의 아버지

 

성인은 한국 교회 두 번째 사제 최양업 신부의 아버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원래 성질이 괄괄해서 불같이 일어나는 분노를 억제할 수 없을 정도였으나, 신앙의 힘으로 많은 노력을 한 결과 사람들은 그가 본래 성질이 온순한 사람인 줄 알았다고 할 정도였다.

 

성인은 충청도 홍주의 다락골(현 대전교구 다락골성지)에서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대대로 신앙을 이어 온 집안이라 어려서부터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고 성장해서 '내포의 사도' 이존창의 후손인 이성례(마리아)와 결혼한 뒤, 가족들과 상의하여 교우들이 많이 살고 있는 서울로 이주했다.

 

그러나 외교인들의 탄압 때문에 가산을 버리고 서울을 떠나 강원도, 경기도 부평을 거쳐 과천의 수리산에 정착, 교우촌을 건설하고 오직 신앙생활에만 전념했다. 성인은 자기 본분을 지키며 종교서적을 자주 읽고 가난 중에도 신앙의 모범을 보여 존경 받았고 많은 이들이 그의 신앙 이야기를 들으려고 멀리서도 찾아왔다고 전해진다. 성인은 1836년에는 큰 아들 최양업을 마카오로 유학 보냈다. 최양업 신부는 그의 서한에서 아버지를 이렇게 회고한다.

 

"제 부친은 자주 묵상하고 신심서적을 대하셨으며 언제나 종교와 신심외의 것은 말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말씀은 힘 있고 설복시키는 능력이 있어 모든 이에게 천주의 사랑을 심어 주셨습니다."

  

모진 고문에도 신앙 지켜

 

성인은 1839년 교우촌 초대 회장으로 임명되었고 곧이어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많은 의연금을 모아 옥에 갇힌 사람들을 돌보고 순교자의 유해를 거두어 안장했다. 그리고 박해의 칼날은 그에게도 들이닥쳤다.

 

같은 해 7월 31일 밤 서울에서 내려온 포졸들이 수리산에 이르러 고함을 치며 성인의 집으로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는 조금도 놀라지 않고 마치 가장 친한 친구를 대하듯 포졸들을 맞이하고, 음식까지 대접했다. 다음 날 해가 뜰 무렵 성인은 집에서 잠든 포졸을 깨우고 스스로 앞장서 서울로 향했다.

 

아들을 외국으로 보냈다는 죄목으로 성인은 다른 누구보다도 심한 고문을 받았다. 하지만 태형과 곤장, 치도곤 등 온갖 고초 속에서도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다.

 

9월 11일 곤장을 맞고 옥으로 돌아온 성인은 다음 날인 9월 12일 "예수께 내 목숨을 바치고 도끼날에 목을 잘리는 것이 소원이었으나 옥중에서 죽는 것을 천주께서 원하시니 천주의 성의가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한 후 숨을 거뒀다.

 

성인은 1925년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복자위에 올랐고 1984년 방한 중이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 반열에 올랐다.

  

수리산성지( http://surisan.org )는?

 

수리산성지는 은총의 대희년(2000년)을 맞아 희년 전대사를 위한 순례지로 지정되며 새롭게 문을 열었다. 최경환 성인의 묘와 십자가의 길, 순례자들을 위한 '성례 마리아의 집', '최경환 성인 고택' 등이 있다. 미사는 매일(월요일 제외) 오전 11시 봉헌된다.

 

안양역에서 병목안 삼거리를 지나 성지로 가는 도보순례도 권장할만하다. 풍광이 빼어나 신자 뿐 아니라 일반인들의 방문도 잦은 성지는 한국관광공사의 '2009년 1월 가볼만한 곳'에 선정되기도 했다.

 

※문의 031-449-2842 성지사무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09년 9월 6일, 이승환 기자]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崔京煥 Franciscus, 탁희성 비오 작)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1805-1839, 회장, 기해박해 때 옥사)

 

'영눌' 또는 '치운'으로도 불리던 최경환(崔京煥) 프란치스코는 충청도 홍주(洪州)지방 다랫골에서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는데, 그의 집안은 한국교회의 창설시대 때부터 천주교를 믿어온 집안이었다. 어려서부터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고 성장해서는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는 곳을 찾아다니다가 가족들을 설득하는데 성공, 가족과 함께 서울로 이사했다.

 

그러나 외교인들의 탄압 때문에 서울을 떠나 강원도 금성(金城), 경기도 부천을 거쳐 과천(果川)의 수리산에 정착하여 교우촌을 건설했다. 1836년 아들 최양업(崔良業)을 나(모방) 신부에게 보내어 마카오에서 신학공부를 하게 했다. 그는 1839년 초에 회장으로 임명되었고, 이어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순교자의 유해를 거두어 안장하고 교우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돌보던 중 7월 31일 서울에서 내려온 포졸들에게 교우촌 교우와 가족 도합 40여 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수리산에서 서울의 포청까지 끌려간 최경환은 2개월 동안 하루 걸러 형벌과 고문을 당해 태장 340도, 곤장 110도를 맞았다. 9월 11일 최후로 곤장 25도를 맞고는 그 이튿날 옥사, 순교했다. 그때 그의 나이 35세였다.

 


 

 

 

우리 나라에서 두 번째 신부가 된 최양업 토마스 신분의 아버지인 최경환 프란치스코는 충청도 흥주군 다랫골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한국교회 창설기부터 천주교를 믿었던 집안이다. 최경환은 원래 성질이 괄괄해 불같이 일어나는 분노를 억제할 수 업어서 작은 일에도 화를 잘 내고 곧잘 다투었다. 이러한 성질을 신앙의 힘으로 극복하여 후일에 그를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그의 온화해진 성품을 보고 탄복하였다.

 

그가 살던 지방 교우들은 오랫동안 성직자가 없었기 때문에 겉으로는 하느님을 믿으면서도, 대부분 미신과 우상숭배에 빠져있었다. 그래서 최 프란치스코는 신앙생활을 위해 가족들과 함께 서울, 가원도, 부평 등을 전전하며 살다가 경기도 과천 수리산 뒷듬이 마을에 정착하였다. 뒷듬이마을 사람들은 드문드문 집을 지어 담배일 을 일구고 옹기장사를 하며 살고 있었다.

 

최경환은 산을 개간해 밭을 일구고 살면서 새로 찾아오는 교우한테는 집을 마련해 주었다. 밤에는 교우들을 모아 교리를 가르치고 함께 묵상하며 기도를 드리는 등 마을을 교우 촌으로 만들어 나갔다. 훗날 최양업 신부는 아버지를 이렇게 회고하였다. "부친은 자주 묵상을 하고 신심서적을 대하였으며, 언제나 종교와 신심 이외의 것은 말하지 아니하셨다. 또한 아버지의 말씀은 힘있고 설복시키는 능력이 있어 모든 이에게 천주의 사랑을 심어주셨다."

 

1863년 모방(Maubnt) 신부가 입국하여. 조선에서는 서양신부가 들어와 전교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비밀리에 신학생을 선발하고 있었다. 어느 교우가 최경환의 맏아들이 총명한 아이라고 천거하였다. 모방 신부는 그들 부부를 찾아가 최양업(토마스)을 신부로 만들자고 하였다. 그때 최경환은 "신부님, 고맙습니다. 이것은 저희들의 뜻이 아니라 천주의 부르심이요 소명입니다. 저희 집안에 이러한 기쁨이 찾아올 줄은 참으로 몰랐습니다" 하며 흔쾌히 승낙하였다. 당시는 유교적 관념이 뿌리박고 있어서 자기가 낳은 자식을 형이나 아우한테 양자로 보내는 것도 꺼려하던 때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났을 대 회장이 된 그는, 의연금을 모아 옥에 갇힌 교우들과 가난한 이들을 찾아다니며 나누어주었고, 순교자들의 유해를 거두어 안장하였다. 그리고 집안사람들한테는 순교할 준비를 하라고 이르고 성패와 성물을 감추었다. 같은 해 7월 13일 밤, 서울에서 내려온 포졸들이 마을을 포위하고 욕설을 퍼부으며 그의 집으로 들어왔다. 그는 조금도 놀라지 않고 친구를 대하듯 포졸들을 반가이 맞으며 요기를 하고 쉴 것을 청하였다. 그의 이러한 태도에 안심한 포졸들은 그날 밤 평안히 잠을 잤다. 다음날 아침잠을 깬 포졸들은 아침을 푸짐하게 대접받은 뒤 최경환과 그의 가족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을 체포해 서울 포청으로 이송하였다.

 

포장은 프란치스코에게 주리를 틀게 하고 뾰족한 몽둥이로 살을 찌르면서 고문을 하게 하였다. 그의 아들 최양업이 신부가 되기 위해 나라밖으로 나간 사실이 알려지자 포장은 더욱 화가 나 무지하게 매질하여 그의 팔과 다리의 뼈가 어그려졌다. 교우들은 형벌을 못 이겨 대부분 배교하여 석방되었다. 하지만 그는 태형 삼백사십 도와 곤장 일백여 도를 맞으면서도 아내(이성례 마리아)와 친척과 함께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였다. 9월 11일 프란치스코는 포장앞에 끌려가 치도곤 오십대를 더 맞으니 그것이 최후의 출두요 형벌이었다. 옥으로 돌아온 그는 "예수께 내 목숨을 바치고 도끼 날에 목을 잘리는 것이 소원이었으나 옥중에서 죽는 것을 천주께서 원하시니 천주의 성의가 이루어졌다"라고 말한 뒤 숨을 거두었다. 때는 1839년 9월 12일, 그의 나이 서른 다섯이었다.

 

[경향잡지, 1996년 8월호]

 


 

 

 

 

수원교구 수리산 성지 순례자 성당과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 고택에 있는 가족 성화 모습입니다. 첫 두 장은 순례자 성당에 그리고 나머지 한 장은 고택 성당 입구에 있습니다.

  

최경환(프란치스코) 일가의 순교, 2001, 한지에 수묵, 48×75㎝, 조희성 베드로

최경환은 최양업(토마스) 신부의 부친으로 충청도 청양 다락골에서 살다 양업을 마카오로 유학보낸 후 경기도 안양 수리산으로 이주하여 교우촌을 이루며 살다 박해가 시작되어 포졸들이 들이닥치자 그들을 접대하고 동네 사람들을 불러모아 순교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올 수 있는 길임을 교우들에게 전하며 순교의 길을 격려하며 옥에 갇혀 혹독한 형벌의 고통을 당했다. 그러나 기구와 교리강론을 통해 하느님을 증거하고, 끝까지 신앙을 지켜 35세의 나이로 옥중에서 순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