Ⅳ. 식별의 시기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인 우리와 관계하시는 방식들을 확고하고 정확하게 이해하는 토대 위에서 식별이 무엇인가를 명확히 파악하는 것이 필요한데, 이냐시오는 삶의 길을 정확하고 훌륭하게 선택할 수 있는 시기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사도 성 바오로(Paulus)
1. 계시의 때
첫 번째는 계시의 때이다. 이냐시오는 이 때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열심한 영혼이면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을 만큼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을 움직이시고 끌어당기는 때이다." 이 시기는 바오로 사도와 마태오 사도가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고 즉시 따르는 때이다. 이 때는 하느님의 뜻이 너무나 자명해서 그분이 바라시는 바가 무엇인지 의심할 여기자 없게 된다. 바오로는 타고 있는 말에서 떨어져 눈이 멀게 된 순간에 어떤 분으로부터 직접"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이다. 일어나서 고을로 들어가거라. 그러면 네가 할 일을 네게 일러줄 것이다"(사도 9,5)는 말씀을 듣는다. 바오로는 그 때 자신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권능을 너무도 선명하게 실감하고 또 예수의 말씀이 너무나도 분명해서 주님이 자기에게 무엇을 바라시는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마태오가 세관 앞에서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예수께서는 그에게 "나를 따라 오라"(마태 9,9)고 말씀하시자, 그는 벌떡 일어나 예수를 따라 나선다. 이 때 마태오가 겪는 주님의 체험은 너무나 분명하고 직접적인 것이기 때문에 주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 수 있어서 의심 없이 예수님을 따라 나설 수가 있었다. 이러한 계시의 경우에는 하느님의 뜻에 불분명한 점이나 불투명한 점이 없기 때문에 따로 식별할 필요성을 가질 수가 없다. 이 시기에는 변화를 초래하는 하나의 신비로운 힘을 지닌 시기이다.
헨드리크 테르브뤼겐 / 성 마태오사도를 부르심 Hendrick Terbrugghen, The Calling of St Matthew 1621, Oil on canvas, 102 x 137 cm / Centraal Museum, Utrecht
예수를 따라 나섰던 요한과 안드레아는 마태오와는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들은 예수님의 뒤에서 관찰을 하고, 질문을 하고 난 후에 예수께서 머무르시는 곳에 가서 보고, 그리고 함께 지낸 후에 예수를 따라 나선다(요한 1,35-39 참조). 하지만 마태오는 자기를 부르는 순간에 그를 따라나서는 결단을 내린다. 엄격한 의미에서 좋은 선택을 위한 이 계시의 때는 식별이 불필요하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뜻에 대한 의구심이 전혀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식별할 것이 아무 것도 없게 된다. 이 때는 하느님의 뜻이 절대적으로 분명하다는 의미에서 이상적인 상황이다.
2. 추론의 때
이 때는 하느님의 뜻과 관련해서 짙은 불확실성이 존재하는 때이다. 이냐시오는 "이 때는 평온한 때이다. 평온한 때라 함은 영혼이 침착해 있어 각종 신들의 책동으로 흔들리지 않고 자유롭게 또 침착하게 자기 본성의 기능을 사용하는 때" 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래서 이 때는 주님을 찬미하고 자기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 교회 안에서 자신의 신분에 대해 생각하고 선택할 때이다.
추론의 때에 우리는 마치 느낌의 세계가 아닌 침착한 이성적 분석의 세계에 와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이 때에 적용되고 있는 방법 하나는 먼저 결정해야 할 일을 상기하고 그 다음에 내가 창조된 목적을 생각해야 한다. 이냐시오는 이 때에는 "나의 지혜로써 올바르게, 또 충실하게 검토하여 하느님의 거룩하신 뜻대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보다 나은 것을 선택하도록 빌어야 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내가 선택하고자 하는 것은 모든 각도에서 검토한 다음에 이치가 어느 편으로 더 기울어지는지 보아서 감정이나 편견을 따르지 않고 이치가 더 기울어지는 편을 따라 선택을 결정한다."
이는 사람이 자신의 행동 방향에 대한 불안을 해소하는 논리적 방법으로서 하느님을 안중에 두지 않고서 순전히 현세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손쉽게 활용할 수 있다. 이냐시오는 이 시기에 있어 올바르고 좋은 선택을 하기 위해 주의해야 할 사항을 세 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첫째는 내가 현재 당면한 선택 문제와 동일한 선택 문제에 봉착한 사람이 나를 찾아왔다면 나는 그에게 어떤 충고를 해줄 것인지 생각해 본다. 둘째는 내가 지금 죽음의 자리에 누워 있다고 가정하고 내가 어는 것을 선택할 것인가를 자문해 본다. 셋째는 심판 날에 내가 어떠한 처지에 있을지를 상상하고 그 때에 이 선택에 대하여 어떠한 결정을 하고 어떠한 규칙을 따랐더라면 좋았는지를 생각해 본다.
이처럼 매번 자신이 처한 현재 상황에서 멀리 떨어져 자신을 바라봄으로써 혼란을 극복할 수 있는 필요한 빛을 받게 된다. 하지만 자신의 문제를 멀찍이 떼어놓고,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일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추론의 때에 취하는 선택 방법은 하느님의 음성보다 우리 자신의 마음에 귀를 기울여 비교적 나은 판단을 도출해내는 것이다. 따라서 이 방법을 식별이리고 할 수는 없지만, 하느님께서 우리 자신의 비교적 훌륭한 판단을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통로로 삼을 수도 잇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불가사의한 음성들과 영상들을 알아듣고, 볼 수 없는 한 이러한 추론의 기능은 때로 하느님의 뜻을 찾아내는 또 하나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3. 식별의 때
즉 타고난 이성적 또는 사색적 방법을 통해 선택을 하고, 그 선택을 주님 앞에 제시하고 그분의 확인을 받아야 할 때이다. 이 때는 선택은 했지만, 아직 결정을 내릴 수 없는 상태를 말하고, 주님께서 바라시는 바가 무엇인지 모르는 때이지만, 삶의 주관자이신 예수님 앞에서 선택의 문제를 풀어놓고, 주님의 주관 하에 결정되기를 바라는 때이다. 그리고 그 결정이 한결같이 딱 들어맞는 느낌, 올바르다는 느낌을 갖고, 내적으로 한결같은 평화를 느낀다면 그 결정은 주님께로부터 온 것이다.
Ⅴ. 고독과 위안(상태) 안에서의 식별
1. 고독
이냐시오는 고독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영혼의 어두움과 어지러움과 비열하고 세속적인 것에로 기울어짐과 또 희망과 사랑 없이 영혼을 실망에로 밀어 넣는 여러 가지 흔들림과 유감에서 오는 마음의 불안 따위를 말한다. 결국은 영혼이 게으르고 냉담하고 비통해서 마치 조물주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느낀 경우를 말한다." 즉 죄의 유혹이나 어떤 방식으로든 주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키거나, 주님을 불신하도록 유혹하는 모든 세력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고독이 주님이 우리를 불쾌하게 여기시는 표지나 우리가 주님에 대한 투신을 소홀히 하고 있다는 표지로 볼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고독은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정확하고 강화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독은 결코 하느님께로부터 오지 않으면서 동시에 가장 효과적인 성장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은 하나의 역설이라 볼 수 있다. 이냐시오는 고독이 초심자들의 덕을 쌓는데 필수 불가결한 체험이라 한다. 악령이 초심자들을 시험하고 현혹하는 통상적인 방법이 바로 고독이다. 이러한 고독은 어두움, 낙심, 좌절, 근심, 불안, 두려움, 미지근함 등으로 나타나며 그 특징은 평화의 상실로 드러난다.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
기도하는 초심자들은 좌절과 낙담이 엄습할 때 대부분은 하느님께서 이러한 고독의 형태로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고 믿기에 자기가 원하던 일을 멈추거나 소명의 길에서 떠나야 한다고 추론한다. 기도가 어렵고 메말라지면 주님이 자기를 버리셨으며 참아내는 것은 아무소용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마치 신혼부부가 최초의 역경에 봉착하여 싸움이 일어나면 결혼에 대해 후회하고 잘못된 결혼이라고 판단하는 것처럼, 신앙인들도 갑작스럽게 닥친 고독을, 하느님이 자신을 불쾌하게 여기는 표지로 생각하거나 자신이 선택한 진로에 대해서 승인하지 않고 있다는 표지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버린다는 것이다.
이 때 이냐시오는 "영혼이 고독할 때에는 어떠한 변경을 해서는 안 된다. 오직 고독한 상태에 빠지기 전 위안 상태에 있을 때 가진 결심을 끝까지 고수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전에 한 결정을 무엇이나 바꾸어서는 안 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다만 고독에 빠진 상태에서는 결정을 변경해서는 안 되는 일이며, 또한 이 시기에는 새로운 결심도 하지 않아야 한다. 그 이유는 "위안 상태에서는 주로 선신이 우리를 지도하고 권고함과 같이 고독할 때에는 주로 악신이 책동하는데 악신의 권고를 따라서는 결코 우리가 올바른 결정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고독은 악령 이 작용하고 있다는 표지이다. 악령은 착한 사람들이 겪고 있는 시련을 하느님께서 싫어하시고, 저버리신 표지라고 확인시켜 신심을 혼란케 만든다. 불행히도 악령은 모든 면에서 우리보다 훨씬 날렵한 재치를 지니고 있다. 교황 바오로 6세는 "악령은 사악하고 살아있는 영적 존재입니다. 신비스럽고 소름끼치는 무시무시한 실체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고독 상태에 빠져 있을 때 우리는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고독할 때는 전에 결정한 것을 바꾸어서는 안되지만, 고독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바꾸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예를 들면 더욱 기도하고 묵상하고 성찰하고, 고행을 더 함으로써" 고독을 극복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한스 멤링의 성 예로니모 Hans Memling, St Jerome 1485-90, Oil on oak panel, 87.8 x 59.2 cm Offentliche Kunstsammlung, Basle
고독은 때로 하느님이 자기를 버리셨으며 하느님께 도달하고 하느님을 기쁘게 하려는 일체의 노력들이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낙담에 빠지게 한다. 그런가 하면 고독이 우리의 도움을 외쳐대는 세상에서 그 모든 경건한 실천들이 너무도 자기 중심적이고 자기 도취적이라고 느껴지는 성스러운 불안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지난 80년대 민주화 항쟁을 위해 많은 젊은 학생들이 희생되고 투옥되어 있는 생활에서 기도에만 충실하는 것은 로마는 불타고 있는데 자신은 바이올린이나 켜고 있는 것처럼, 세상일에 대해서 지나치게 수수방관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것도 고독의 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성숙한 기도자도 고독에 빠지면 기도할 때마다 시계를 쳐다봐야 하는 필요성을 느끼게 되고, 기도 시간이 지루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기도는 짧고 효과적으로 바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유혹이 생길 수 있다.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시간을 엄격하게 지키거나, 평소보다 시간을 더 할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고독 중에 있는 자는 자기가 받고 있는 괴로움과 반대되는 인내를 지속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고독한 상태에 있는 자는 다음과 같이 생각해야 한다. 즉 하느님께서 가끔 우리를 시련하기 위하여 우리의 본성의 능력으로 원수의 여러 가지 선동과 유혹에 대항하도록 버려 두신다는 것이다." 마치 유능한 코치가 운동선수를 튼튼하게 훈련시키기 위해서 운동장을 수없이 돌게 하는 것과 유사하다.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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