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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신 앙 관 련

기도(祈禱)의 식별(識別) ④

by 파스칼바이런 2012. 11. 9.

 

 

Ⅴ. 고독과 위안(상태) 안에서의 식별

 

3. 위안

 

2) 까닭이 있는 위안

 

우리의 종교적 체험의 대부분은 감지할 수 있는 미리 있는 원인이 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성서 구절을 묵상하거나 성서의 어떤 장면에 대해 관상을 했을 때 경건한 생각이나 상상이 빌미가 되어 위안을 맛보게 된다. 이처럼 성서의 묵상, 관상이 감지할 수 있는 미리 있는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내 오감에 닿아 지력과 의지와 활동을 추적함으로써 위안을 맛볼 때 미리 있는 원인이 된다. 내 생각과 상상들 안에서 나오는 위안들이 과연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인지 아니며 거짓 영에서 오는 것인지를 어떻게 식별할 수 있을까?

 

"까닭 있는 위안은 천사도 마귀도 줄 수 있으나 그 목적은 서로 반대된다" 고 이냐시오는 말한다. 하느님이 위안을 통해서 영혼을 사랑과 관용 면에서 성장하도록 이끌어 주시는 데 비해 "마귀는 흔히 착한 영혼의 심리에 마주쳐서 처음에는 선하고 거룩한 생각을 선동한 후 차츰 그 영혼을 은밀한 계교와 흉악한 음모에 빠지게 하여 그 목적을 달성하려고 한다." 즉 마귀는 빛의 천사로 위장하고, 자신을 소박하고 매혹적인 존재로 만들며, 권위주의자가 아닌 양 처신하며, 격려하는 말들을 하며 처음에는 영혼의 뜻을 충실히 따르는 척하다가 나중에 오류로 인도한다.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만일 우리가 명백히 악한 것에 대한 유혹에 거의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영혼들이며, 그리고 우리의 주님에 대한 투신 면에서 비교적 성숙되고 안정된 상태에 있다면, 이 때에 악령이 영혼을 속이기 위해서는 선의 모습을 가장하고 나서야 한다. 악령은 영혼이 하느님과 성덕을 갈망하는 욕구를 이용해서 그를 빗나가도록 획책한다. 만일 영혼이 기도하기를 좋아하면, 악령은 그것을 부채질하여 여타의 비범한 체험을 맛보게 하거나 환상을 제공해서 그로 하여금 자만에 빠지게 하거나, 사도적 책임을 소홀히 하도록 유도한다.

 

만일 영혼이 성령기도 공동체에서 새 삶을 발견했을 경우, 악령은 그를 이 공동체에 푹 빠지도록 부추기어 배타적이 되도록 하고, 타인에게 자신의 신심 행위를 따르도록 강요하게 만든다. 만일 영혼이 정의와 사랑의 사업에 투신할 경우에 악령은 이 투신을 부추겨 무익한 많은 숫자보다 좋은 소수가 더 좋다는 논리로 교회의 미지근한 지도자를 경멸하도록 하고, 기도는 사치스러운 행위로 보도록 유도한다.

 

이처럼 우리가 활동하는 동안 악령은 착한 영혼들의 성덕 수확을 망치려는 일들을 멈추지 않는다. 십자가 성 요한은 우리가 하느님 안에서 성장하면 할수록 그리고 교회 안에서 선을 행하는 잠재 능력이 커지면 커질수록 악령은 추수를 망치기 위하여 그만큼 더 열심히 많은 일을 한다고 말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악령이라 생각하면 어디에 집중할 것인가? 아마도 십중팔구 교회에서 선을 행할 잠재력이 가장 큰 사람에게 집중할 것이다.

 

이처럼 악령은 방심할 수 없는 존재이며 경건한 어떤 생각과 행동도 악령에게 영향을 받는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느님의 활동과 악령의 활동을 식별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 이냐시오는 "우리들의 생각함의 진행에 대하여 극히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만일 시작과 중간과 끝이 다 좋아서 온전히 좋은 것에도 기울어진다면 그것은 선한 신의 표지이다. 그러나 한 가지 일을 생각하다가 도중에 악한 것, 탈선된 것 또는 전에 행하기로 결심한 것보다 덜 좋은 것에로 기울어지거나, 전에 영혼이 갖고 있던 평화와 안정과 안식을 빼앗음으로써 영혼을 약하게 하고 요란스럽게 하고 당황하게 만들면, 그것은 악령에게서 온 표지이다" 라고 말한다.

 

그러나 악령은 자신의 존재를 완전하게 은폐할 수 없으며 철저하게 순수한 위안도 창출해내지 못한다. 악령은 위안의 기쁨과 평화 면에서 제 아무리 하느님을 흉내낸다고 하더라도 완벽하게 위장할 수는 없으며, 그 꼬리는 드러나게 마련이다. 따라서 그 위장된 위안의 꼬리를 찾아내는 것이 식별이다. 이냐시오의 말에 따르면 우리들이 위안을 체험하게 될 때 "그 시작과 중간과 끝"을 면밀히 살펴 볼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 셋 모두가 좋으면 선한 신의 표지가 되지만, 셋 중 어디에서든지 위장된 꼬리가 드러나면 영신생활의 길잡이로 제시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러면 위안들의 시작과 중간과 끝의 구체적인 상활을 살펴보기로 하자.

 

 

이집트의 성녀 마리아 은수자

 

 

ⓛ 위안의 시작

 

위안이 좋은지 판별하기 위하여 그 시작을 점검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예를 들어 내가 속한 공동체가 함께 모여 회합을 갖거나 공동 작업을 하고 있을 때 기도하고 싶은 강렬한 욕구를 느낀다든지, 아니면 기혼자로서 가족을 팽개치고 한 주일 동안 본당 일에만 전념한다든지, 신학생으로서 다음날 있을 중요한 시험에 대비하여 공부하고 있을 때나 시간표가 공부를 명하고 있을 때에 기도하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꼈다든지, 초심자인 경우에 설교로 인해 받은 은혜 때문에 자신을 성찰하여 그 죄를 정화해 나가는 것보다 자신도 위대한 사도로 착각하여 큰 공동체를 형성해 나갈 것에 빠져 있다든지, 모든 것이 하느님께 달려 있으니 여유를 갖고 쉬도록 하자면서 하느님나라 건설에 일체의 노력을 시도하고 싶지 않은 충동을 느꼈다고 해 보자.

 

이 모든 경우에는 어딘가 잘못된 부분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하느님이 내 현재 생활에 부여된 순명의 의무와 책임에서 제외시키거나, 나를 기도하도록 이끌어서 내가 해야 할 일을 기피하거나, 타인에게 전가시킨다면 잘못된 일이다. 이러한 기도 체험들은 시작부터 그 꼬리의 정체성을 파악할 수 있다. 따라서 이에 따른 위안은 경계해야 한다.

 

② 위안의 중간 상태

 

중간은 위안 체험 자체가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을 때 일어나는 일을 의미한다. 내가 합당한 이유로 합당한 시간에 합당한 장소에 있다고 생각해 본다. 즉 지금은 기도하기 알맞은 시간이며 고결하고 열린 마음으로 기도에 임하고 있다. 그리고 기도 중에 위안을 체험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신심이 공허하거나 비판적인 생각들이 동반하게 될 경우에, 위안 체험 중간에 위장된 꼬리가 발각되는 경우로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기도 중에 자신이 받은 소임의 중요성과 그 사명에 대해 하느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면서 경건한 자세와 열성이 자신보다 못한 사람을 경멸한다든지, 자신이 특별한 위치에 오를 것을 대비해서 좌우명을 짓는 다든지, 아니면 당장 완덕에 도달하겠다는 심상으로 하느님께 열심히 매달리는 것 등, 이 같은 감정이나 생각이 존재한다면, 그 위안은 아름답게 보일지라도 결코 주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또 기도 중에 주님께서 가까이에 와 계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 갑자기 사람이 찾아와서 면담을 요청하거나, 전화가 왔을 때 벌컥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낸다면, 이 때의 기도를 통한 위안이 주님께로부터 오는 것은 아닌 것이다.

 

 

 인간생활의 허영 / 하르멘 스텐베이크

(1645년경, 51x39cm, 오크 나위 위의 유화, 런던 내셔널 갤러리)

 

 

③ 위안의 끝의 상태

 

위안을 받은 결과로 우리가 행하도록, 말하도록, 혹은 생각하도록 감도 받는 것은 무엇일까? 위안의 결과가 악한 것, 탈선된 것, 덜 좋은 것에로 기울어지게 하도록 유도하고 있는가, 또 영혼을 약하게 하고, 요란스럽게 하고 있는가에 대해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성령에 사로잡힌 이들이 하느님께로부터 위안을 받고 있기에 무슨 짓을 해도 그때부터는 죄가 되지 않는다는 확신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예를 들면 1999년 5월 11일 MBC에 방영된 PD 수첩 방영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어는 L목사는 하느님의 사랑과 위안을 받고 있기에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해서 도박, 성추문 서건 등에 대해서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이 없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신도들을 충동질하여 MBC를 점거하고 방송을 중단시키는 폭거를 자행하기도 했다.

 

위안의 끝은 명백히 사악한 것도 있지만, 사악성이 선명하지 않는 끝도 많다. 끝이 주님을 향한 투신에서 탈선하거나, 그보다 덜 높은 것에 기우는 정도에 머무는 경우가 있다. 보다 덜 좋은 것도 여전히 좋은 것인 까닭에 이 때 악마의 책동은 훨씬 미묘하고 식별하기가 어렵다. 이런 경우에는 '우리가 악마라면 독실하고 열심한 사람들이 하느님께로 투신하는 것을 무산시키기 위해서 어떤 묘책을 쓰겠는가?' 라는 것에 대해서 곰곰히 생각해야 한다. 악령의 속임수가 하나같이 극적인 효과, 원대한 효과를 내는 것이 아니다.

 

악령의 거짓 위안은 영혼을 약하게 하거나 요란스럽게 하고 당황하게 하는데서 그치는 경우도 있다. 즉 악령은 사도직에 투신한 영혼들을 관상생활에 대한 강렬한 열망으로 부풀려서 결국에 자신의 현재 위치와 부여된 의무들에 불만을 느낀 채 불안과 초조감에 시달리도록 만들기도 한다. 예를 들면 지나친 열성으로 비현실적인 것에 기대를 갖게 하거나, 힘에 닿지 않는 것에 대해 무리하게 하느님께 약속을 바치는 행위이다.

 

악령이 하느님의 밭에 가라지를 뿌릴 수 있는 아주 복잡한 방식들을 감안할 때 마치 평범한 영혼이 지뢰밭을 안전하게 통과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희망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식별은 하나의 기술이다. 처음 시도 할 때에는 복잡해 보이는 것도 예리하게 경험을 쌓아 나감으로써 식별에 대한 접근이 수월해질 수가 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우리 삶 안에 역사하고 계시므로 우리가 받은 위안과 행동을 위한 영감들 가운데 많은 것들은 정말로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카라바조의 성 예로니모

Caravaggio, St Jerome, 1605-06, Oil on canvas, 118x81cm

Monastery, Montserrat

 

 

Ⅵ. 맺음말

 

하느님께로 나아가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성장하기 위해서 우리들이 풀어나가야 할 몫이며 과제는 직면하고 있는 구체적인 삶 속에서 하느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찾아내는 것이다. 앞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식별해 내는 작업들을 살펴보았다.

 

우리는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움직임들을 파악하여 하느님의 뜻을 발견해 나가는 하나의 기술인 이 식별이 감정과 지성과 의지를 총망라한 全人間과 관계되는 것임을 보았다.

 

하느님의 뜻이 불투명하고 확실치 않은 위기 상황 속에서 올바른 식별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느님의 뜻을 찾고 행하려는 의지를 갖고, 하느님께 개방되어 있어야 하며, 하느님께 투신하고자 하는 확고하고 체험적인 지식을 전제로 해야 한다. 또한 주님께 대한 체험이 많고 깊은 영적 지도자의 도움도 하느님의 뜻을 찾는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식별의 시기에는 신비로운 힘에 휩싸여 강력하게 변화를 촉구하는 계시의 때가 있고, 선택에 있어서 모든 지혜를 동원하여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는 추론의 때가 있으며, 선택의 문제를 놓고 주님 앞에서 최종적으로 확인을 하는 계시의 때가 있다.

 

주님께서 고독을 만드신 것은 아니지만, 그분께서 고독을 허락하신 것은, 우리 자신을 뒤돌아보도록 하시며, 영신적인 시련을 통해 정화시키고, 영신 사정의 올바른 이해와 인식을 주시기 위함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이유와는 달리 고독이라는 상황에 빠지면, 그 고독의 형태와는 반대되는 모습으로 극복하려고 하는 적극적인 노력이 요청된다.

 

영신적 위안과 영신적 고독이라 부르는 영혼의 움직임들 안에서의 식별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악의 세력은 쉽게 굴복하지 않고 또 다른 모습으로 접근해 오기 때문이다. 즉 악령은 선의 모습으로 위장하여 우리를 현혹하고, 더 나아가 주님께로부터 오는 위안을 맛보는 순간에도 악의 세력은 복잡한 양식으로 개입하여 우리의 식별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위안을 체험할 때 '그 시작과 중간과 끝'을 면밀히 살펴봄으로써, 그 위안이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인지 또는 악령의 작용인지를 알아보는 것도 알게 되었다. 곧 이 셋 모두가 좋으면 선한 신의 표지로 알 수 있겠지만, 셋 중 어디서든지 위장된 꼬리가 드러나면 영신생활의 길잡이로 제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식별에 대한 어려움은 교회가 설립된 때부터 생겨난 문제이다. 초대교회도 그리스도다운 식별을 못했기에 잘못된 판단이 내려지고, 교회가 어려운 처지에 빠져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교회가 갈라져서 바오로파, 아폴로파, 베드로파 등으로 파벌이 있는 모습(1코린 1,11-16 참조), 여자들이 모임에 참석했을 때 수건을 써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를 놓고 갈라져 잇는 모습(1코린 11,12-16 참조), 이교도들의 법정에다가 서로 소송을 거는 모습(1코린 6,1-7 참조) 등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문제를 심각하게 보았던 사도 바오로는 그 원인을 사랑의 부족으로 본 것 같다. 그래서 그는 결론적으로 사랑의 정의를 내리고, 사랑이 없으면 말과 행동에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이라고 고백하고 있다(1코린 13장 참조). 사도 요한 역시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예수께서도 십자가라는 시련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하신다(요한 3,14-16). "사랑이야말로 기도의 모든 것이며 기도의 조건이며, 기도의 목적이다."

 

따라서 우리가 주님을 알고 그분을 깊이 사랑한다면 그분의 표징을 읽고, 그분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식별해낼 수 있는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사랑하라. 그리고 그대가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말씀하시며, 아빌라의 성 데레사는 "그대에게 깊은 감화를 주어 사랑하게 만드는 일이면 무엇이든 행하여도 기도의 규범이 되며,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십자가의 성 요한 역시 "이 세상 안에서 하느님과의 사랑에 빠졌던 사람"이다. 세상 안에서 하느님을 찾고 또 만나 뵈었던 분이다. 그의 삶은 현세의 모든 것을 통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 가는 과정으로 보게 된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여러분은 더 뛰어난 은총의 선물을 간절히 구하십시오. 내가 여러분에게 무한히 더 뛰어난 하나의 길을 보여 드리겠습니다."(1코린 12,31)라고 말씀하신 후에 "여러분은 사랑을 구하십시오"(1 코린 14,1)라고 권고를 하고 있다.

 

주님을 따르는데 시급히 구해야 할 은총은 바로 사랑임을 알 수 있다. 식별이란 이처럼 사랑을 통한 인식에 바탕을 둔 판단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은 우리에게 수난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의지를 갖도록 해주며, 교회 안에서 역사 하시는 성령께 대한 깊은 순명심과 보다 더 하느님의 뜻을 정확하게 찾을 수 있는 식별력을 갖게 해 준다.

 

<끝>

 


 

 

 

프란치스코 성인의 식별을 청하는 기도

 

"주님! 제 마음의 어두움을 밝혀 주시고, 참된 믿음과 굳은 희망과 완전한 사랑을 제게 심어 주소서. 그리하여 당신의 거룩하고 참된 계명을 깨닫고 알아 실천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